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 미녀 고생담

戦国小町苦労談


작가: 夾竹桃


어느 날, 한 명의 소녀가 전국시대로 타임슬립했다.

그야말로 신의 변덕, 악마의 심심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뜬금없이.


소녀는 세계를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디에나 있는 극히 보통의, 그리고 평범하고 수수한 소녀였다.

그런 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다.


전국 시대를 살아남는다 - 그것 뿐이다.





번역: 가리아



텐쇼(天正) 2년 토우고쿠(東国) 정벌(征伐)


133 1575년 11월 중순



토우고쿠(東国) 정벌의 전후처리가 일단락된 11월 중순, 시즈코는 군을 이끌고 쿄(京)를 향하고 있었다.

노부나가로부터 칩거를 명받은 상황이었으나, 예외적으로 외출이 인정되는 예사(芸事) 보호의 일환으로서 호우류우지(法隆寺)로 가기 위해서다.

직접 야마토(大和, 현재의 나라(奈良))로 가지 않고 쿄를 경유하는 것은, 호우류우지가 자랑하는 금당벽화(金堂壁画)를 열람하기 위해 사방으로 손을 써 준 의부(義父)인 고노에 사키히사(近衛前久)에게 감사를 겸하여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금당벽화란 호우류지의 금당(金堂, 본존(本尊)을 안치하는 건물) 내부를 둘로 구분하는 내진(内陣, 부처님을 모시는(祀る) 장소), 외진(外陣, 참배하는 공간)에 배치된 흙벽의 벽면에 그려진 불교 회화(絵画)이다. 역사적인 자료가 존재하지 않기에 작자 미상(作者不詳)으로, 7세기 말 무렵에 그려졌다고 한다. (※역주: 예전에 한국에서는 호류사(호우류우지) 금당벽화를 그린 것이 고구려 승려 담징이라고 배웠는데, 인터넷을 좀 검색해보니 담징설은 어떤 뚜렷한 문헌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고 일본에서 구전되는 내용을 바탕으로 했다고 하며, 연대적 정합성 등의 문제로 현재는 한국 사학계에서도 별로 지지받는 설은 아니라고 합니다. 자세하게 아시는 분은 댓글 부탁드립니다)

역사적 사실에서는 제 2차 세계대전 후의 1949년에 원인 모를 화재(不審火)로 외진이 소실되어버려, 수복을 위해 떼어내었던 내진 소벽(小壁)의 벽화 20면만이 화를 면하고 현존하고 있다.

그러한 경위를 알고 있는 시즈코는, 조금이라도 보존 상태가 좋을 때 사진으로 찍어 자료를 남기려고 생각했다. 간신히 실용 시험에 다다른 사진이 제 구실을 할 지 가늠하는 시금석이 되는 사업이기도 했다.

시즈코가 태어난 시대에는 이미 영구히 잃어버린 존재를, 모사(模写)가 아닌 사진으로서 후세게 전할 기회를 얻은 거에 시즈코는 토우고쿠 정벌보다도 고양되어 있었다.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 예술품을 볼 수 있다니! 이거야말로 예사 보호의 혜택(役得)이지!"


처음에는(端緒) 조정으로부터의 의뢰를 받아 노부나가로부터 명령받은 예사 보호 임무였으나, 지금에는 명실공히 시즈코의 인생사업이 되어 있었다.

설령 노부나가가 임무를 그만두라고 명했다 하더라도 완고하게 달라붙을 생각조차 있었다. 현대에 있었을 때의 시즈코는 소위 말하는 역녀(歴女), 유구한 역사를 되돌아보며 당시의 풍물을 꿈꾸는 소녀였다.

현대라면 국보급에 해당하는 물건들을 직접 보거나 만질 수 있는 특권을 누구에게 양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평소에는 자기 주장이 약한 시즈코가, 예사 보호나 도검 수집에 관해서는 귀기(鬼気)어린 집착을 보이는 것이 알려지자, 그 열심인 모습에는 노부나가도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자 다들, 이 원정의 결과에 따라 카메라의 가치가 결정되는 거에요. 기합을 넣고 가죠!"


시즈코는 대열의 중간 쯤에서 주위를 둘러보며, 아마도 쿄라고 생각되는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호령했다. 평소와 달리 고양되어 있는 시즈코의 모습에 주위는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엄숙(粛粛)하게 나아갔다.


"나는 시즈코가 의욕을 보이는 구석을 모르겠어"


"나는 조금 알 것 같군. 시즈코 님이 신경쓰시는(肝煎り) '카메라'를 선보이는 것이지. 오랜 수련의 성과를 보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겠지?"


