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 미녀 고생담

戦国小町苦労談


작가: 夾竹桃


어느 날, 한 명의 소녀가 전국시대로 타임슬립했다.

그야말로 신의 변덕, 악마의 심심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뜬금없이.


소녀는 세계를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디에나 있는 극히 보통의, 그리고 평범하고 수수한 소녀였다.

그런 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다.


전국 시대를 살아남는다 - 그것 뿐이다.





번역: 가리아



텐쇼(天正) 원년(元年) 키나이(畿内)의 사회기반 정비


119 1574년 9월 상순



카가(加賀) 일향종(一向宗)에 대한 대책이 시동되어 전쟁의 기운이 짙어지고 있었으나, 정작 노부나가는 변함없이 내정(内政)에 주력하고 있었다.

물론, 전혀 무관심할 리는 없고, 눈에 띄지 않게 착착 포석(布石)을 두고 있었다.


때를 같이하여 시즈코는, 히데요시(秀吉) 영토인 나가하마(長浜) 방면의 개발을 일단락짓고, 예전부터 요청이 있었던 오오츠(大津) 방면의 개발에 착수하고 있었다.

여기서 시즈코가 착수한 것은 타나카미 산(田上山)의 개발.

광물 자원의 채굴과, 그에 따른 도로 정비가 주된 사업이었다. 타나카미 산은 시가 현(滋賀県)에서도 남서부에 위치하는 오오츠의 다시 남쪽에 위치하는 산들의 총칭이다.

이 산들은 화강암(花崗岩)이 주체라서, 거의 전역(全域)에 걸쳐 화강암 광물이 산출되었다.

대표적인 것으로서 건축 자재로 중요시되는 어영석(御影石)이나, 현대에서는 보석이나 파워 스톤(power stone) 등으로 불리는 수정(水晶)이나 황옥석(黄玉石, 토파즈(Topaz))을 얻을 수 있다.

현대에서는 장식품이나 보석으로 가치가 있는 수정이나 황옥석이지만, 당시에는 양쪽 다 철(鉄)보다 단단하기에 가공할 수 없어, 오랜 세월 동안 무가치한 존재로 방치되어 왔다.

비교적 크게 성장하기 쉬운 수정 등은, 시대에 따라 신체(ご神体)로 숭배된 적도 있지만, 작은 황옥석은 메이지(明治) 시대에 외국인 보석상이 그 가치를 찾아낼 때까지 길가의 돌멩이와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다.


무가치하다고 단정된 황옥석이지만, 시즈코가 볼 때는 보물의 산이었다. 수정은 철보다도 단단하고, 황옥석은 수정보다 더 단단하다.

충격에 대해 특이하게 깨지는 모습을 나타내는 '벽개성(劈開性)'을 가지기에 취급은 어렵지만, 단단하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었다.

입경(粒径)이 작은 것이라도 연마제(研磨剤)로 이용할 수 있기에, 시즈코는 현지 백성들을 고용하여 대대적으로 수집하게 하고 있었다.

특히 비가 온 다음날이 호기로, 그 날은 위험수당으로서 일당에 2할을 더 얹어주면서까지 동원했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사람을 모으는 이유는 황옥석의 비중(比重)에 있었다. 황옥석은 비중이 커서, 어지간한 비로는 쓸려가지 않는다. 비에 표토(表土)가 쓸려내려가서 비중이 큰 황옥석이 노출되는 것을 기대하고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표토가 쓸려내려간다는 것은, 지면이 진흙탕이 된다는 이야기다. 타나카미 산은 경사가 급한 사면(斜面)이 많아서, 발밑이 불안정한 상황에서는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위험이 따른다.

위험하고 지저분하고 힘든 일. 소위 말하는 3D 노동이기에, 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렇기에 위험수당을 얹어주어 대우를 후하게 하여 인원을 확보했다.


여담이지만 황옥석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굴절률이 높고 장시간 빛에 노출되어도 퇴색(退色)되지 않는 것을 'OH 타입', 그 이외의 것들을 'F 타입'이라고 부른다.

일본에서 산출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F 타입'이며, 대부분이 무색투명한 원석이다.

현대에서는 이것들에 가열이나 방사선(放射線)을 조사(照射)하여 인공적으로 착색한 것들이 유통되고 있는 경우도 많다.

무색투명한 토파즈와 수정을 육안만으로 구별하는 건 어렵지만, 특성을 알고 있으면 간단히 판별할 수 있다.

수정과 마찰시켜 수정에 상처가 나면 토파즈이고, 상처가 나지 않으면 수정이다.


광석의 채굴과 병행하여, 시즈코는 타나카미 산에서 횡행하고 있는 남벌(乱伐)을 금지했다. 노송나무 목재(檜材)의 일대 산지로서 이름을 떨치고 있던 타나카미 산은, 당시부터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남벌되었다.

역사적 사실에서는 남벌의 결과 민둥산이 되어, 유출된 표토가 하천으로 유입되어 홍수의 원인이 된 경위가 있다.

이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시즈코는 거의 쓰는 일이 없는 강권(強権)을 동원하여 일대의 재목(材木)을 윤번제(輪番制)로 공급하는 계획성 임업(林業)으로 변경했다.

