전국시대 미녀 고생담

戦国小町苦労談


작가: 夾竹桃


어느 날, 한 명의 소녀가 전국시대로 타임슬립했다.

그야말로 신의 변덕, 악마의 심심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뜬금없이.


소녀는 세계를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디에나 있는 극히 보통의, 그리고 평범하고 수수한 소녀였다.

그런 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다.


전국 시대를 살아남는다 - 그것 뿐이다.





번역: 가리아



텐쇼(天正) 2년 토우고쿠(東国) 정벌(征伐)


134 1575년 11월 중순



사상 최초가 되는 사진 촬영은 소모품이 고갈되면서 끝을 고했다.

노부나가나 조정의 압력이 있었다고는 해도, 뭐가 뭔지 종잡을 수 없는 사진 촬영에 협조해 준 호우류우지(法隆寺)의 승려들에게, 시즈코는 정중하게 예를 표함과 함께 기증한 사진을 넣기 위한 액자(額縁)를 선물했다.

한 마디로 액자라고 해도, 최첨단의 기술이 아낌없이 들어간 특제품이며, 장식이 없이 수수(無地)하면서도 묵직한 중후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해외에서 들여온(舶来もの) 흑단(黒檀) 무구재(無垢材)를 연마한 프레임에 얇고 투명도가 극히 높은 유리를 끼운, 세계가 넓다고 해도 시즈코밖에 준비할 수 없는 명품(逸品)이었다.

사진은 외기(外気)에 노출되면 변색되거나 퇴색된다는 것을 말하고 액자에 넣어 보존할 것을 진언한 후 철수 준비에 착수하게 되었다.


기술자들이 기재(機材)의 해체와 포장을 시작하고, 호우류우지 바깥에 진을 쳤던 병사들에게도 철수 준비를 하도록 통고한 후에 할 일이 없어진 시즈코는 다들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사진기사와 뭔가 이야기를 하고 있던 코타로(虎太郎)가 시즈코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 말을 걸었다.


"태엽식의 셔터가 고장난 원인은 주인님이 명하신 장치 자체의 소형화에 따른 폐해라고 합니다. 어째서, 소형화를 고집하신 겁니까?"


코타로의 질문을 받은 시즈코는 턱에 손을 대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현재 상황에 만족해서 정체되어 버리면 의미가 없어요. 확실히 큰 부품이라면 큰 오차를 허용할 수 있으니 튼튼한 장치를 만들 수 있어요. 하지만, 연료가 불필요한 소형 동력장치인 태엽은, 카메라 뿐만이 아니라 여러가지 용도로 수요가 생길 거에요. 대량으로 만들게 되면 커다란 태엽은 그만큼 여분의 재료를 필요로 하게 되고, 그 차이는 제조하면 할 수록 가속도적으로 늘어가게 되죠. 그렇죠? 조금이라도 이른 시기에 소형화하는 쪽이 좋다는 게 이해되죠?"


"분명히 회중시계(懐中時計)라고 하셨던가요? 주인님이 열중하고 계시는 기계식 시계는 문자 그대로 품(懐) 속에 들어가서 개개인이 가지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작게 만드신다고 하셨죠"


"이 태엽식 셔터도 일정한 시간을 계측하고 있는 거에요. 작동시키면 반드시 같은 초수(秒数)로 셔터를 닫지요. 이번에는 태엽을 구성하고 있는 얇은 강철판이 감아올리는 힘에 버티지 못하고 파손되어 버렸지만, 재료를 바꾸거나 두께를 바꾸거나 해서 재도전할 생각이에요"


"여전히 시행착오를 계속하실 거군요?"


"오늘의 실패를 기록하고, 어째서 실패였는지를 분석해서, 내일에야말로 성공시키기 위해 계속 도전하는 거에요. 나는 그것을 '과학(科学)'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지식이나 경험을 정리하여 미래로 계승시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기에 세계의 진리를 밝혀내어 지식으로 정리하는 연구는 결코 멈출 수 없어요. 뭐, 돈이 되지 않는 연구도 많으니, 돈이 될 만한 연구를 전면으로 내세워야 하지만요"


시즈코는 쓴웃음을 지으며 마무리했다. 시즈코는 그녀의 할아버지의 손에 의해 영재교육을 받아, 어렸을 때부터 농업을 통해 연구 현장에 관여했었다.

