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 미녀 고생담

戦国小町苦労談


작가: 夾竹桃


어느 날, 한 명의 소녀가 전국시대로 타임슬립했다.

그야말로 신의 변덕, 악마의 심심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뜬금없이.


소녀는 세계를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디에나 있는 극히 보통의, 그리고 평범하고 수수한 소녀였다.

그런 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다.


전국 시대를 살아남는다 - 그것 뿐이다.





번역: 가리아



텐쇼(天正) 원년(元年) 키나이(畿内)의 사회기반 정비


117 1574년 6월 중순



4월. 채유(採油) 목적으로 재배되고 있는, 시야 한가득 들어오는 유채꽃(菜の花) 꽃밭이 최전성기를 맞이하여, 오와리(尾張)에 조금 늦게 봄이 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따뜻해지며 사람들도 활동적이 될 시기를 가늠하여 노부나가가 몇 가지 새로운 법령을 발표(発布)했다. 그것은 천황(帝)의 칙허(勅許)를 얻은 전국적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오다 영지 내부를 대상으로 한 내향적인 것이었다.

오와리나 미노(美濃)는 물론이고, 새롭게 영지로 편입된 에치젠(越前)이나 오우미(近江)도 대상이기에, 영지마다 부칙(附則), 세칙(細則)이 추가되기는 했으나 대체적으로는 3개의 줄기로 구성되는 법령이었다.


첫번째는 '낙시낙좌령(楽市楽座令)'. 이것은 오와리나 미노에서는 당연한 것이 된 내용이지만, 전쟁피해 복구(戦災復興)를 고려하여 새 영지에도 확대한 것이다.

대체적으로는 '특권을 가진 상공업자(商工業者)를 배제한 자유거래시장의 창설과, 그것을 방해하는 자에 대한 벌칙'으로 구성되어 있다.

노부나가의 눈이 미치기 쉬운 오와리, 미노에서 축적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직할령이 아닌 먼 땅에서의 도입이라는 실험적 시책이라는 측면도 있었다.


두번째는 소위 말하는 '칼사낭령(刀狩り令)'이라 불리는 무구징수령(武具徴収令)이었다. 이쪽도 오와리, 미노에서는 이미 시행되었으며, 새 영지에 대한 법령이다.

당시에는 전쟁 경험이 있는 농민이라면 칼이나 창 등의 무기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수리(水利) 등을 둘러싸고 마을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면, 이런 무기들이 사용되어 쉽게 사상자가 나는 사태로 발전했다. 그리고 희생자가 또다른 희생자를 불러, 분쟁이 확대해가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것을 근본적으로 방지하는 의미에서도 무사(武士) 이외의 사람들은 무구의 소유에 제한을 받는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권력을 이용해 억지로 빼앗으면 반발을 불러일으키기에, 적절한 이유가 있다면 소유가 인정되었다.

그러나, 이 무구의 소유에는 관리책임이 따라서, 만에 하나 도난당하여 범죄에 사용될 경우, 소유주에게도 엄벌이 가해진다는 간과할 수 없는 리스크가 따라붙었다.

조기에 무장해제에 응할 경우, 무구 대신 오와리 식의 철제 농기구가 지급되었기에 무구의 소유를 고집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마지막 하나가 '정교분리령(政教分離令)'이었다. 이것은 승려에 대한 법론(法論)의 금지와, 위정자에 대한 특정 종교에의 경도(傾倒)를 금지한 것이었다.

전자인 법론(종론(宗論)이라고도 한다)은 교의(教義)가 다른 종교 사이에 발생하는, 각자의 교의의 우열이나 진위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말싸움이지만, 결판이 나지 않으면 무력에 호소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처음부터 상대를 병탄(併呑)하기 위해 싸움을 걸어서 무력 투쟁으로 세력을 확장한 법화종(法華宗)같은 예도 있었다.

난세를 종식시키려 하고 있는 때에 새로운 분쟁의 불씨를 흩뿌려서는 본말전도(本末転倒)가 되기에, 이 법령에 관해서는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관여한 자들 모두에게 공평하게 엄벌이 가해졌다.

다음으로 위정자에 대한 종교색(宗教色)의 배제인데, 일례로서 승려 등을 부하로 쓰는 경우, 일정한 절차를 밟는 것이 의무화되었다.