이것은 실제로 이와미 은광(石見銀山) 등에서도 채용되었던 시스템으로, 은광 주변을 32개소로 구획 정리하여 순번에 따라 벌채를 한다는 것이다.

벌채를 한 구획은, 다음 벌채에 대비해 식림(植林)을 하여 장기적으로 목재를 계속 공급한다는 형태를 취한다.

이전에도 언급했으나, 오오츠 방면의 하천에 토사(土砂)가 유입되어 유량(流量)이 제한되어 버리면 비와 호(琵琶湖)가 범람하여, 오우미(近江) 일대가 물바다가 된다.

한 번 홍수가 발생하면 우물물 등이 오염되거나, 모기 등이 대량 발생하는 등의 재해가 줄지어 일어난다(負の連鎖). 위정자로서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오우미의 치수(治水)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광대한 범위에 피해가 발생하니까. 뭐, 하시바(羽柴) 님의 영역이라서 내가 너무 참견하는 것도 꺼려할테니, 슬쩍 정보를 흘리고 나머지는 맡기도록 하자. 그보다 사진의 개발을 진행해야 해!"


사진이라고 해도, 현대인이 떠올리는 듯한 롤 필름을 사용한 것은 아니다.

유리판에 유제(乳剤, 감광재료(感光材料)가 함유된 젤라틴)를 도포한 '유리 건판식(乾板式) 필름'을 이용하는 방식이다.

당연히 흑백사진이며, 컬러 사진 따윈 바랄 수도 없다.

은염사진(銀塩写真)의 감광 원리나 현상(現像)에 이르기까지의 이론 등에 대한 이해를 몽땅 건너뛰고 그런 물건이라며 억지로 연구개발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인지 실용화에 난항을 겪고 있다.

역사적 경위를 생각하면 동떨어진(隔絶) 기술 레벨이기에, 겨우 몇 년 만에 실용화시키려는 건 너무 뻔뻔한 이야기이다.


그렇게까지 하며 시즈코가 사진에 고집하는 이유는, 단지 '정보의 보존에 적합'하기 때문이었다. 사진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잘라내어 보존할 수 있다.

문화재의 보호자에 임명된 시즈코는, 당시의 다양한 문화를 가능한 한 후세에 전하자고 생각했다.

문자(文字)나 도식(図式)이라는 기호(記号)로 기록된 문서는 사본을 만들면 복제할 수 있지만, 회화(絵画)나 입체(立体), 건축(建築)이나 정원(庭園) 등은 남길 방법이 없다.

그러나, 사진이라면 현물 그 자체는 무리라도, 그 때 그 장소에 존재했던 일순간을 있는 그대로 보존할 수 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의 생활하는 모습 등의 형태가 없는 것들조차도 풍경(風景)으로서 잘라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사진의 원리는 철두철미(徹頭徹尾)하게 화학 반응 위에 성립되고 있다. 휴대가 가능하고 장기간의 보존에 견딜 수 있는 사진의 개발에는 아직 연구기간이 더 필요했다.


"불꽃(花火)은 뭐……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실력있는 기술자가 있어서 생각보다 연구가 진행되었지만 말야"


현대인에게 여름의 풍물시(風物詩)가 된 불꽃놀이였으나, 그 정체는 화약과 금속 분말을 이용한 염색반응(炎色反応)이 가져오는 찰나의 예술이다.

언제쯤 일본에 불꽃놀이가 정착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전국시대에는 전래되었을 거라는 기록을 볼 수 있다.

당시에 전래된 불꽃은 로켓(打ち上げ式) 불꽃이 아니라, 고정식의 통에서 색이 입혀진 불꽃이 튀어나가는 것이었다.

한편, 시즈코가 말하고 있는 불꽃이란 로켓 불꽃이다. 당초에는 총탄을 개발하면서 화약이나 탄두(弾頭)을 연구할 때, 탄두를 구리(銅)로 감싸는 방식을 제안했을 때의 여담이었다.

염색반응의 원리를 개진(開陳)하고, 실제로 가늘게 늘려뽑은 구리선을 로(炉)에 넣자 청록색의 불꽃이 튀는 것을 기술자들에게 보여주고, 이것을 이용한 불꽃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줘버렸다.

대부분의 기술자들은 감탄했을 뿐이었으나, 포탄 개발의 중심적인 기술자가 흥미를 보였다. 시즈코가 아니라, 아시미츠(足満) 주도로 진행되고 있던 대포의 개발에 응용할 수 있다며 연구를 신청했다.

당초에는 화약이 군수품이고 귀중한데다 취급이 어렵기에 시즈코는 난색을 표했다.

그러나, 그다지 화약을 많이 사용하지 않는 모기향 불꽃(線香花火, 역주: ※직역)의 존재를 떠올리고, 그것을 최초의 연구 과제로 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허가를 내렸다.

쇳가루(鉄粉)를 아교로 개어, 막대기에 화약과 함께 얇게 펴바르면 되는 모기향 불꽃이지만, 분말의 크기나 바르는 양 등 연구할 점은 많았다.