"나는 그것 뿐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말야. 누가 인정하지 않더라도 '카메라'의 가치는 이미 시즛치와 주상(上様)께서 인정하고 있으니 흔들릴 리가 없어. 뭐, 그렇게 말해도 절간의 낙서를 보려는 것만으로 야마토 같은 변두리까지 가는 건 별나다고(酔狂) 생각하지만 말야"


나가요시(長可)의 중얼거림을 들은 사이조(才蔵)의 말을 케이지(慶次)가 이어서 총평을 내렸다. 당사자인 시즈코는 콧노래라도 부를 듯 기분이 매우 좋은 상태로, 그들의 속삭임 같은 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번에 야마토로 가는 대열은 평소와 다르게 대규모였다.

나가요시, 사이조, 케이지 등 세 명은 당연하다고 치고, 시즈코 군 내에서도 정예가 선발되어 5천 명이나 종군하고 있다. 그들이 지키는 것은 주군인 시즈코는 물론, 이번의 주체(目玉)인 사진기사 및 촬영기자재 일식(一式).

도중에 쿄를 경유하기 때문에, 의부인 사키히사와 대면시키기 위해 시로쿠(四六)에 우츠와(器), 교육 담당자가 된 모리 요시나리(森可成)도 동행하고 있다.

거기에 새롭게 들인 고용인(家人)으로서 코타로(虎太郎), 야이치(弥一), 루리(瑠璃), 모미지(紅葉) 등 유태인 네 명도 사키히사에게 소개할 생각이었다.

그들은 각자 한 가지 뛰어난 재주의 소유주들로, 사키히사와 인연을 맺어두어 결코 손해될 일은 없다.

게다가 이런 기회라도 없으면 그들은 일에 몰두하여 제대로 휴식을 취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시즈코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하여, 이렇게 소개(顔見せ)라는 명목으로 유람(物見遊山)에 데려왔다. 물리적으로 일할 방법이 없는 환경에 두면 그들도 기분전환이 될 거라는 속셈이다.

참고로 시즈코 자신이 워커홀릭에 빠져 있어 관계자들을 안달복달하게 만든다는 것에는 자각이 없었다.


(주상께서 주인장(朱印状)을 발부해 주신 덕분일까, 가는 길이 쾌적하네)


시즈코의 야마토 행에 대해 사전에 경로상의 영주(国人)들에게 대해 노부나가로부터 주인장이 도착했다.

당연히 시즈코 자신도 흑인장(黒印状)을 내어 편의를 보아 달라고 의뢰했으나, 노부나가로부터의 주인장에는 그 이상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즉, '시즈코의 야마토 행에 대해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하고, 만에 하나 발칙한 짓을 하는 놈(不埒もの)이 나온다면 무력으로 진압하겠다'라는 노부나가로부터의 협박에 가까운 명령이었다.

주인장을 본 영주들은 안색이 변하여 영토 내의 순로(順路)를 확인하러 가서 길이나 다리 등이 상했을 경우 서둘러 공사(普請)를 하고, 부근의 산들에 대해서도 산적 토벌을 하여 도적(野盗)을 일소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앞서의 토우고쿠 정벌에서는 일패도지(一敗塗地)했다고는 하나, 거의 피해를 입지 않고 타케다(武田)-호죠(北条) 연합군을 산산히 흩어버렸다는 무용담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시즈코의 노여움을 사는 것만도 무서운 판에, 게다가 노부나가로부터도 신신당부를 받은 모양새가 되자, 조금의 불찰(粗相)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영주들이 직접 관문(関所)까지 마중나가는 영지까지 있었다.


게다가 시즈코 군에 대한 소문도, 그들이 느끼는 공포를 부채질하는 데 한몫하고 있었다.

이야기에 따르면, 시즈코 군을 구성하는 인간들의 출신은 천차만별로, 순수(生粋)한 무인(武人) 뿐만이 아니라, 먹고 살 길이 없는 백성들이나 기술자(職人)들의 아들들이나, 낭인(浪人)은 고사하고 도적(野盗) 출신의 불량배(ならず者) 출신들까지 있다고 한다.

통상적으로는 깡패 집단(愚連隊)이 되는 게 고작인 오합지졸을, 시즈코를 정점으로 하는 강철같은 결속을 자랑하는 조직으로 만들어냈다.

남 험담하기좋아하는 자들은 그들을 가리켜 시즈코를 숭배하는 광신자(狂信者)라고 할 정도로 시즈코에게 심취해 있어, 내부에서 시즈코 군을 무너뜨리려고 시도한 자들은 거꾸로 수하를 빼앗기고 후회했다.