또, 위정자 자신에게도 특정 종교에 대한 편들기나 변호(口利き), 그리고 반대로 특정 종교에 대한 부당한 탄압을 금지했다. 예외적으로 종교 세력의 정치 개입에 대한 감시나, 무력으로 이를 진압하는 것은 인정했다.

단, 무력 개입을 할 때는 위정자 이외의 감시역의 승인이 필요하여, 제멋대로(恣意的) 강권을 휘두를 수 없도록 제한되어 있기도 했다.

이를 위반할 경우, 위정자라도 일가족 몰살(根切り)조차 가능하다는 엄격한 처분이 명시되어 있었다.

이 법령에 따라 종교 세력(宗教家)은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 한 신앙(信教)의 자유를 인정받고 위정자의 개입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이점도 존재했다.


이 법령들은 오다 영지 내에 한정되는 영국령(領国令)이기에, 발표되어 주지(周知)되는 즉시 시행되었다. 우선 종교 세력(寺社勢力)에 대한 철저한 무장해제가 이루어지고, 이어서 민중으로 그 대상이 바뀌었다.

다음으로 특정 종교를 우대하고 있던 영주는 영지를 몰수당하고 추방당했다. 이것은 우대를 받던 측에도 적용되어, 정치에 개입했다는 이유로 영유지(所領)를 몰수당하고, 관계자 전원이 종교시설(寺社)에서 추방되었다.

당연히 이의나 반론으로 떠들썩했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그러한 것들을 일체 받아들이지 않고, 기각당했음에도 여전히 격하게 반응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마찬가지로 추방 처분했다.

하나라도 예외를 인정하면 조금씩 다른 것도 인정해야 하기에, 최종적으로는 유명무실(形骸化)해지는 것을 노부나가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노부나가는 단호한 태도를 관철했다.

거기에 소극적인 반항인 사보타주(sabotage)도 인정하지 않았다. 정기적으로 진척(進捗) 상황을 보고하게 하여, 정당한 이유 없이 대처가 늦어질 경우 그게 누구든간에 벌을 내렸다.

반대로 노부나가의 위세를 빌려 종교 세력에 대한 협박이나 탄압을 행한 자는 역시 예외없이 참수되었다. 그리고 철저 항전의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은 종교단체(寺社)들은 불태워서 씨를 말렸다.

공정하면서 가혹(苛烈). 그것이 노부나가의 정교분리령에 대한 평가가 되었다.


법령이 시행된 후 1개월 쯤 지나자, 공순(恭順)한 경우와 반항한 경우의 예가 쌓이게 되어, 다소의 불리함(不都合)은 있어도 따르는 편이 상책이라고 다들 생각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원활하게 무장해제가 진행되게 되어, 당장 할 일이 없어진 가신들에게 노부나가는 측량(検地)을 실시할 것을 명했다.


"쿠로쿠와슈(黒鍬衆)의 측량반(測量班)이 모두 나가 있는 건 그 때문인가……"


시즈코는 각지에서 밀려드는 쿠로쿠와슈 파견 요청서를 보고 중얼거렸다. 오다 가문에서는 이미 측량 절차가 확립되어 있지만, 신속하고 정확한 측량을 실행할 수 있는 인원이라고 하면 시즈코의 쿠로쿠와슈 이외에는 없었다.

게다가 노부나가가 명한 측량에는, 불필요한 성의 철거가 포함되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대규모의 토목공사가 필요해져, 직접 모두 처리하기보다는 순서를 기다리더라도 시즈코에게 인재파견을 요청하는 쪽이 싸게 먹히게 되었다.


"우선도가 높은 지역은 오우미와 에치젠입니다. 배치(差配)에 관해서는 아시미츠(足満) 님께 확인을 받았습니다"


쇼우(蕭)가 시즈코가 자리를 비운 동안 진행된 내용을 설명했다. 요청서를 받고, 쇼우가 기본 계획의 초안을 잡아, 아시미츠와 노부나가의 승인을 얻은 후에 인재 파견을 하고 있었다.

당초, 쇼우는 선착순으로 요청을 받아 측량지(測量地)의 넓이를 고려하지 않고 일정한 인원을 균등하게 파견하는 계획을 세웠다. 겨우 인재파견 쯤이야라고 쇼우가 얕보고 있었던 것도 있지만, 계획서를 본 담당자들은 하나같이 불만을 이야기했다.