"설마, 로켓 불꽃에까지 다다를 줄이야……"


모기향 불꽃을 시작으로, 손으로 드는 불꽃(手持ち花火)을 개발하고, 다음으로 화약의 연소를 추력으로 하는 쥐불꽃(ネズミ花火)이 탄생했으며, 팽이불꽃(コマ花火) 등을 거쳐 이윽고 별(星)이라고 불리는 화약 덩어리를 쏘아올린다는, 대포로도 이어지는 원시적인 로켓 불꽃에까지 이르렀다.

그렇다고는 해도, 전국시대이니 채색광제(彩色光剤)로서 이용할 수 있는 것은 구리나 주석(錫), 납(鉛)에 인(燐) 등이라, 색채는 파란색 계열에 치중되게 된다.

그러나, 불이라고 하면 붉은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 불꽃은 획기적이었다.


"점점 사용하는 화약량이 늘었으니 폭발사고 같은 것도 있었지만, 드디어 밤하늘에 선을 그리는 데까지 왔네. 그러고보니 주상께서, 여름 축제에 폐하(帝)의 임석(臨席)을 청하신다고 했었는데…… 불꽃놀이를 보여주는 거겠지"


"시즈코 님"


천황(帝)을 들고나오는 이상 사소한 실패조차 용납되지 않는다. 꼼꼼하게 사전 준비를 하여 만에 하나라도 연소(延焼) 등이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하게 방화지대(火除地)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

이것저것 고민할 게 늘어나네 하고 시즈코는 진절머리를 내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때 방 밖에서 시즈코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시즈코 님, 카가 일향종의 건에 대해 보고드립니다. 거듭된 도발에 의해 긴장감이 높아져, 드디어 말단(末端)을 억제할 수 없게 된 듯 합니다"


"……수고했어요. 계속 감시를 부탁해요"


"옛"


목소리의 주인은 사나다(真田) 가문이 관리하는 간자였다. 간자답게 요점만을 간결하게 정리한 정기보고를 받고 시즈코가 치하하자, 목소리의 주인은 소리도 없이 떠나갔다.

카가 일향종에 대해서는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를 총대장으로 하는 군세가 에치고(越後)로 보내어지는 기술자들의 호위라 칭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그 도중에 이것저것 수를 내어서는 일향종에 대한 도발을 거듭하고 있었다.

물론, 일향종의 총본산인 혼간지(本願寺) 측도, 이 노골적인 도발이 의도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카가 일향종에 대해 도발에 응하는 것을 금하는 통보를 보냈다.

하지만, 혼간지의 대응을 비웃듯, 오다 군은 추가적은 도발을 거듭했다.

가는 곳마다 "혼간지는 자기들 목숨이 아까워 카가 일향종을 저버렸다"라는 식으로 떠들고, 침묵을 유지하는 카가 일향종을 "강한 자에게는 대들지 못하는 겁장이 무리"라고 선전(吹聴)했다.


오다 가문과 혼간지는 강화(和睦)를 맺었으나, 그건 가느다란 실로 연결된 일시적 평화에 불과하다. 개미 구멍 하나로도 쉽게 붕괴하여 다시 적대 관계로 돌아가는 아슬아슬한 것이었다.

그런 상대의 영토 내에서 사실과는 다른 악평을 퍼뜨리는 것은, 사람의 입을 통해서만 정보가 퍼지는 전국시대에서는 대단히 유효한 한 수가 되었다.

그게 어떤 집단이던, 무력으로 먹고사는 이상 얕보이고 침묵해서는 체면을 유지할 수 없다.

적지 않게 이름을 날려 자존심이 비대해졌을 때 이런 취급을 받으면, 말단이 폭주하는 것도 시간 문제였다.


"상대가 먼저 싸움을 걸었다는 사실만 있으면 그 뒤에는 어떻게든 명분이 서지. 만에 하나, 혼간지가 카가 일향종을 버리더라도 그 책임을 혼간지에게 묻는 것은 가능하니까"


노린 대로 카가 일향종이 오다 가문에게 덤벼들고 혼간지가 그에 동조하여 강화를 파기하면, 노부나가는 오히려 기뻐할 거라고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인내심 싸움(我慢比べ)도 슬슬 끝이려나)


시즈코는 휴 하고 한숨을 쉬었다. 이시야마(石山) 혼간지가 다시 전쟁을 시작한다. 결전의 때는 착착 다가오고 있었다.




혼간지에서는, 노부나가가 기후(岐阜)에 계속 머물고 있었기에 방심이 생겨나고 있었다.

휘하의 장병들은 카카 일향종에 대해 도발을 거듭하고 있지만, 노부나가 본인은 그 움직임을 짜증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사태의 추이를 살피고 있는(日和見) 수뇌진에서 시모츠마 라이렌(下間頼廉)만이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꾸준한(地道) 조사의 결과, 시즈코의 동향은 물론이고 노부나가의 행동 경향까지 분석하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경향에서 볼 때, 노부나가가 조용히 바라보고(静観) 있을 때는 대부분 자복(雌伏) 하면서 힘을 축적하는 경우가 많다.

이번의 강화에서 이어지는 일련의 평화도 다음 싸움을 위해 군비를 갖추고 있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추측할 수 있었다.