그러한 경위로, 시즈코 군의 내부 사정(内情)은 외부에 거의 전해지지 않아, 정치적 책략(調略)에 실패한 자들이 분풀이 삼아 유포시킨 악평들만이 과장되어 전해지고 있었다.

그러한 정보를 그대로 믿은 것은 아니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火のない所に煙は立たぬ)'라는 속담도 있어, 영주들은 그들 일행을 움직이는 천재지변으로 간주하고, 만난(万難)을 물리치고 통과시키는 것에 진력하게 되었다.


"이번의 순로에는 들어 있지 않지만, 일정에 여유가 생기면 카스가타이샤(春日大社)에도 들리고 싶네…… 보물창고(宝庫)에 '그것'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시즈코가 말하는 '그것'이란, 1939년(쇼와(昭和) 14년)에 보물창고 천정 뒤에서 발견된 헤이안(平安) 시대에서 카마쿠라(鎌倉)에 걸친 명도(名刀) 12자루를 가리킨다.

언제쯤 감춰졌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적어도 제 2차 세계대전 종결 전에 발견되었기에 전후에 GHQ가 실시한 칼사냥(刀狩り)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설은 부정할 수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정면에서 수색을 요청하면 먼저 발견되어 은닉될 가능성도 있었기에, 보물창고 열람의 허가만을 얻을 수 있게 손을 썼다.

애초에 들릴 예정은 없는데다 허가를 받지 못할 가능성도 있음에도, 시즈코는 일행에 궁전목수(宮大工, ※역주: 신사, 절, 궁전 등의 건축을 전문으로 하는 목수)를 시작으로 건물을 해체하여 재구축할 수 있는 기술자들을 동행시키고 있었다.


(아마도 현 시점에서도 감춰져 있을거라 생각하지만, 확증은 없으니까……)


역사적 사실에서는 칼날에 녹이 슨 상태로 발견되었으나, 현 시점이라면 좀 더 보존상태가 좋은 상태로 발견할 수 있다. 아직 보지 못한 국보급으로 간주되는 명도를 꿈꾸면서 시즈코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시즈코 일행은 대인원이었기에 쿄로 이어지는 경로로 육로를 택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호상수운(湖上水運)이 정비되어 있다고 해도, 소형에서 중형 선박이 주류였기에 대규모 인원 수송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키히사에 대한 선물(土産) 등은 일행에 앞서 비와 호(琵琶湖) 경유로 쿄로 보내고, 시즈코 일행은 아즈치(安土)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다.

노부나가가 있는 곳(御座所)이기도 한 아즈치에서는, 어떠한 신분의 인물이라도 하룻밤 묵는 것이 의무화되어 있다.

시즈코는 노부나가를 배알하고 인사를 했다.

그 밖에도 온 길의 상황 등을 이야기하고 자리에서 물러나온 후, 타카토라(高虎)에게 근황을 묻고자 사람을 보내 부르려 했으나, 아즈치 성의 공사가 가경(佳境)에 달해 있어 시간이 맞지 않았다.

대신 총 책임자(総奉行)인 니와(丹羽)가 와서 상황을 설명하게 되었다.

듣자하니 연초에는 천수(天守)까지 완성될 것으로 예상되어, 그걸 기다려서 노부나가가 이주할 것이 예정되어 있었으며, 그렇게 되면 노부나가가 일본에서 최초로 고층 건물에서 생활한 인물이 된다.

아즈치 성 축성에 관계된 관계자들이 정신없이 바쁜 가운데 시즈코가 있으면 상대하지 않을 수도 없어 그들의 방해를 하게 된다. 최소한의 인사만을 마친 시즈코는, 이튿날 아즈치를 출발하여 곧장 쿄로 향했다.

역시 아즈치-쿄 사이의 도로는 잘 정비되어 있어, 시즈코 일행은 곧 쿄에 들어섰다.


"잘 왔네. 오랜 여행의 피로도 있을테니 잠시 쉬는 게 어떻겠나?"


시즈코는 쿄에 들어서자 쿄 저택으로 들어가 즉시 사키히사에게 사전 연락(先触れ)을 보냈다.

그리고 돌아온 것이 사키히사의 말이었으며, 때를 보아 사키히사 쪽에서 마중을 보내겠다고 했다.

시즈코는 사키히사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여장을 풀고 목욕을 하며 몸단장을 했다.