파견될 곳의 실정을 고려하지 않는 허술(杜撰)한 계획에 영주까지 끼어들어 정치적인 다툼(駆け引き)이 시작될 상황이었기에, 아시미츠가 지휘하여 계획을 재검토했다.

영지의 장래를 좌우하는 중요한 안건이기에, 파견될 곳의 사정이나 지리적인 정보, 파견 인원의 규모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쇼우는 꼼짝없이(否応なく)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한 사정들은 처음부터 다 계산했다고 말하는 듯 자료를 한 손에 들고 차례차례 원안(素案)을 써내려가는 시즈코를 보고 그 넓은 견식과 높은 실무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묘하게 오우미 일대에 인원이 많이 파견되고 있는 것 같은데, 이건 어째서이지?"


"아즈치(安土) 주변의 조사와 그에 부수되는 공사들 때문입니다"


"과연"


노부나가의 거성(居城)이 될 아즈치 성(安土城)은, 군사적인 방어시설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편리성(利便性)을 중시하여 설계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아즈치 성 근처에 있는 군사적 거점이 되는 성들은 모조리 파기된다고 했다.

총이나 화약의 등장에 의해 화력면이 돌출된 전국시대에서 난공불락의 성이라는 건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아예 방어는 최소한으로 줄이고, 주변 지역에 대량의 군을 잠복시켜둘 수 있는 거점을 모조리 없애버리는 쪽이 안전성을 확보할 수 있다.

지리적으로도 쿄(京)나 사카이(堺), 오와리나 토우고쿠(東国)를 잇는 요충지에 위치하여, 물류의 동맥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절호의 위치였다. 쿄 방면이나 토우고쿠 방면 중 어느 쪽으로 가더라도, 한편으로는 수운(水運)으로 갈아타기 전의 거점이 되고, 한편으로는 산을 넘는 것에 대비한 보급지(補給地)로서 기능하여, 아즈치에 대량의 돈이 떨어질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사카이의 호상(豪商)들도 앞다투어(鎬を削って) 가게를 내려고 하겠지. 어쨌든 알겠어. 공사가 개시되면 자재의 운반이 필요해지겠지만, 지금 당장은 괜찮으려나"


"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시즈코로부터 합격점을 받은 것에 쇼우는 휴 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쇼우가 떠나간 후, 시즈코는 별도로 분개(仕訳)된 서류를 보았다. 내용은 시즈코가 운영하는 학교에 관한 것이었다.

당초에는 시즈코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시작한 사설학원(私塾)이었으나, 유능한 인재를 배출한다는 평가를 얻은 후에는 그 규모는 확대 일로를 걷고 있었다.

소문을 들은 유력자들이 경쟁하듯 자녀들을 보내게 되어, 도저히 시즈코 저택의 부지 내에서 해결될 규모가 아니게 되었다.

신분이 높은 자제들은 시중을 들어줄 인원도 데리고 오기 때문에, 급거 학교와 병설되는 기숙사(寄宿舎)도 짓게 되었다.

광대한 부지를 필요로 하는 만큼 시즈코 저택 부근에서 토지를 확보할 수 없어, 산기슭(山裾)에 있는 일대를 개척하여 토지가 준비되었고, 사상 최초의 완전 기숙사식 학교로서 5월부터 개교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거참, 면학(勉学)에 있어서는 신분에 관계없이 전원 일률적인 환경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나"


머리를 긁적이며 시즈코는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까지 거창하게 할 예정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국내(本邦) 최고 학교라는 사전 선전(触れ込み)에, 오다 가문 일족이나 중신들의 자제들이 책상을 나란히하게 된다. 당연히 아이들에게 연줄을 만들려고 자녀들을 보내려는 부모들이 끊이지 않는다.

그 대신 자금은 윤택하게 모여, 학교의 정원은 200명 정도가 될 거라 예상되었다. 한편, 기숙사에 대해서는 500명 가까운 인원이 생활할 수 있는 규모가 필요해져, 대사원(大寺院) 뺨칠 정도의 시설이 생겨났다.


"뭐, 실제로 운용해보지 않으면 불편한 점 같은 건 알 수 없지. 예정보다도 정원이 많은 것은 모른 척 하자"


억지로 자신을 납득시킨 시즈코는, 결재 서명을 하고는 서류를 치웠다. 이윽고 시일이 흘러 4월 후반. 멀리서 온 입학 희망자들을 기숙사에 받아들여, 예상보다 한 발 빨리 학교의 운영이 시작되었다.