애초부터 혼간지 측도 숙적(宿敵) 노부나가 상대로 항구적인 평화가 성립할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 언젠가 자웅을 겨울 때가 올 것이라 이해하고, 다가올 싸움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휴전중에도 계속하여 군비를 증강하고 있는 노부나가에 비해, 혼간지 측은 '당분간은 싸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라고 판단하고 시간을 낭비해 버렸다.


(모두를 아몽(阿蒙, 진보가 없는 인물을 가리키는 말)이라 비웃을 수는 없다. 적지 않은 부(富)가 혼간지에도 유입되고 있으니, 당분간 싸움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노부나가는 적대세력이라고 해서 혼간지를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경제정책을 취하지는 않았다. 노부나가가 정한 상거래에 관한 규정을 지킨다면 그 문호는 만인에게 열려 있었다.

전쟁에도 물자의 대량 소비와 인구 조정이라는 측면이 있기에, 전쟁이 종결된 후에는 대부분 경제가 활발해진다.

소위 말하는 전쟁수요(戦争特需)로 활성화된 시장은, 유통 경로상에 위치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부를 가져다준다.

이 호경기는, 오다 포위망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부를 방출한 혼간지의 호주머니를 두둑하게 해주었다. 표면적인 이유로서 다음 싸움에 대비한 축재(蓄財)라고 칭하고 있지만, 조금이라도 현 상황을 유지하고 싶다고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라이렌이 위구하고 있듯이 휴전 기간이 길어지는 것은 위험했다.

지금은 '오와리 양식(尾張様式)'이라 불릴 정도가 된, 오와리에서밖에 생산되지 않는 물건들을 차례차례 퍼뜨리는 노부나가와, 유통의 부수입(余禄)을 받아먹고 있는 데 지나지 않는 혼간지는 문자 그대로 수익의 단위가 다르다.

게다가 노부나가는, 얻은 이익을 재투자하여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것으로 더욱 효율적으로 부를 창출하는 호순환(好循環)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되면, 시간이 지날수록 오다 가문과 혼간지의 차이는 벌어져 버린다.


(취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강화를 지금 당장 파기하고 오다 영토로 쳐들어가거나, 아니면…… 아니, 어느 쪽도 현실적이지 않다)


현 시점에서 강화를 파기하고 오다 가문을 공격할 수 있을 만한 대의명분이 없다. 혼간지 뿐이라면 신앙심을 부추겨서 사기를 유지할 수 있지만, 혼간지에 호응하는 각 세력은 그럴 수 없다.

만민(万民)에 대해 노부나가를 쳐부숴야 한다는 대의를 제시하지 못하면 동맹국도 병력을 내기 어렵다. 한편, 노부나가로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우위에 서기 때문에,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오다가 이렇게까지 반석(盤石)인 것은…… 역시 시즈코에 의한 바가 큰 것인가"


라이렌은, 시즈코야말로 오다 가문 융성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하고 집요하게 시즈코의 정보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정보를 모으면 모을 수록 시즈코의 노림수가 보이지 않게 되어갔다.

시즈코의 사업은 너무나 다방면에 걸쳐 있었다. 복잡하게 얽힌 다각경영(多角経営)이기에, 한두개의 사업을 없애봐야 아무 의미도 없다.

게다가 각각의 분야에서 시즈코가 일으킨 사업을 이어받을 인재들이 성장해버렸다. 오다 가문의 뼈대(屋台骨)를 기울게 하려면 오다 영토의 태반을 초토화시키는 수준의 전과가 필요하다.

라이렌은 신화에 나오는 '야마타노오로치(八岐大蛇)'를 상대로 하는 듯한 절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카가도 언제까지 버틸 것인가……"


집요하게 이어지는 카가 일향종에 대한 도발은 말단 승병(僧兵)들의 격발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혼간지로서도 한 번은 노부나가에게 항의를 했지만, "사람의 입에 자물쇠를 채울 수는 없는 법. 무력 행사를 하고 있다면 몰라도, 말단 병사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입을 다물게 하라는 건가?"라는 대답이 왔다.

노부나가는 암중에 "말단 병사들의 발언에까지 트집을 잡는다면 이쪽도 똑같은 대처를 요구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노부나가를 불적(仏敵)으로 간주하는 신자들은 많으며, 그들은 노부나가를 악귀나찰(悪鬼羅刹)처럼 욕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리하여 혼간지는 자승자박(自縄自縛)으로 움직일 수 없게 되어, 라이렌은 몹시 후회스러운(臍を噛む) 심적으로 신자들의 인내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노부나가를 시골(田舎)의 토호(土豪)라고 얕보아서는 안 된다. 놈은 자신의 체면에 구애받지 않는다. 이익이 있다고 판단되면, 숙적인 혼간지와도 강화를 맺어 보이는 도량이 있다)


그리고 라이렌의 사고는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이대로 손을 빨고 있다간 패배는 필연. 그러나, 오다 가문의 세력을 깎아내려고 해도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타격도 줄 수 없다.

숙고한 결과, 라이렌은 큰 도박에 나서기로 했다. 이 도박은 대단히 위험하여, 책략이 성공하지 못하면 자신의 파멸로도 이어진다. 그러나, 이미 자신의 몸을 아까워할 시기는 지났다.