마치 시즈코의 준비가 끝나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타이밍에 사키히사가 보낸 사람이 찾아와 시즈코를 대동하고 고노에 가문의 저택으로 향했다.

사키히사의 별실로 안내된 시즈코를, 웬일로 의관(衣冠, 궁중 등의 근무복) 차람의 사키히사가 직접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쿄에 들어서기 전부터 도착한다는 연락은 보냈는데, 어쩌면 궁중(内裏)에서 서둘러 돌아와 준 것일지도 모른다.

사키히사와 유자(猶子)를 맺기 전부터 그다지 귀족다운 모습을 보지 못한 시즈코는, 그의 모습을 보고 새삼스레 섭정(摂政)이라는, 궁중의 정점에 군림하는 존재라고 자각했다.

사키히사는 표정(相好)을 풀고 호의적으로 시즈코를 대했으나, 고노에 가문의 고용인들이 떠올리는 표정은 딱딱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키히사는 시즈코의 사람됨을 잘 알고(知悉) 있지만, 그들은 그렇지 못하다.

많은 공가(公家)들이 곤궁한 가운데, 고노에 가문의 재정은 융성(隆隆)하고 있었다.

원래부터 오섭가(五摂家) 필두인 고노에 가문의 재산(身代)은 그리 쉽게 바닥나는 것은 아니었으나, 시즈코를 유자로 맞이한 이후 극적으로 불어났다.

오와리(尾張)에서 발신되는 다양한 문물을 쿄로 전하는 유행의 전도자(担い手)로서, 시즈코의 지도를 받아 장원(荘園) 운영 개혁을 추진한 결과, 예전에 '망월가(望月の歌)'를 지은 후지와라(藤原) 경(卿) 만큼은 아니라 해도 명실공히 공가의 정점으로 솟아올랐다.

오늘의 빈객(賓客)은 그것들의 원동력이 된 인물이며, 만에 하나라도 노여움을 산다면 자신 한 명 파멸하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거라는 절박한 마음이 고용인들을 위축시키고 있었다.


"자, 오랜만에 만나는데 이렇게 딱딱해서는 마음도 편치 않겠지. 별채에 한 자리 준비시켰으니, 그쪽에서 이야기(土産話)라도 들려주지 않겠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시즈코가 응답하자 사키히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선도하는 형태로 별채로 자리를 옮겼다.

사키히사가 자랑하는 별채에는 김을 피워올리는 전차(煎茶)와 가벼운 식사(軽食)가 두 상 준비되어, 의부와 수양딸이 마주하는 형태로 자리에 앉았다.


(과연 쿄네. 식사 하나만 봐도 오와리나 미노(美濃)…… 아니, 무가(武家) 양식(様式)과는 다르네)


가벼운 식사라고는 해도, 요리의 모양새(盛り付け)나 곁들임(あしらい)까지 배려하여, 쟁반(膳)이나 그릇, 소품(小物)에 이르기까지 사치를 부린 실로 우아한 카이세키(懐石)가 되었다.

그에 반해 오와리나 미노에서는, 좋게 말하면 실리주의이며 허식을 배제하고 요리의 맛과 양으로 승부한다는 호담함이 있었다.

어느 쪽이 뛰어나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도 문화의 차이라고 받아들였다.


"이번의 야마토 행은 예사(芸事) 보호를 하는 데 있어 시금석이 될 거라는 소문을 들었다만?"


"꽤나 귀가 밝으시군요. 그렇습니다. 전부터 계속 연구를 거듭해온 '카메라'가 드디어 모양새가 갖춰졌습니다"


"호오! 그것은 순식간에 세계를 비춰낸다는 소문의 그것인가?"


"정말 귀가 밝으시군요. 이번의 야마토 행에서 실용이 가능한 지 평가하여, 그 결과에 따라 쿄에서도 퍼뜨리려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렇게 되면 저번 전쟁에서 많은 문물들이 유실된 것이 안타깝군"


저번 전쟁이란 오우닌의 난(応仁の乱)을 가리키며, 나라 시대에서 헤이안(平安)에 걸쳐 영요영화(栄耀栄華)의 극에 달했던 조정문화(朝廷文化)는 잿더미가 되었다.

무려 11년에 걸쳐 계속된 전란으로 쿄는 황폐화되고, 쿄의 시가지의 경우 북부 일대가 불타버렸다.

치안의 악화로 강도(夜盗)가 횡행하고, 그 밖에도 종종 싸움에 휘말려 역사적 가치가 높은 기록(書物)이나 금품, 예술품 등이 모두 유실되어 버렸다.

현재는 노부나가의 비호 아래 치안도 회복하여 일본 유수의 도시로서 부흥되었다.