5월이 되어도 노부나가의 내정 중시의 방침은 변하지 않았다. 우선순위 관계상 뒤로 밀려나 있던 삼림정비(森林整備)에도 착수하여, 정기적으로 간벌(間伐)과 식수(植樹)에 힘써, 마을 산(里山)의 전망(見通し)을 좋게 하여 산적(山賊)이나 강도(野盗) 등이 잠복할 장소를 없앴다.

계획적인 벌채(伐採)와 식수가 이루어진 덕분에, 표토(表土)의 유출이 적어져서 하천으로 유입되는 토사도 적어졌다. 산 뿐만이 아니라, 하천 정비(河川整備)에 수해 대책(水害対策), 항만 정비(港湾整備), 도로의 유지보수(街道普請), 측량(検地)과 병행하여 새 영지에 대한 호적(戸籍) 도입(配備), 자경단(自警団)의 조직과 범죄 단속 등을 행했다. 얼마나 노부나가가 내정에 힘을 쏟고 있는지 엿볼 수 있다.

사회에서 불안을 제거하여 활발한 경제 활동을 촉진하고, 결과적으로 사회가 풍족해진다는 것이 노부나가의 생각이었다.


노부나가는 자신 뿐만이 아니라 가신들에게도 사회 기반에 투자를 하여 정비하도록 명했다. 영주 자신이 주도하여 공공사업을 함으로써 고용을 창출한다. 백성들의 호주머니가 두둑해지면, 새로운 수요가 생겨나 경제 활동이 가속된다고 설명했다.

특히 힘을 쏟은 것이 도로 정비였다. 유통을 촉진하는 것이야말로 경제 활성화로 이어진다고 거듭 설명했다.

전국시대의 상식에 따르면, 도로 정비 같은 걸 하면 외적(外敵)의 침입을 쉽게 만드는 경국(傾国)의 정책이다. 이 때문에 하천에 다리를 놓으려고조차 하지 않고, 길도 가능한 한 구불구불하게(蛇行) 만드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적에게 공격받을 리스크보다도, 교통을 편리하게 하여 나라를 부유하게 만드는 쪽을 우선시했다.


이 정책에는 오다의 동향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호죠(北条)도 크게 혼란스러워했다. 머지않아 시작될 타케다(武田), 호죠와의 전쟁을 생각하면, 적을 이롭게 하는 행위가 될 뿐이기에, 노부나가의 진의가 어디에 있는지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에 병행하여 실시된 '칼사냥'에 의해 병사가 될 백성들로부터 무기를 압수한 것이 혼란에 박차를 가했다. 각자가 무기를 가지고 있으면, 긴급한 경우 즉시 대응할 수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명백하게 이득이 없는 행동으로 보였다. 하지만, 상비군(常備軍)을 보유한 노부나가의 입장에서는 병농분리(兵農分離)를 추진하고 있을 뿐이라 이미 정해진 노선이었다.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각지에 주둔하고 있는 전투훈련을 받은 병사들이 달려온다. 그 숙련도는, 무기를 들기만 했을 뿐인 초짜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는 해도, 상비군이란 것은 항상 자금을 소비하는 돈 먹는 하마(金食い虫)이다. 상비군을 가진다는 생각 같은 건 상상 밖의 일이었다.


5월 중순을 지나도 노부나가에게 눈에 띄는 움직임은 없었다. 노부나가 뿐만이 아니라, 후계자인 노부타다(信忠)도 군사행동을 하고 있는 기색이 없었다. 오다 군이 크게 움직일 때 반드시 큰 공을 세우는 시즈코도, 뒷바라지(裏方) 일에 종사하고 있어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타국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은, 무장해제에 응하지 않는 종교단체(寺社)들을 불태우고 있는 호리 히데마사(堀秀政) 뿐이었다. 노부나가로부터 대장으로 임명되고, 시즈코로부터 나가요시(長可)를 빌려 동분서주하며 세상을 떨게 하고 있었다.

종교단체에 대한 대처와 병행하여, 나가요시는 노부나가로부터 받은 다른 임무에도 종사하고 있었다. 그것은 영지 내에 부정하게 설치된 관문(関所)의 발견과 파괴였다.

이러한 기강잡기(綱紀粛正)라고도 할 수 있는 규율(規律)의 집행(引き締め)은, 노부나가에 대한 반란을 꿈꾸는 반란분자들의 결탁을 저해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반란이든 혁명이든, 상대의 부정을 규탄한다는 대의명분이 필요해진다.