"(……어쩔 수 없지) 누구 없느냐"


각오를 굳히자, 라이렌은 사람을 불러서 어떤 서신을 지정한 장소까지 전달하도록 명했다.




시간이 흘러 8월이 되었다. 천황이 임석하여 개최될 예정이었던 불꽃놀이 대회였으나, 예년에 없던 무더위(真夏日)가 이어졌기에 9월로 연기되게 되었다.

분지(盆地)인 쿄(京)는 심각한 더위에 시달려, 사람들은 시원함을 찾아 그늘로 도망쳤다. 기온도 그렇지만 습도도 높았기에 불쾌지수는 미친 듯이 올라갔다.


오섭가(五摂家)의 일익(一翼), 고노에 가문(近衛家)의 유자(猶子)인 시즈코도, 필요에 의해 교토에 저택이 주어졌다.

그렇다고는 해도 궁궐(御所)에 출사(出仕)할 필요가 없는 시즈코 저택은, 주인이 부재인 상태로 여름 사양으로 개수(模様替え)를 하고 있었다.

나무 문짝을 떼어내고, 바람이 잘 통하는 대오리문(簾戸)으로 교환하거나, 처마(軒)에 발(簾)을 매달아 햇빛을 막거나 하는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그밖에도 풍경(風鈴)을 매달거나, 등나무로 짠 깔개(敷物)인 '아지로(籐)'를 깔거나 하는 등 곳곳에 배려가 되어 있었다.


"올해 여름은 더워 죽겠군……"


문제가 있다고 하면, 본래의 주인이 아니라 피서 목적으로 사키히사(前久)가 뻔질나게 드나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고용인(家人)에게 준비시킨 차가운 차로 목을 축이면서 사키히사가 중얼거렸다. 시원함을 위해서라면 저택 내에 연못(池)이 있는 사키히사 저택에서도 충분하다.

일부러 멀리 나오면서까지 시즈코 저택에 드나드는 이유는, 쿄에서 유일하게 제빙기(製氷機)가 설치되어 있는 점이었다. 냉각재로서 질산암모늄(硝安)을 사용하기 때문에, 군수물자인 질산(硝酸)을 소비한다.

아무리 사키히사라도 제빙기만큼은 설치를 허락받지 못하여, 이렇게 시즈코 저택에 출근 도장을 찍고 있는 것이다.


뜨거워진 몸에 차가운 수분을 섭취하는 것은 좋지 않다. 급격하게 위장이 차가워지면 출혈하는 경우도 있다고 시즈코가 신신당부했었다.

그래도 끈적끈적한 더위에 지친 사키히사는 모르는 척 컵을 홀짝였다. 다른 사람의 눈이 있다면 사키히사도 자중했겠지만, 한식구만 있는 상황이라면 다소 긴장이 느슨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제빙기는 내구(耐用) 시험도 겸하고 있으니 상관없지만, 피서지 대용으로 삼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오와리에 도착한 보고를 받고, 시즈코는 뭐라 말할 수 없는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보고서에는 귀인(貴人)이자 시즈코의 아버지이기도 한 사키히사를 함부로 대할 수도 없어 고용인들이 고생하고 있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날씨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었기에, 한창 더운 시기가 지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렇고, 드디어 폭발했네, 카가 일향종"


"오래도록 이어진 더위도 맞물려 인내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겠지요"


시즈코는 사키히사의 보고서를 옆에 두고, 간자로부터 최신 상황을 듣고 있었다.

거듭된 도발에 참지 못한 카가 일향종의 일단(一団)이, 기술자들을 호위하는 오다 가문의 수하(手勢)들을 덮쳤다. 습격에 대비하고 있던 병사들은 이것을 무찌르는 것과 동시에, 일부는 일부러 놓아주었다.

도망친 일향종을 추격한 오다 군은, 그들이 도망친 절 '오야마고보(尾山御坊)'를 포위하고, 일향종의 습격으로 사망자가 나왔다고 떠들었다.

오야마고보는 말은 절이라고 해도 돌담(石垣)을 둘러친 성이나 다름없는 요새였다. 농성 태세를 보이는 일향종에게, 총대장인 시바타가 최후통접을 들이댔다.


"비열하게도 비무장의 기술자들을 습격하여 그 목숨을 빼앗았다고 하면 용서할 수 없다. 습격에 가담한 자들 및 이것을 지휘한 승려의 인도를 요구한다"


실제로는 기술자들에게 사상자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는 것이 난세(乱世)의 법칙.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습격하고 거기에 패주한 일향종에게는 어떠한 변명도 용납되지 않았다.

시바타를 필두로 하는 오다 군은, 카가 일향종의 거점이었던 토리고에 성(鳥越城)과 후토게 성(二曲城)도 포위하여 상호의 연계를 불가능하게 해버렸다.

날이 갈수록 두터워지는 포위와, 보급을 끊기고 정보조차 들어오지 않는 상황에서 공황에 빠졌는지, 오야마고보의 승병들은 신자들을 이끌고 치고 나왔다.

이걸 기다리고 있던 시바타가 박살을 내고, 거기에 선제공격을 받았다며 다른 거점에도 압력을 가했다.