쿄에 평온이 돌아오자, 천황(帝)을 중심으로 한 조정 문화와, 대중을 중심으로 한 서민 문화가 상호간에 영향을 주며 독특한 문화를 형성해가고 있었다.


"이미 잃어버린 것은 어쩔 도리가 없지만, '카메라'가 있으면 사물의 모습을 오랫동안 보존해 둘 수 있는 것이겠지?"


"예사 보호의 역할을 맡은 이래, 쿄에서도 잃어버렸다고 생각되고 있던 자료들을 발견한 적도 있습니다. '카메라'가 자료를 복사하는 시간을 대폭 줄여주게 됩니다. 예사 보호에도 탄력이 붙겠지요"


"그건 아주 좋군. 언젠가 '카메라'인가 하는 것을 보고 싶네"


시즈코의 예사 보호가 유명해짐에 따라, 일본 전국으로 흩어졌던 문예품(文芸品)이나 자료들이 속속 모여들게 되었다.

군서류종(群書類従)에 가까운 자료를 편찬하는 가운데, 도난 피해를 당했다고 알려졌던 고서가 발견되거나, 전란을 피해기 위해 반출되었던 자료가 돌아오기도 했다.

이러한 고서나 자료 등은 다시 분실되지 않도록 시즈코의 손에 의해 복제가 만들어져 고노에 파벌의 공가들에게도 일부가 맡겨져서 조정 문화의 보관을 담당하고 있었다.

역사나 격식을 중시하는 공가들 중에서, 귀중한 자료를 보관하고 있는 고노에 파벌의 공가들에게는 다들 한 수 물리게 되어, 어느새 일대 파벌을 형성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나쁘게 말할 생각은 없지만, 대체로 무가 사람은 예사를 가벼이 여기는 경향이 있지. 개중에는 이해를 하는 분도 계시지만, 대부분은 돈이 되는지 아닌지로 평가를 나누네. 물론, 금전적 가치도 중요한 지표라고는 생각하지만, 수필(随筆) 등도 후게에 남겨야 할 아름다움이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하는군"


"그것만큼은 개인의 성향이니 어려운 면도 있겠지요. 무가 분들은 치열하게 사는 분들도 많아, 비교적 몸 가까이에 있을 터인 도검 수집 등도 이해하지 못하시는 분도 종종……"


"다양한 가치관의 공존이란 그리도 어렵지. 하다못해 좀 떨어져서 공존(棲み分け)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힘을 쏟아야 하네"


"미력하지만 돕겠습니다"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 시즈코는 고노에 저택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전말 밤에는 사키히사가 자신의 파벌의 공가들을 초대하여 연회를 열었기에 성대한 회식이 되었다.

시즈코가 가져온 진기한 식재료나 시즈코가 데려온 요리사들이 만든 요리들이 나와서 사키히사도 면목약여(面目躍如)했다고 할 수 있으리라.

사키히사가 자기 파벌의 공가들을 연이어 소개했으나, 시즈코의 머리에는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들어오지 않았다.

일단 낯만 익혀두면 된다고 결론짓고 생긋 웃으며 대응했으나 내심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아침 안개가 낀 가운데 시즈코 일행은 고노에 저택을 나섰다. 시로쿠와 우츠와, 교육 담당인 모리 요시나리는 고노에 가문에 남아서 야마토로부터 돌아올 시즈코 일행을 기다리게 된다.

여기서 시로쿠아ㅗ 우츠와는, 공가의 자녀로서 최저한 익혀야 할 것들을 배우게 된다.

그들의 교육에 대해서는 사키히사가 맡아준 것도 있고, 요시나라도 동행하고 있기에 나쁘게는 하지 않을거라고 판단했다.

이리하여 곧장 호우류우지로 향한 시즈코 일행은, 사전에 호우류우지와 교섭 역할을 맡고 있던 아시미츠(足満)와 합류하여 호우류우지 주변에 진을 쳤다.

예전에 노부나가가 토우다이지(東大寺)에서 그러했듯, 시즈코도 부근의 치안을 안정시키도록 병사들에게 명하고 호우류우지 측에 도착했음을 전했다.

사전에 교섭이 끝나 있던 것도 있어, 경내(境内)로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이 제한된 것 외에는 별다른 주문도 없었다.

시즈코로서도 무장한 병사들을 잔뜩 데리고 다닐 생각은 없어, 최저한의 인원만을 수행시키는 것을 수락했다.


호우류우지는 7세기 무렵에 창건된 쇼토쿠(聖徳) 태자(太子)와 인연이 있는 사원이다.