하지만, 자타에게 모두 엄격하게 규율을 적용하여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고 있는 상대에게 원한을 품는 것 자체가 애초에 어렵다. 게다가 널리 민초(民草)들에게까지 개척이나 길의 유지보수 등의 일거리를 주고 있기에, 할 일이 없어 시간이 남는 사람 자체가 적어졌다.

유교(儒教)의 경서(経書) 중 하나인 '대학(大学)'에서 말하길, '소인한거위불선(小人閑居して不善を為す)'이라 했다. 이것은 소인(별볼일없는 인물)은 다른 사람의 눈이 없으면 나쁜 짓을 한다는 의미이다.

즉 널리 일거리를 주어 만민이 적극적으로 사회에 관여하도록 유도하면, 자연스럽게 다툼은 적어지는 것이다.


노부나가는 이런 외향적인 움직임과 병행하여, 내부의 단속을 철저히 했다. 지금까지 노부나가는 군사행동이 많아서 영지 내부를 비워두는 경우도 많았다. 이 때문에 내부에 부패가 생겨나게 되어버렸다.

그것은 세금(年貢)의 횡령이었다. 세금의 횡령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부수입(役得)으로서 묵인되고 있었다. 하지만, 오와리에서는 징세(徴税)에 관계되는 인원 모두에게 그에 걸맞는 봉급이 지급되고 있기에 노부나가가 법령에 의해 금지할 것을 명언했었다.

법이 정비되었다고 해도 실제로 단속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추가적인 이익을 탐하여 나쁜 짓에 손대는 것도 인간의 본성이었다.

지금까지는 전란(戦乱)에 정신이 없었고, 노부나가 자신도 세입(歳入)과 세출(歳出)이 지나치게 커져서 세세한 부분까지는 다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 눈이 닿지 않는 것을 이용해서 다른 서류에 섞어넣거나 서류를 위조하거나 해서 사복을 채우는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간신히 노부나가 자신이 여유가 생겨서 내부 조사에 착수해보니, 놀랄 정도로 많은 횡령이 발각되었다. 하나같이 대규모 횡령이라고는 할 수 없는, 10석(石) 정도의 횡령을 몇 번이고 반복하고 있는 상습범들이었다.

고작 10석, 하지만 10석. 횡령을 방치해도 되는 이유는 되지 않는다. 나쁜 싹은 일찌감치 잘라버리지 않으면 반드시 커져서 돌이킬 수 없는 부정이 되어 현실화(顕在化)된다.

백성이란 존재는 관(官)의 부정에는 민감하여, 관에 대한 불만이 쌓이게 되면 최종적으로 오다 가문에 대한 불만이 되어 열매를 맺는다. 노부나가는 자신의 실책을 반성하고, 대대적으로 칼질을 할(大鉈を振るう) 생각으로, 출혈을 각오하고 착수했다.


"이 방법 저 방법으로 사복을 채우는 데는 머리가 잘도 돌아가는구만"


나가요시는 어이없다는 듯 내뱉았다.

총대장인 호리를 필두로, 나가요시는 영지의 순찰을 하고 있었다. 명목상으로는 임검(臨検)이지만, 실제로는 횡령 사실을 규탕하고 즉각 태도를 고치도록 경고하고 있었다.

과거의 횡령에 대해서는 불문에 부치고, 태도를 고친다면 지금의 지위도 인정(安堵)한다는 비교적 온화한 경고였다. 그렇기에 죄를 인정하지 않고 어떻게든 얼버무리려고 하는 패거리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최후통첩이기도 했다. 경고를 받아들여 개심한다면 좋고, 그렇지 않으면 무력으로 처단당하게 된다. 실제로 호리와 나가요시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영주들의 목을 물리적으로 날려버렸다.


"어디, 이 주변이었던가? 신고(届け出)되지 않은 관문인가 하는 건"


신고되지 않은 관문 같은 건 존재해서는 안 된다. 호리와 나가요시는, 밀고가 있었던 숨겨진 관문이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하지만, 주변을 돌아봐도 관문은 커녕 작은 길(小径) 하나 보이지 않았다.


"거짓 정보를 받은 건가?"