자포자기(捨て鉢)한 일향종과, 면밀하게 준비를 갖추었던 시바타 군으로는 싸움조차 되질 않아, 치고 나온 일향종의 거의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다.


필연적으로 패배하게 될 개전에 당황한 이시야마 혼간지는 카가 일향종의 오야마고보 퇴거와 맞바꾸어 군을 물려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이것을 거절했다.

때를 같이하여 오다 군에게 호응하듯, 에치고의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이 카가를 향해 진군을 개시했다.

물론, 사전에 합의된 군사행동이지만, 노부나가는 대외적으로는 관계없음을 가장하여 국경에 병사를 파견하기까지 했다.

노부나가는 우에스기에 대해 아시미츠(足満)를 사자로 파견하여 그 진의를 묻도록 명했다. 그에 더해, 나가요시(長可)를 시바타가 있는 곳으로 보내어 상황을 확인하고 보고하는 역할을 맡겼다.


"카츠조(勝蔵) 군이 봤을 때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면 말리고 와라라는 이야기였던 모양인데…… 명백히 인선(人選) 미스네. 부족하다면서 독전(督戦)하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아요"


"독전은 커녕, 선두에 서서 공성에 참가할 가능성까지 있지"


술잔을 한 손에 들고 케이지(慶次)가 웃으며 대답했다. 나가요시의 코앞에 먹이를 매달아 놓고 참전하지 말고 보고하러 돌아오라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無理難題)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소규모 전투(小競り合い)라도 시작되면, 바디시(bardiche)를 한 손에 들고 뛰어드는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아케치(明智) 님이 움직이지 않았어요…… 그렇다는 건, 또 뒷말을 듣겠네요"


"국경의 견제가 임무이니 공성에 참가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만……"


"아니, 자기 영토인 에치젠을 방어할 뿐이라면 여유가 있어요. 추측이지만, 카가 일향종의 주의가 시바타 님을 향하고 있는 동안, 유격부대를 배후로 침투시켜서 때를 보아 급습하지 않을까요?"


"과연…… 힘들이지 않고 전과를 탈취하는 것입니까. 확실히 뒷말 한두마디 정도는 듣겠군요"


시즈코의 이야기를 듣고 사이조(才蔵)는 이해가 갔다. 미츠히데(光秀)의 임무는 카가 일향종의 에치젠 도망을 허용하지 않는 것. 그것만 견지한다면, 여세를 몰아 공격하더라도 문제는 없다.

그러나, 화살 앞에 서서 주의를 끌고 미끼가 된 쪽은 속이 좋을 수 없다.


"흐ー음, 카가 일향종이 공격한다고 하면…… 역시 하시바(羽柴) 군 쪽일까요? 군의 재편이 끝나지 않아서, 다른 곳과 비교해서 명백하게 압력이 약하니까요"


벼락출세한 히데요시는, 후다이(譜代)의 신하들에 비해 가신단(家臣団)이 약하다. 상비군(常備軍) 같은 건 가질 수가 없어서, 대다수가 반농반병(半農半兵)의 아시가루(足軽)나 잡병(雑兵)으로 구성된다.

무가의 일문을 담당하는 시바타 군과 비교하면 아무래도 숙련도 면에서 뒤떨어져버린다. 반면, 상승지향(上昇志向)이 강하고, 난장판(泥臭い)인 싸움에서야말로 진가를 발휘한다는 강점이 있다.

또, 오우미(近江)의 장병들을 자군으로 끌어들인 것에 의해 지휘계통의 재편이 끝나지 않아, 군으로서의 단결력이 약하다는 약점을 품고 있었다.


"아무리 '사람을 홀리는 사람(人たらし)'인 하시바 님이라도 오우미의 장병들을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겠죠. 이번에는 뒷바라지일(裏方)에 전념하시지 않을까요?"


"하시바 님은 그렇다치고, 시바타 님 쪽은 전의가 높겠지요. 카츠조 군, 제대로 역할을 수행해주면 좋겠는데…… 무공 운운하는 것보다 날뛸 수 있는 자리를 원하는 것처럽 보였으니…… 걱정이에요"


"저번의 아사쿠라(朝倉) 침공에서는 주력과 길이 어긋나서 기다리다 끝나 버렸고, 그 이후에는 활약할 자리가 없었으니까. 기운이 남아도는 카츠조가 흥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그런 잡담을 하는 세 사람이었으나, 시즈코의 걱정이 적중했다는 것을 후에 알게 된다.




달력은 9월로 접어들어, 아침저녁으로 싸늘함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맹위를 떨친 더위는 자취를 감추고, 하루종일 시원하여 살기좋은 날들이 이어졌다.

더위에 약하여 늘어져 있던 동물들도 활발하게 활동을 시작하는 계절.

그러나, 같은 달에 예정되어 있던 불꽃놀이 대회는 중지되었다. 주빈(主賓)인 천황의 몸이 좋지 않아, 제 1회 대회에 반드시 천황이 임석하는 것을 바랐던 노부나가가 중지할 것을 결단했다.

노부나가는 분한 듯 했지만, 불꽃놀이 기술자들은 1년 동안의 연구(研鑽) 기간이 생긴 것을 기뻐했다. 노부나가는 행사의 중지와 천황의 회복을 기원하는 서신을 작성하여 위문품과 함꼐 보냈다.