농업의 연구라고 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결과가 나오는 것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린 시즈코는 할아버지가 매일 달라붙어 있는 기초 연구가 무슨 소용이 있는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할아버지돠 함께 농작업을 하는 동안 할아버지가 꿈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즈코의 안에서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하여, 시즈코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에 그 중 하나가 현실에서 결실을 보았다.

당시 일본 전역에서 재배되고 있던 코시히카리(コシヒカリ) 계열의 쌀을 개량하여, 수확량은 유지하면서 키를 3할 정도 낮춘 품종으로서 정착시켰다.

시즈코의 할아버지가 탄생시킨 품종은, 키가 작기 때문에 잘 쓰러지지 않고 병충해에도 강한데다, 재배에도 손이 가지 않는다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의해 시즈코의 할아버지는 그 해의 자수포장(紫綬褒章, ※역주: (학문·예술 등에 공적이 있는 사람에게 정부가 주는) 자줏빛 리본이 달린 기장)을 수상하게 된다 (후에 황수포장(黄綬褒章)도 수상).

이러한 경위도 있어, 그녀는 기초연구의 중요성을 직접 보았기에, 기술자들에게도 연구를 권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연구하는 데 있어 큰 문제가 드러났다.

그것은 학문으로서 과학이 정착되지 않은 전국시대에는, 연구 성과를 어떻게 전하는 지에 대한 가이드라인조차 없었던 것이다.

현대에서 시즈코 자신은 연구 성과의 하나인 논문을 볼 기회는 있었으나, 자신이 논문을 쓰는 상황에 처한 적은 없었기에 연구 논문의 요제(要諦)를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

이 때문에, 현대에서 가져온 휴대전화에 보존되어 있던 데이터를 배터리가 가동하는 동안 종이에 옮겨썼던 특허 신청에 관한 자료를 찾아내어 그것을 베이스로 만들기로 했다.

우선 이론을 전개하기 위한 포맷으로서, 사상(事象)을 관찰하고, 거기서 추론을 끌어내어, 가설을 세우고, 가설을 바탕으로 실험을 하여, 실험 결과에 대한 고찰을 첨부한다는 일련의 개요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이론을 바탕으로 연구 성과가 결실을 맺었을 때는, 연구를 하게 된 전제를 기록하고, 연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를 거명하며 그것들을 어떻게 해결했는지를 정리하여, 최종적으로 결과로서 보고한다는 형식을 기초로 정했다.


시즈코로서는 나름 자신을 가지고 도입한 제도였으나, 도입 당초에는 잘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러한 틀(枠組み)을 이해하고, 포맷을 이용하여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고등교육에 상당하는 학식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즈코는 기술자들과 함께 연구를 하고, 솔선하여 자료를 작성하고, 의미를 들려주고, 실제로 실험을 하게 하여 자료를 만들게 하고 그것을 평가했다.

이리하여 서서히 연구 수법은 모두에게 침투해 갔으나, 이번에는 다른 문제가 떠올랐다. 그것은 실패의 은폐였다.

실패가 즉시 목숨에 직결되는 전국시대 특유의 사정도 있어 좀처럼 근절되지 않았다.

실패라고 해도 어째서 실패했는지 원인을 찾고, 그것을 성과로 삼는 것을 장려하고 있었으나 실제는 잘 되지 않았다.

연구자는 자신이 세운 가설에 집착하고, 자신이 보고 싶은 결과만을 보려 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인간이 가진 본질적인 문제이기에 즉각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금후에도 인내심을 가지고 장기적으로 의식 개혁을 추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흠, 과학입니까. 그것은 주인님의 도서실에서 본, 당(唐)의 '과거지학(科挙之学)'과는 다른 것 같군요"


중국에서 과학이라고 하면 과거지학의 약어이며, 12세기 무렵부터 사용된 듯 하다.

그에 반해 일본은 막부(幕) 말기에서 메이지(明治)에 걸쳐 과학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게 되었다.

뭣보다, 당시에 그 단어를 사용했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나 이노우에 코와시(井上毅) 같은 인물들은, 체계화되고 정리된(분과(分科)된) 학문의 집대성으로서 과학이라고 불렀다.


"으ー음, 발단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과거(科挙)는 광범위한 지식을 묻는 시험이지만, 과학은 체계별로 분류된 학문이라는 느낌일까요?"