시즈코가 목표로 한 금당이 존재하는 서원가람(西院伽藍)은, 현대에서 세계 최고(最古)의 목조 건축물들로 불리고 있다.

사진 촬영이 순조롭게 끝나면, 이어서 몽전(夢殿)을 중심으로 한 동원가람(東院伽藍)의 조사도 신청해 두었다.

호우류우지 측으로서는 무법자의 인상이 강한 무가의 개입을 극력 배제하고 싶지만, 노부나가의 심복(懐刀)이자 조정으로부터 예사 보호가 맡겨진 인물이기에 함부로 대할 수도 없어, 절충안으로서 승려들의 수행을 방해하지 않는 시간에 한해 수락했다.

쌍방이 각자의 조건을 비벼댄 결과, 촬영에는 호우류우지 측 사람이 반드시 입회할 것, 촬영이 끝나는 즉시 신속하게 철수할 것, 촬영 기재나 현상기구 등은 고가인데다 위험한 약제도 존재하기에 결코 허가없이 손대지 말 것 등을 정했다.


이리하여 시즈코가 호우류우지 앞에 진을 친 지 며칠 후, 세계 최초가 되는 사진 촬영이 이카루가(斑鳩)에서 실행되게 되었다.

반입된 카메라는 2대. 필름 카메라에서 말하는 필름(ネガ)에 해당하는 유리 건판(乾板, 이후 건판이라 부름)은 수백 장이 준비되었고, 인화지에 해당하는 계란지(鶏卵紙)의 소재로서 고급 에치젠(越前) 화지(和紙)가 천 장 정도 반입되었다.

현상용의 기재는 대형의 것들도 많아, 문자 그대로 문외한인 호우류우지의 승려들은 미지의 도구를 다루는 기술자들을 멀리서 겁먹은 모습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우선 탑(塔, 오층탑(五重塔)을 가리킴)의 외관을 촬영합니다"


현대에서 주류가 된 소위 말하는 디지털 카메라는, 렌즈를 피사체로 향하고 버튼을 누른 순간 촬영이 완료되어 디지털 화상이 저장된다.

그에 반해 시즈코들의 건판 사진은 촬영 전후에 다양한 작업이 필요해진다.

우선 카메라를 삼각대로 고정시키고, 자바라(蛇腹)를 열어 렌즈를 부착하고, 빛을 차단하는 검은 천을 씌우고, 렌즈를 열어 초점경(ピントグラス)이라고 하는 젖빛 유리(曇りガラス)에 비춰진 상(像)을 돋보기로 확인하며 초점을 맞춘다.

다음으로 암막(暗幕)으로 덮인 즉석의 암실(暗室) 안에서 건판을 필름 홀더에 세팅하고, 셔터를 닫아 조리개를 조인다.

초점경을 닫고 필름 홀더를 세팅한 후, 필름 홀더에서 차광판(遮光板)을 뺀다.

그 상태에서 기계식 셔터를 한 번만 작동시켜, 규정한 시간동안 노광(露光)시키는 것으로 촬영이 완료된다.

그 후, 다시 차광판을 필름 홀더에 끼워넣고, 암실 안에서 건판을 꺼낸다는 일련의 작업을 사진 한 장마다 하게 된다.

이것도 감광 기재의 개량으로 노광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었던 편이며, 한 장의 사진을 찍는데 평균 5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습판(湿板) 시대의 수십분이 걸리는 촬영에 비교하면 현격한 진보를 거둔 것이다.


"촬영 완료입니다! 지금부터 현상합니다"


촬영을 마친 필름 홀더를 든 기술자가 암실로 가서 현상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이 필름에 기록된 상은 명암이 역전된 네거티브 이미지라고 불리는 상태가 되어 있어, 이것을 인화지라 불리는 감광재료를 칠한 종이에 전사하는 것을 현상이라 부른다.

이 현상의 메커니즘에 의해 한 장의 네거티브 이미지에서 복수의 사진을 얻을 수 있어, 똑같은 사진을 대량으로 만드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번에 시즈코들이 선택한 인화지는 계란지라 불리는 것을 사용한다. 계란지의 특징으로서는 싼 값으로 대량 생산에 적합하며, 콘트라스트가 강한 선명한 상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암실에서 침침한 조명 아래, 질산은(硝酸銀) 수용액(水溶液)에 담근 계란지를 건판과 접착하여, 암실에서 꺼내 노광시키는 것으로 건판의 화상을 인화지에 전사한다.