"공작(孔雀)의 장식깃털(飾り羽)이 이렇게 비싸게 팔리는구나……"


번식기(繁殖期) 숫공작(雄孔雀)을 상징하는 장식깃털(상미통(上尾筒))은, 그 아름다움 때문에 귀하게 여겨졌다.

이 장식깃털은 매년 새로 나며, 번식기인 초여름을 지나면 빠지기 시작해, 가을을 맞이할 무렵에는 모두 빠진다.

그리고 다시 늦가울 무렵부터 새로운 깃털이 나기 시작하여, 한겨울에는 다시 다 난다고 한다.


처음에는 두 쌍으로 시작한 진공작(真孔雀)의 번식이었으나, 그 후에도 계속하여 수입하거나 부화에 성공하거나 해서 숫자가 늘어, 지금은 15쌍이 생활하고 있다.

진공작의 장식깃털은 보석에 비유될 정도로 아름다워, 인도 공작의 그것보다도 가치가 높다고 한다.

그 상품가치는 일본 국내보다도 해외, 특히 유럽 각국에서 높아져서, 일본 국내에는 거의 유통되지 않는다.

빠져나간 장식깃털은 하나하나 정성스레 세척된 후 개별적으로 포장되어 바다를 건너게 된다.


공작에는 크게 못 미치지만, 타조의 깃털(羽根)도 유력한 상품이 되었다. 주로 유럽의 귀족사회에서, 타조의 깃털은 장식품으로 애용되고 있었다.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 후기인 17세기에 아프리카에서 입식자(入植者)들에 의해 상업 사육이 시작되어, 세계 각지에서 사육이 시작되는 21세기까지의 기간 동안 타조의 깃털은 금이나 다이아몬드와 나란히 아프리카의 특산품이었다.

오랫동안 남아프리카의 독점적 축산업으로 무역을 지탱해온 타조의 존재는, 노부나가에게 매력적인 산업으로 보여졌다.

그 거체(巨体)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을 잘 따르는 타조는 환경의 변화에 강하고 성장도 빠르기 때문에 우수한 가금(家禽)이 된다.

단, 번식기에 들어가면 성질이 난폭해지기 때문에 취급에는 주의가 필요해진다.

진공작과 비교하면 사육이 용이한 타조는, 전용 목장에서 쑥쑥 자라고 있었다. 개체수가 일정치에 달하면 오래된 세대부터 도살하여 가공된다.


참고로 해외로 수출되는 것은 타조의 깃털과 가죽 뿐이며, 그 고기에는 상품가치가 안정되지 않았다. 통상적인 방법으로 도살된 타조의 고기는 대단히 피비린내가 심하여 식용에 적합하지 않다.

그 이유는, 타조는 무려 시속 80km에 달할 정도의 속력을 지탱하는 강인한 심폐(心肺)를 가지고 있어, 도살이라는 생명의 위기에 직면하면 그 우수한 순환기가 전력으로 전신에 피를 보낸다.

그 결과, 전신의 모세혈관이 파열되어, 근육 구석구석까지 혈액이 스며들어 개도 안 먹는다고 하는 고기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에서는 타조 고기도 훌륭한 상품으로 유통되고 있다.

그 비결은 도살 방법에 있었다. 도살할 타조를 한 방으로 이동시켜, 고농도의 탄산(炭酸) 가스로 기절(昏倒)시킨다. 실신한 상태에서 도살하는 것으로 식용에 적합한 고기로 가공하는 것이 가능했다.

정기적으로 손에 들어온다고는 해도, 상업적으로 유통시킬 만한 양은 확보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타조 고기는 시즈코의 그녀의 관계자들이 소비하는 데 그쳤다.


현 시점에서 오와리에서 남만(南蛮)으로 운반되는 주요 수출품은, 비단(絹)이나 목면(木綿) 등의 섬유 이외에, 도자기(陶磁器)나 진주(真珠), 진공작, 타조의 깃털 등 장식품류, 간장(醤油)이나 된장(味噌) 등의 보존식이 선호되었다.

또, 이웃나라인 명(明)나라에는 칠기(漆器)나 부채(扇) 등의 가공품 외에, 표고버섯이나 해삼에 전복, 굴 등의 건물(干物)과 우뭇가사리(天草) 등의 해조류(海藻類)가 많았다. 그 다음으로 무구(武具)나 의류, 생활용품 등이 거래되고 있다.

이러한 수출품목들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존재한다. 하나같이 시즈코가 손댄 산업에 의한 상품인 것이다.


"상당한 양을 계속 공급하고 있는데 의외로 수요가 줄지를 않네"


소모품과는 달리, 장식품류는 공급이 안정되면 가격이 내려갈 거라고 시즈코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가격 변동이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 중 하나로, 유통을 담당하는 상선(商船)의 높은 손모율(損耗率)이 있었다.

이 시대의 해운 사정으로는, 일본을 출발하여 무사히 서양 각국까지 도착하는 상선은 많지 않아서, 절반 정도의 선박이 침몰하거나 난파의 고난을 겪거나 했다.