"흠…… 주인님의 나이에서 이만큼 함축적인 단어를 만들어 내려면 얼마만한 경험을 쌓아오셨는지 흥미가 끊이지 않는군요"


"아하하ー……"


시즈코로서는 선인(先人)이 고심 끝에 만들어낸 성과를 표절하는 듯 하여 켕겼지만, 솔직하게 이유를 들려줄 수도 없으니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코타로는 시즈코의 모습을 보고, 이 건에 대해서는 그다지 언급하지 않았으면 하는 듯 하다고 헤아리고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


"그런데 주인님, 이 정도로 정밀한 기록이 가능한 사진인데, 인물은 촬영하지 않는 겁니까?"


"아ー, 응. 그건 생각했는데 말이죠. 일본에는 사람 모습을 한 것에는 혼이 깃든다는 생각이 있어서, 이만큼 똑같이 모습을 찍어내면 혼이 그쪽으로 옮겨가 버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그 말씀은, 주인님은 다른 견식을 가지고 계시군요?"


"당연하죠. 그 논리로 따지면, 고요한 수면에 모습이 비치면 물 속으로 혼이 빠져나가나요? 그렇지는 않잖아요? 오래 남으니까 서서히 혼이 빠져나가 일찍 죽는다고 다들 이야기하는데, 그러면 매일 물가에서 일해서 수경(水鏡)에 모습이 비칠 기회가 많은 수부(水夫)는 육지 사람들보다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일찍 죽지 않는 게 이상할텐데 말이에요"


"과연, 탁월하신 식견(卓見)이시군요. 그렇다면 실제 예를 만들어버리면 됩니다. 만약 희망자가 없다고 하면 이 코타로가 맡아 보이죠"


코타로는 그렇게 말하며 시즈코를 보고 웃었다.

시즈코의 눈에 비친 코타로는 실로 흥미깊은 듯한 표정으로, 제물(人柱)이 되어주겠다 같은 비장한 결의는 보이지 않았다.

본인이 바란다면 그것도 좋겠다고 생각한 시즈코는 코타로에게 대답했다.


"그러네요, 오와리(尾張)까지 돌아가서 카메라 수리가 끝나면 촬영할까요"


"오오! 들어주시는 겁니까. 크크크, 이걸로 최초로 사진에 찍힌 인물로서 후세에 전해지겠지요. 저를 파문한 교회 놈들은 이를 갈며 분해하겠군요!"


평소에는 파문 같은 건 신경쓰는 기색도 보이지 않는데 빈틈없이 원한을 가지고 있던 코타로와 그 보복 방법에 시즈코는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에는 얽매이지 않는 거 아니었어요? 뭐, 상관없지만"


흥분한 모습으로 걸어가는 코타로를 바라보면서 시즈코는 철수 준비가 끝난 것을 확인하고 호우류우지의 승려들에게 떠나겠다는 뜻을 전달한 후, 중계지가 된 쿄(京)를 향해 출발했다.


"쿄에 도착하면 아이들과 합류해야지. 자자,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쿄에 남겨놓고 온 시로쿠(四六)나 우츠와(器)가 떨어져 있던 동안 어떤 생활을 했는지 생각하고 있었다.




쿄까지 한나절 정도 남은 곳에서 노부나가의 명령을 받은 이케다 츠네오키(池田恒興)로부터 파발마가 도착했다.

듣자 하니, 시즈코가 아니라 나가요시(長可)를 지명한 출두 의뢰였다. 나가요시는 자기 군의 지휘를 부관에게 맡기고 사자와 함께 선행하여 츠네오키의 쿄 저택으로 가게 되었다.


나가요시가 저택에 도착하자, 츠네오키가 직접 마중하며 안채(奥座敷)로 안내되었다. 사람들을 물린 후, 츠네오키가 말한 내용은 단순한 명령이었다.

사카이(堺)의 어떤 호상(豪商)이 조상 대대로 물려받아온 토지를 타인에게 양도해버렸기에, 그에 대해 처벌하라는 것이었다.

공지공민제(公地公民制)였던 아스카(飛鳥) 시대라면 몰라도, 토지의 개인 소유가 공공연하게 인정되는 전국시대에서 토지의 매매에 노부나가가 개입하는 것은 묘하다고 생각하여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자, 양도 대상자가 외국인이었다.


"과연, 일벌백계(一罰百戒)로군. 매국노의 말로를 세상에 보이면 되는 것인가"


그걸 들은 나가요시는 즉시 노부나가가 원하는 것을 깨달았다.

같은 일본의 백성에게 토지를 양도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이게 외국인이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일본 내에 타국의 영토가 생겨버리는 것이다.