이 때, 필름을 통해 전사된 상은 명암 및 좌우가 반전된 상이 된다. 충분히 노광시킨 계란지를 건판에서 신중하게 떼어내, 흐르는 물로 씻으면 서서히 상이 떠오른다.

딱 좋게 선명한 상이 얻어진 시점에서 인화지를 정착액(定着液)에 담가, 그 이상 화학 반응이 진행되는 것을 멈춘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계속 반응이 진행되어, 최종적으로는 인화지 전면이 시커멓게 물들게 된다.

여기까지의 절차를 밞음으로서 간신히 흑백으로 인화된 사진 한 장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다.


원래는 연속으로 팍팍 촬영을 계속해야 하지만, 우선은 한 장 인화되는 것을 확인하지 않으면 진행할 수 없다. 다들 마른침을 삼키며 지켜보는 가운데, 기술자가 현상실에서 나왔다.


"시즈코 님, 성공입니다!! 이것을 확인해 주십시오!"


어린애처럼 눈을 반짝이며 기술자가 내민 한 장의 계란지. 거기에는 세피아 톤의 배경에 검개 떠오른 5층탑이 흘립(屹立)하고 있었다.




현대에서는 더 선명하게 컬러로 촬영된 화상을 몇 번이나 보았을 테지만, 이만큼 감동한 적은 없었으리라.

자료에 의지하여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시작하여 처음부터 만들어낸 사진이 이곳에 있다. 그 감동이란 도저히 말로 할 수 없었다.

시즈코는 자세히 뜯어보며 충분히 사진을 감상한 후, 가장 먼저 호우류우지의 승려들에게 사진을 돌렸다. 도저히 붓(絵筆)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섬세하고 선명한 화상이 그곳에 찍혀 있었다.

승려들은 사진과 실제로 존재하는 5층탑을 비교하면서 그 높은 재현성에 경탄했다. 같은 절차를 통해 3장의 사진이 현상되고 각각 돌려보았다.

평소에는 매사 동요하는 법 없이 표표(飄飄)한 태도를 관철하는 케이지조차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 모습이었고, 사진의 개발에 적지 않게 진력한 아시미츠도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한편, 예사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기에 대단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 나가요시, 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굉장하다고 감탄하는 사이조 등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좋은 완성도군요. 이거라면 주상께서 칭찬해 주시겠지요"


"옛! 이걸로 돈 먹는 벌레라고 비난받던 나날과도 이별입니다!"


길고 따분(地道)한 연구를 거듭한 결과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 모습을 본 기술자들 중 한 사람이 눈물을 흘렸다. 이걸로 사진에 대한 평가는 변한다, 기술자들은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자, 시간이 제한되어 있어요. 현상은 나중에 해도 좋으니, 찍을 수 있는 만큼 찍죠"


"옛!"


시즈코의 호령에 의해 기술자들이 다시 촬영에 착수했다.

하지만, 그들의 기합과는 달리 카메라는 완전하게 기능하지는 않았다. 가장 먼저 태엽식의 셔터가 작동하지 않게 되어, 모래시계를 한 손에 들고 셔터를 손으로 조작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 밖에도 촬영 작업에 익숙해지자 절차를 소홀히하게 되었는지 건판을 빛으로부터 보호하는 차광판을 끼우는 걸 잊거나, 운반 도중에 건판을 떨어뜨려 깨뜨려 버리는 등의 트러블이 속출했다.

현상 작업에서도, 약제가 고가이기에 연속 내용(耐用) 실험을 하지 않았던 영향이 여기에서 표면화된다. 정착액은 공기에 접촉하거나 처리할 때마다 그 품질이 열화된다.

한계까지 정착액을 사용한 적이 없었기에, 충분히 정착되지 않고 감광이 진행되어버려 시커먼 사진이 나오기도 했다.

현장 운용에서 많은 실패도 했으나, 그래도 금당의 벽면 전체에 더해, 5층탑의 입면도(立面図)에 상당하는 사진을 촬영할 수 있었고, 금강역사(金剛力士) 상(像)인 '아형(阿形)'과 '후형(吽形)'도 사진에 담을 수 있었다.


또, 휴가를 쓰게 할 목적으로 데려왔던 유대인 야이치였으나, 촬영된 사진을 보고 뭔가 머릿속에 스친 것이라도 있었는지 시즈코에게 촬영 허가를 요청했다.

기술자들의 관점과는 다른 시점에서 촬영된 사진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한 시즈코는 촬영 허가를 내주었고, 야이치는 코타로를 통역으로 삼아 기술자들에게 촬영할 포인트를 지시했다.