해난(海難) 사고가 드문 시대의 가치관에 기인한 맹점이었다.


"오, 이건 히가시야마고모츠(東山御物)의 보고서인가. 어디어디…… 순조롭게 수집이 진행되고 있다라. 뭐, 세세한 부분은 아시미츠 아저씨에게 맡겨두자"


히가시야마고모츠는 무로마치(室町) 막부(幕府) 8대 쇼군(将軍)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가 수집한 회화나 다기(茶器), 문구(文具) 등의 총칭이다. 그 중에는 아시카가 쇼군 가문이 대대로 수집한 물건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참고로 히가시야마고모츠는 메이지(明治) 이후에 정착된 호칭으로, 그 때까지는 히가시야마도노고모츠(東山殿御物 또는 東山殿之御物) 등으로 불리고 있었다.

요시마사의 조부인 3대째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満)나 아버지인 요시노리(義教) 등, 역대 쇼군이나 아시카가 쇼군 가문은 외국 물건(唐物)을 존중하는 경향이 강하여, 무역을 통해 많은 예술품을 수집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우닌의 난(応仁の乱)을 계기로 뿔뿔이 흩어지거나, 또는 막부의 재정난(財政難) 때문에 매각되어 버리거나 했다. 그대로 소유자 불명, 소재 불명이 된 것도 적지 않다.


하지만 시즈코가 조정으로부터 예술품의 보호에 임명받은 것으로 상황은 일변한다.

노우아미(能阿弥)가 남겼다고 하는 히가시야마고모츠에 대해 편찬된 '어물어화목록(御物御画目録)'이나 마찬가지인 자료인 '군태관좌우장기(君台観左右帳記)' 등을 바탕으로 뿔뿔이 흩어진 히가시야마고모츠의 소재를 파악하려고 했다.

소재가 확정된 시점에서 소유자에게 반환 요청이 들어간다. 왜냐하면 아시카가 쇼군 가문의 지보(至宝)에 관한 소유권은 현재 오다 가문이 이어받고 있다.

설령 정식으로 하사받은 것이라도 고려되지 않았다. 매각에 응하던가, 스스로 나서서 반환하던가, 그도 아니면 무력으로 빼앗기게 된다.


"시즈코 님, 주상께서 오셨습니다"


"알겠어요"


보고서를 읽고 있자, 소성(小姓)이 노부나가의 내방을 전해왔다. 노부나가가 오와리까지 온 이유를 시즈코는 헤아리고 한숨을 쉬었다.


"다기겠지, 틀림없이"


이유는 단순해서 히가시야마고모츠에 포함되는 다기나, 현대에서 국보나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다기가 시즈코가 있는 곳으로 모여들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연대에서 국보로 지정된 요우헨텐모쿠(曜変天目) 찻종(茶碗) 세 가지가 전부 모였다. 최고 걸작으로 이름높은 '이나마텐모쿠(稲葉天目)'의 이름으로 알려진 찻종을 노부나가가 그냥 지나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걸로 노부나가가 소유하고 있는 첫번째 요우헨텐모쿠 찻종이 함께 있으면, 일본에 존재하는 모든 요우헨텐모쿠 찻종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된다.


"으ー음, 그렇게 투덜대시더니, 무슨 바람이 분 걸까?"


응접실로 향하면서 시즈코는 혼잣말을 했다. 당초, 시즈코는 목록을 작성하기 위해 노부나가가 소유한 요우헨텐모쿠의 대출(貸出)을 요청했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이것을 거절하고 한시도 손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군태관좌우장기'의 기술이 정확한지 확인하게 해달라고 시즈코가 직접 가는 것을 제안했으나, 그조차도 기각되었다.

최종적으로 '다른 요우헨텐모쿠를 다 수집한다면 생각해 봐도 좋다'가 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딱딱한 인사는 됐다. 오늘 온 이유는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노부나가의 물음에 대답하면서, 시즈코는 소성에게 신호를 보냇다. 엄중하게 포장되어 있다고는 해도, 하나면 나라를 살 수 있다고까지 하는 다기인만큼, 이걸 운반하는 소성들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무사히 나무 상자의 운반을 마치자, 완충재로 감싸인 다기가 보이도록 뚜껑을 열었다. 대임(大任)을 마친 소성들은 일단 안심하고는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충분히 확인해 주십시오"


시즈코가 직접 요우헨텐모쿠 찻종에 씌워진 천을 제거하자, 노부나가의 눈에 선명한 색채를 자랑하는 다기가 들어왔다.

노부나가는 엷은 웃음을 떠올리며, 지참한 나무 상자에서 자신의 요우헨텐모쿠를 꺼냈다.

모든 요우헨텐모쿠가 한 자리에 모인, 역사적 순간이었다.































재미있게 보시고 후원(?)해 주실 분은 이쪽으로^^

'취미번역 > 전국시대 미녀 고생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1 - 1574년 10월 상순  (9) 2019.12.10
120 - 1574년 9월 하순  (6) 2019.12.04
118 - 1574년 7월 중순  (5) 2019.11.24
117 - 1574년 6월 중순  (5) 2019.11.20
116 - 1574년 3월 하순  (3) 2019.11.18
Posted by 가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