천황(天皇)을 받들며 천하통일을 이우려록 하는 노부나가로서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행위였다.

물론, 노부나가로서도 정보를 탐지한 후 여러 번 거래를 중지하도록 서신이나 사자를 보냈다.

이 호상이 무엇을 꾀하고(企図)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노부나가의 요구를 거절했다.

마침 토우고쿠(東国) 정벌의 실패가 전해진 것과 같은 시기였기에, 노부나가의 지배 아래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 보고를 받은 노부나가는, 그 이상의 교섭을 중단하고 무력으로 제재를 가하는 방향으로 방침을 선회했다. 그 실행자로서 나가요시가 선택된 셈이다.


"주상(上様)의 명은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지금부터 사카이로 가려 해도 여행 준비도 할 수 없고, 곧 해도 질 것입니다. 오늘 밤은 쿄에 머물며 우리 주군에게도 상황을 보고한 후, 내일 아침 쿄를 출발하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알겠네. 하지만, 사카이가 솔직하게 모리 님을 받아들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주상께서는 '허튼 수작을 부리려는 놈들이 벌벌 떨도록 해라'고 하셨네"


"과연, 저(拙者)에게 맞는 명령, 잘 알겠습니다"


노부나가의 말은, 나가요시에게 사카이를 불태워도 좋다고 하고 있었다.

노부나가의 전권 위임장이나 마찬가지의 권한을 얻은 나가요시의 머릿속에서는 상대를 어떻게 요리할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무변자(武辺者)의 인상이 강한 나가요시였으나, 공성에서의 허래스먼트(Harassment) 이래, 이런저런 책략을 구사하는 것도 능숙해져 있었다.

상대가 용서를 구하며 애걸하는 것을 생각하니 지금부터 기분이 고양되는 나가요시였다.

제아무리 나가요시라도 같은 진영의 연장자인 츠네오키에게는 경의를 표하고 예의바르게 물러나온 후 시즈코의 쿄 저택으로 향했다.


"늦었네. 그래서, 이케다 님은 뭐라셔?"


"주상으로부터의 밀명으로, 사카이의 말썽꾸러기를 처리하게 되었어"


"사카이를 잿더미(焼け野原)로 만들지는 말아줘?"


나가요시를 지명한 말살 지령이니만큼, 사카이를 불태울거라고 생각된 나가요시는 분개했으나, 동석하고 있는 사이조(才蔵)도 시즈코와 같은 의견이었는지 약간 어이없는 모습으로 나가요시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니아니, 아무리 나라도 이유도 없이 사카이 정도의 도시를 불태울 리가 없어! 그렇게 신용이 없는거냐, 나는"


"자기가 말하고 있잖아, 이유가 있다면 불태울 수도 있다고…… 그리고 지금까지 네가 저질러 온 일을 생각하면 그렇게 과장스러운 것도 아니야"


시즈코의 냉정한 지적에 나가요시는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세상에서는 '오다에게 적대하면 붉은 악마(赤鬼)가 나타난다'라고 하고 있을 정도로 나가요시의 일화에는 살벌한 것이 많다.

붉은 악마란 적의 피를 뒤집어써 새빨갛게 물든 나가요시를 가리키는 은어(隠語)로, 오다 가문에 적대하면 나가요시가 나타나 지옥도를 만들어낸다고 생각되고 있었다.


"덕분에, 내가 빌려준 닝겐무코츠(人間無骨, 십자창(十文字槍))이 완전히 네 상징으로서 정착되어 버렸잖아"


"미안하다고는 생각하지만, 역시 이즈미노카미(和泉守)의 작품이야. 손에 딱 붙더라고"


나가요시의 혹사를 견뎌낸 바디시(bardiche)였으나, 아무래도 무리가 쌓였는지 한 번 해체해서 다시 벼려낼(打ち直す) 필요가 생겼다.

그때까지 맨손으로 지내게 할 수도 없다고 생각해서 시즈코가 나가요시에게 빌려준 것이 앞서 말한 닝겐무코츠였다.

그 때까지는 바디시나 도깨비방망이(金棒) 같은 중량으로 깨부수는 무기를 사용해 온 나가요시였으나, 역사적 사실에서도 나가요시가 애용했다는 닝겐무코츠의, 중량과 예리함을 겸비한 느낌은 그를 매료시켰다.


"불법으로 설치된 관문(関所), 대체 몇 개나 박살냈다고 생각하는 거야?"


"20개부터는 세지 않았어!"