"다음 사진은 이 지점에서,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듯한 각도로 부탁합니다"


카메라의 시점을 얻기 위해 땅바닥에 쭈그려 앉은 야이치가 코타로를 돌아보며 기술자들에게 내용 전달을 부탁했다.

정면에서 찍은 영상을 찍고 싶어하는 기술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야이치는 투영도(投影図) 같은 입체감을 느끼게 하는 사진을 선호했다.

이리하여 호우류우지에서 촬영을 계속하길 열흘. 드디어 건판의 재고가 바닥났다.

쿄의 시즈코 저택에 얼마간 예비 건판이 남아 있지만, 필요한 양은 촬영할 수 있었다고 판단한 시즈코는 촬영의 종료를 선언했다.


"이것은……"


촬영 기채를 엄중하게 포장하는 작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시즈코는 촬영에 입회하지 않았던 호우류우지의 고승(高僧)들에게 몇 장의 사진을 기증했다.

처음 보는 사진의 선명함은 늙은 고승들의 마음에도 감동되는 것이 있었는지, 사진을 악귀(悪鬼)의 소행이라고 단정하지 않고 바르게 평가해준 것 같았다.


(사실은 사람도 찍고 싶었지만 말야……)


전국의 세상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는 사람의 형상을 한 것에는 혼이 깃든다고 믿어져 왔다.

역사적 사실에서도 사진의 여명기(黎明期)에는 사진에 인물을 찍으면 혼이 사진에 갇힌다고 생각되어 기피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역주: 비슷한 얘기로, 중학교 다닐 때, 사진으로 동물(애완동물)을 찍으면 혼이 빠져나간다고 정말로 믿고 있던 녀석을 실제로 보고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라고 생각하며 어이없었던 적이 있습니다)


(뭐, 급격한 변혁은 반발을 초래하니, 서서히 보급하면 되겠지. 맞다! 우리 집 동물들부터 시작하자!)


"주인님은 꽤나 기분이 좋으신 것 같군요"


코타로가 어이없는 듯 중얼거렸다.


"즐겁지요. 이렇게 새로운 것의 성과가 나왔을 때는 특히 더요. 뭐, 이번에는 잘 풀린 부류지만, 대부분 뭔가 문제가 따라오니까요"


"그런 것 치고는 실패에 대해 관대하시군요?"


"같은 실패를 몇 번이나 반복한다면 질책도 하거든요? 처음 도전한 결과로 실패한 거라면, 그 실패조차도 귀중한 경험이에요. 실패를 산처럼 쌓아올린 끝에 누구나 선망하는 성공이 있는 거라고 나는 믿고 있어요"


시즈코의 말을 듣고 코타로는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지당한 말씀(至言)이군요. 실패 없는 기술 따윈 위험해서 쓸 수 없지요. 실패를 탓하여 위축시키기보다, 실패에서 배워서 성공으로 이어지는 첫걸음으로 삼으면 되는 것이군요"


"그러네요. 과도하게 실패를 두려워해서 성공만을 추구하다보면 근시안적이 되어 막다른 길에 빠져들어요. 그러니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폭넓게 연구를 하는 거에요. 그렇게 하면 얼핏 실패로 보여도, 거기에서 새로운 싹이 트는 경우도 있어요. 가장 중요한 것은 연구자가, 눈앞의 헛됨(無駄)에 마음이 꺾이지 않는 환경을 만드는 거에요"


"하하하. 그래서 배포좋게 설비투자를 거듭하시는 겁니까"


"우수한 연구 성과는, 우수한 환경에서 태어나기 쉬워요. 뭐, 그 탓에 연구 비용은 천정을 모르고 늘어나는게 고민이에요. 지금은 내 이익도 점점 늘어나고 있으니(右肩上がり) 그래도 남지만요"


"꿈을 쫓으면서 현실도 확실히 보고 계신가는 건가요?"


"단기적인 성과로는 의미가 없으니까요. 백년, 이백년 앞을 내다보고 기초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밑바탕을 만들어둘 필요가 있는 거에요"


"과연. 현재 상황에 만족하지 않고 항상 한 발자국 앞을 목표로 하라는 거군요"


"연구에만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현재 상황에 만족하고 걷기를 멈추면, 그 때부터 천천히 썩어가기 시작하는 거에요"


시즈코의 말에 코타로는 느끼는 바가 있었다. 그렇게 정체되어 버린 조국을 버리고 신천지(新天地)를 찾았다. 자신은 재미있는 주인과 만날 수 있었다며 홀로 흐뭇한 미소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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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가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