당시에는 영주(国主)가 설치하는 공적인 관문 외에, 대관(代官)이나 현지 유력자가 사적으로 설치한 불법 관문이 곳곳에 존재했다.

존재 그 자체가 불법인 것이기에 어떻게 처리하던 문제가 없는 것을 악용하여 나가요시는 그런 관문을 즐겨 습격했다.

그 밖에도 취객(酔漢)과 요란하게 싸움을 벌이거나, 사찰(寺)을 불태우거나, 민가로 쳐들어가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애초에 주정뱅이는 무전취식을 해놓고 점주를 위협하여 금품을 강탈하려고 한 놈이었으며, 불태워진 사찰도 금지된 고리대금업에 손을 댄 땡중(生臭坊主)을 처리한 결과였다.

민가에 쳐들어간 사건은, 나가요시의 부하가 집주인에게 부인을 빼앗긴데다 도적(賊)으로 꾸며져 입막음을 당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사정을 모르면 무법자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자기 편(身内)에 대한 속깊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나가요시를 좋아하는(慕う)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도중까지는 괜찮아. 하지만 말야, 어째서 타인의 재산을 가지고 돌아오는 거냐고……"


"시즈코도 항상 말했잖아. 재화는 써야지 의미가 있다. 죽은 자는 재산을 쓰지 않고, 내버려두면 불타버리지. 그렇다면 가지고 와서 내가 쓰는 편이 좋은 게 도리에 맞잖아?"


"아아, 그래……"


어디까지나 세상을 위해서라고 주장하는 나가요시에게 시즈코는 할 말이 없었다. 애초에 가볍게 집을 불태우지 말라는 말은 결국 하지 못했다.

이만큼 방약무인하게 행동하는데도 처벌이 없는 것은, 나가요시가 노부나가의 총애를 받고 있기 떄문이었다.

아무리 시즈코가 꾸짖어도, 노부나가가 용서해버리면 시즈코로서도 추궁할 수 없다.

노부나가로서는 자신이 믿는 도리를 따르며 우직하면서도 자유분방하게 행동하는 나가요시를 좋게 생각하고 있어, 나가요시가 저지르는 짓을 짓궂은 장난(やんちゃ) 정도로밖에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동료인 케이지(慶次)는 나가요시를 난폭한 구석(暴れ癖)이 있는 녀석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으나,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분별하고 있는 한은 참견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좋아, 결정했어. 이번의 주상의 임무는, 무력을 쓰지 않고 상대를 징계하고 와"


"야야, 주상께서는 처단(始末)하라고 하셨다고. 무사가 무력을 쓰지 않고 어떻게 처단하라는 거야"


"변명은 필요없어. 감정적으로 행동하게 전에 머리를 쓰라고. 만약 금지령을 깨고 사카이를 공격했다간 군을 보내겠어!"


시즈코의 말에 제아무리 나가요시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시즈코가 군을 보내게 되면, 개인의 무용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는 싸움이 된다.

나가요시로서도 자신을 높게 평가하여, 재능을 발전시키고 키워준 시즈코를 적대하고 싶을 리가 없다.

게다가, 개인의 무용 승부가 된다고 해도, 나가요시는 자신이 사이조에게 이길 수 있는 비전이 떠오르지 않았다.

공격 능력만을 따진다면 자신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자신도 있다.

그러나, 사이조는 무인으로서 원숙기(円熟期)에 접어들고 있어, 단순한 힘자랑으로는 당해낼 수 없는 수련을 우직하게 쌓고 있었다.

그의 방어를 돌파하여 칼날을 찔러넣는 게 가능하냐고 물으면 아니라고밖에 할 수 없다.


"알았어알았어. 하지만, 힘으로 안 되면 교섭인가……"


"어머? 나는 한 번도 '교섭으로 해결해라'고 하지 않았거든?"


"어? 아! 그런 얘긴가. 전부터 생각했지만, 얼핏 얌전해 보이는 시즈코 쪽이 더 무섭단 말이지"


간신히 시즈코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고 있는지 나가요시는 헤아렸다. 시즈코가 금지한 것은 사카이를 공격하지 말아라, 사카이를 불태우지 말아라이며, 드러나지만 않으면 무력을 써도 문제없는 것이다.

애초에 노부나가가 교섭을 중단한 상황인데, 자신이 대리로 교섭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눈에 보이는 무력 이외의 것을 사용한다면 뭘 해도 좋다는 말이기도 하다.


"맡겨둬! 열흘도 지나기 전에 그놈을 주상께 사죄하러 가게 만들겠어!"


나가요시가 직접 무력을 쓰고 있는 상황은 차라리 나은 편으로, 계략(搦め手)을 쓰게 되는 쪽이 더 큰 피해가 발생한다는 것을 사카이슈(堺衆)가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의 일이었다.




다음날, 나가요시는 약간의 부하들(手勢)만을 이끌고 사카이로 떠났고, 시즈코는 쿄 저택에 남겨둔 예비 촬영기자재를 반출하여 전용의 보관 장소 이외에서의 보관 결과를 확인하기로 했다.

시로쿠나 우츠와는 사키히사(前久)가 우차(牛車)에 태워서 데리고 카미교(上京)를 돌아다니고 있었기에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동행하고 있는 요시나리(可成)로부터 특별히 보고가 없는 것을 보니 큰 문제는 없다고 판단했다.



다음 날, 나가요시는 사카이로, 시즈코는 예비의 유리 건판과 계란지를 사용하여 쿄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 작업에 착수했다.


"오, 저건 어떨까?"


시즈코가 보존상황의 확인용으로 선택한 피사체는, 볕이 잘 드는 장소에서 뒤엉켜 자고 있는 두 마리의 새끼 고양이였다.

현재의 카메라의 성능으로는 움직이는 것을 사진에 담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딱 맞춘 것처럼 햇볓을 쬐며 자고 있는 새끼 고양이라면 촬영이 끝날 때까지 움직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기분내키는 대로 선택한 이 한 장의 사진이 후에 소동을 일으키게 되지만, 당시의 시즈코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습기를 피해 어둡고 서늘하면서 바람이 잘 통하는 장소에 보관했기 떄문인지, 사진은 문제없이 촬영할 수 있었다.

내친 김이라는 듯 시즈코는 기술자들에게 명하여 추가로 쿄의 거리 모습을 촬영하게 했다. 마침 딱 좋게 날이 흐려져 햇빛이 약해진 것도 있어, 촬영이 완료될 때까지 30초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조건 아래에서 촬영하면, 움직이고 있는 인물은 찍히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거리 모습만이 감광되어 상을 형성하게 된다.

현실과는 다른 무인(無人)의 거리 모습을 보고, 사진의 원리까지는 완전히 이해하고 있지는 못한 기술자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시즈코는 새끼 고양이의 사진과 함께 늘어놓고 찍히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며 모두에게 말했다.


"언젠가 쿄의 거리 모습은 오늘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겠지요. 그렇기에 '지금'을 사진에 담는 것이에요. 우리들이 보고 있는 쿄의 '지금'을, 삶의 모습을 미래에 전하기 위해서, 말이죠"


몇 장의 풍경사진을 찍고 문제없이 보관된 것이 확인되자, 시즈코는 잘 찍힌 2, 3장의 사진을 서신과 함께 노부나가에게 보내도록 수배했다.


"하ー, 끝났다 끝났어"


쿄 저택에 남겨놓은 예비의 기자재와 교환하는 방법으로 응급 수리를 마친 카메라의 사용감을 확인한 시즈코는 다시 포장할 것을 명하여 오와리로 가지고 돌아갈 짐에 합류시켰다.

용무가 끝나니 한가해져서, 저택의 자기 방에서 사키히사와 아이들이 돌아오기를 멍하니 기다리게 되었다.


"결국, 시로쿠와 우츠와는 고노에 님께 계속 맡겨뒀었네"


그대의 아이라면 내게는 손주나 마찬가지, 때로는 할아버지에게 맡기는 것도 좋다는 말을 들은 시즈코는 솔직하게 호의를 받아들였다.

영특한 시로쿠와, 오와리에서 살게 된 이후 감정을 드러내 보이게 된 우츠와가 사키히사의 마음에 들었는지, 솔선해서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이래저래 돌봐주는 모습이 요시나리의 보고에 올라왔었다.

24시간 부모와 달라붙어 있어도 숨이 막히려나, 라고 생각하면서도 떠들썩하면서도 발랄한 두 명이 없는 것에 약간 쓸쓸함을 느끼고 있었다.


"시즈코 님, 사이조 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알겠어요. 직접 이쪽으로 안내해줘요"


"옛"


오랜만의 느긋한 시간을 만끽하고 있을 때, 소성(小姓)이 사이조의 귀환을 알려왔다.

사이조에게는 쿄 주변의 순찰이라고 칭하여 혼간지(本願寺) 세력의 동태를 살피게 했었다. 이번에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를 쓰지 않고 사이조를 보낸 것에는 노림수가 있었다.

시즈코의 심복(腹心)으로서 이름이 알려진 사이조가 드러내놓고 움직이는 것으로 혼간지에 대해 지켜보고 있다는 의사표시를 하기 위해서였다.

노부나가의 방침은 표면상 혼간지와의 교섭을 모색하고 있는 듯 행동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혼간지 측이 인내심이 바닥나서 오다의 세력으로 침공해 들어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세한 방침은 듣지 못했으나, 상황을 보고 판단해보니, 혼간지 본체보다도 모우리(毛利)와 혼간지를 잇는 세토(瀬戸) 내해(内海)의 보급선을 끊으려고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고 시즈코는 판단하고 있었다.

그것을 뒷받침하듯 히데요시(秀吉)가 츄고쿠(中国) 지방에 파견되고, 탄바(丹波)에는 미츠히데(光秀)를 보냈다. 육로(陸路)를 제압당하면 해로(海路)를 이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 돌아왔습니다"


"수고했어요. 다짜고짜 미안하지만, 보고를 부탁할 수 있겠어요?"


"별다른 일은 없습니다. 단적으로 말씀드리면, 혼간지는 거북이가 되어 있습니다"


"아직 움직이지 않나요"


혼간지는 교주(教主)인 켄뇨(顕如)가 태도를 보류하고 있었기에, 쿄뇨(教如)가 아무리 부채질을 해도 혼간지 전체로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여기까지 궁지에 몰렸음에도 여전히 켄뇨가 지침(指針)을 내보이지 않는 이유가 분명하지 않았으나, 그가 심복으로서 믿고 있던 시모츠마 라이렌(下間頼廉)이 소식이 끊긴 이후로 확연히 말수가 줄어들었다는 소문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모우리는, 하시바(羽柴) 님과 아라키(荒木) 님이 코우즈키 성(上月城)의 아마고(尼子) 님을 원호하러 갔지만, 상황은 썩 좋지 않습니다"


츄고쿠 지방에서는, 모우리 테루모토(毛利輝元)가 대군을 이끌고 코우즈키 성을 포위하고 있어, 성주인 아마고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은 노부나가가 히데요시와 아라키 연합군을 파견한 모양새다.

현재 상황에서는 소규모 충돌이 때때로 발생하는 정도로, 양군이 서로 견제하고 있어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다.

현지의 정보가 적고 정확성이 낮기는 하나, 미키 성(三木城)의 벳쇼 나가하루(別所長治)가 적 쪽으로 붙을 가능성이 있기에 대담한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주상께는 모우리 공격의 선봉을 맡겠다고 했는데, 성에 틀어박혀 있다는 것은 배신일까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벳쇼의 부인(奥方)의 친정인 탄바 국의 하타노(波多野)도 호응할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하시바 님이라도 협공을 당하면 당해낼 수 없겠지요"


"그렇게 되면 코우즈키 성을 버리고 아마고와 함께 미키 성을 공격할 수밖에 없나요. 모우리 공격의 교두보를 잃는 것은 뼈아프지만, 등 뒤를 찔리는 상황은——"


말하던 도중에 시즈코가 부자연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사이조가 입가에 손가락을 세워들어 타인의 접근을 알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시즈코 님. 사나다 님께서 주상으로부터 서신을 맡아오셨습니다. 어찌할까요?"


"알겠어요. 보고도 있을테니, 이쪽으로 안내해 주세요"


"옛"


시즈코가 대답을 하자 소성이 발길을 돌렸다. 소성의 발소리가 멀어져가는 것을 들으며, 시즈코는 어느 틈에 멈춰 있던 호흡을 재개했다.


"방심하지 못하는 건 피곤하네요"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시즈코 님께서는 오다 가문에 있어서도 급소가 되셨습니다. 하물며 이곳은 오와리와는 달리 충분한 경호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심려를 끼쳐드리게 됩니다만, 당분간 신변에 유의해 주십시오"


"알고 있어요. 경호하는 모두에 비하면 내 마음 고생 같은 건 대수로운 건 아니지만…… 오와리로 돌아가고 싶네요"


자신도 모르게 시즈코의 입에서 불평이 흘러나왔을 때, 다시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소성에게 안내된 마사유키가 도착하여 실내로 들어와 인사를 대략 마친 후 마사유키가 말을 꺼냈다.


"호리(堀) 님으로부터 하시바 님의 상황을 들었습니다만, 아무래도 곤란에 처해 계신 모양입니다. 아라키 님도 마찬가지로, 등 뒤를 신경쓰느라 모우리를 제대로 공격하고 있지 못하다고 합니다"


마사유키의 보고에 의해 사이조의 보고가 뒷받침되자 거의 틀림없는 상황이라고 시즈코는 판단했다.

예전에 타케다 신겐(武田信玄)이 서상작전(西上作戦)을 개시했을 때 이래로 최대의 위기였다.

한 수만 잘못 두어도 상황이 걷잡을 수 없게 악화되어, 최악의 경우 오다 가문은 쿄에서 쫓겨나게 된다.

히데요시가 소심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뭐라 해도 상대는 사이고쿠(西国)의 영웅, 모우리 테루모토이다.

모우리 테루모토라고 하면, 예전에 120만 석(石)을 자랑한 아마고의 영토를 야금야금 빼앗아 북(北) 큐슈(九州) 일대를 지배하는 오오토모 소우린(大友宗麟)과 싸움을 벌여 모조리 모우리 가문의 승리로 이끈 존재다.


"이번엔 어쩔 방법도 없겠네요. 이 상황에서 오와리로 돌아가는 건 괴롭지만, 우리들이 여기 있어봐야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까요"


포기에 가까운 시즈코의 말에 아무도 반론할 수 없었다.




마사유키와의 회담 후, 시즈코는 예정대로 시로쿠와 우츠와와 합류하여, 좀 더 있다 가라고 붙잡는 사키히사를 떨쳐내고 오와리로 돌아왔다.

귀로 도중에 아즈치(安土)에 들려 노부나가에게 상황을 보고했으나, 그는 사이고쿠의 상황은 신경쓰지 않고 시즈코에게 오와리로 돌아가도록 했다.

약간 수상한 분위기를 느끼면서도 오아리로 돌아와서 긴 여행의 피로가 풀렸을 무렵, 뒤로 미루어 두었던 코타로의 촬영을 둘러싸고 한 차례 소란이 일어났다.

일의 발단은, 계란지에 인화된 흑백사진을 본 미츠오(みつお)의 한 마디였다.


"헤에, 계란지에 인화하면 처음부터 컬러 사진이 퇴색된 것 같은 세피아 색이 되는군요. 컬러 사진은 바랄 수 없어도, 이만큼 선명하게 찍힌다면 제 가족사진도 찍어주실 수 있으실까요?"


미츠오의 가족이라고 하면, 시마즈(島津) 가문에서 시집온 츠루히메(鶴姫)와 그 시녀인 시바(柴), 츠루히메가 낳은 여아이자 만 3세가 지난 아오이(葵)를 의미한다.

본래 현대인인 미츠오에게 사진에 대한 기피감 같은 게 있을 리 없었고, 그의 소지품인 원래 컬러였던 사진(이쪽은 경년(経年)에 의해 퇴색됨)을 본 츠루히메도 마찬가지였다.

시즈코는 촬영 의뢰를 한 이후, 얼마나 아오이가 사랑스러운지를 끊임없이 반복해서 설명하는 미츠오의 말을 흘려들으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오이라는 이름은 말이죠, 제 부인이 오와리에만 피는 꽃, 해바라기(向日葵)에서 따서 항상 햇님을 보고 피는 해바라기(葵)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붙인 것입니다. 정말로 귀여워서 말이죠, 저희들의 태양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저번에도 '아빠(ととさま), 일하러 가지 말아요'라고 했단 말입니다! 몇 번이나 사육장에서 돌아가려고 생각했는지……"


여전히 기세를 올리며 이야기를 계속하는 미츠오의 말을 끊으며 시즈코는 판단을 내렸다.


"그러네요. 일본 최초를 외국인인 코타로가 차지하면 그에 대한 비난(風当たり)이 강해질지도 모르니, 우선 미츠오 씨 댁을 찍어볼까요. 이어서 코타로도 촬영하면 최초의 인물 촬영의 피사체로서 역사에 이름이 남을테니——"


시즈코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부드럽게 뻗어온 가냘픈 손(繊手)이 시즈코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거 참, 시즈코는 일본 최초가 될 기회에 나를 부르지 않다니, 꽤나 박정해졌구나"


명백히 꾸민 느낌의 슬픈 듯한 말투로 이야기하는 귀인(貴人)의 목소리에 시즈코는 돌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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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가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