"아니, 그렇지 않아…… 냄새가 나는군. 소행(作為)을 감추려고 하는 조무라기(小者)의 냄새가 나"


한번 둘러보고 관문을 발견하지 못한 호리와 대조적으로, 나가요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의 감이, 교묘하게 위장된 부자연스러움을 꿰뚫어본 것이다.

주의깊게 주위를 관찰하고 있던 나가요시는, 위화감의 정체를 포착했다. 울창하게 우거진 잡초(下草)들의 높이가 기묘하게 균일했던 것이다. 나가요시는 시험삼아 잡초를 한 웅큼 움켜쥐고 뽑아 보았다.

그다지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깨끗하게 뿌리째 뽑혔다. 명백하게 인위적으로 심어진 것이었다. 표토를 발로 긁어내자, 밟아서 다져지고 건조한 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과연, 도로폭을 볼 때 주요도로는 될 수 없지만, 개인이 밀수(抜け荷)를 하기엔 충분하군. 평소에는 이렇게 감춰놓고, 밀수를 하려는 상인과 결탁해서 뒷길을 이용한다는 거군. 어디까지나 소규모의 밀수에 그치니 쉽게는 발각되지 않지"


주요 도로(主幹道路)에서 떨어진 가느다란 길(細道)에서 근근(細々)하게 잔돈(小銭) 벌이나 할 생각이겠지만, 사태는 그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금지품의 반입이나 범죄자의 유입이나 탈출 등 중대한 범죄로 이어지는 악행이었다.


"위장에 쓴 흙은 젖어 있는데 아래의 길은 말라 있어. 즉, 이런 짓을 한 패거리는 아직 가까이 있다는 거야"


나가요시는 히죽 미소를 떠올리더니, 장대한 바디시(bardiche)를 고쳐쥐었다. 그의 부하들은 사냥이 시작된다는 것을 이해했다. 각자가 손에 든 무기의 덮개를 벗겨내어 칼날을 드러낸 후 나가요시의 뒤를 따랐다.


"좋아, 그럼 갈까"


들토끼라도 사냥하는 듯한 태평한 말투로 나가요시는 호령을 내렸다. 나가요시의 부하들은 말없이 무기를 치켜들고 나가요시를 선두로 길 안쪽으로 분산되어 들어갔다.

아마도 산을 뒤지게(山狩り) 되겠지만, 호리는 말릴 생각 따윈 전혀 없었다. 은폐 공작의 증거로서, 부자연스럽게 잡초가 심어진 흙을 병사들에게 회수하게 했다.

이에 대해서는 실행범은 물론이고, 두목(元締め)에게도 책임을 지게 할 필요가 있다. 벌써부터 비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으나, 호리는 신경도 쓰지 않고 영주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6월을 코앞에 두고, 시즈코는 비닐하우스 내에서 작업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유는 수확기를 맞이한 카카오에 있었다.

카카오의 모는 2, 3년이면 성목(成木)으로 성장한다. 1571년 1월에 심은 카카오도, 말라죽어버린 몇 그루를 제외하고 많은 모가 성목으로 성장했다.

카카오는 일반적인 과수(果樹)와 달리, 뿌리에 직접 꽃이 피며 열매를 맺는 생태(植生)를 보인다. 이것을 '간생화(幹生花)'라고 부르며, 카카오의 경우에는 수술과 암술이 같은 꽃에 있는 양성화(両性花)로, 벌레에 의해서만 수분(受粉)이 이루어진다.


카카오의 꽃은 계절에 관계없이 1년 내내 피며, 1년 전체로 보면 한 그루의 나무에서 5000에서 1만 5000개나 되는 꽃이 핀다고 한다. 하지만, 개개의 꽃의 수명은 대단히 짧아서 겨우 1, 2일만에 시들어버린다.

오후 늦게 개화를 시작하여, 다음 날 오전에 완전히 개화한다. 그리고 개화한 다음 날에는 그 전부가 시들어버린다. 즉, 수분이 가능한 시기가 대단히 한정되는 것이다.

게다가 가지나 뿌리의 구별없이 꽃을 피우기에, 경우에 따라서는 엄청나게 높은 곳에 꽃이 피는 경우도 있다. 사람 눈에 보이지 않고 시들어버리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이러한 이유로, 카카오의 결실률(結実率)은 1만 개의 꽃에 대해 열매를 맺는 것은 100개에서 300개 정도로 낮아져버린다.

당연히 모든 꽃에 대해 인공수분(人工授粉)을 시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기서는 대량으로 깔따구과(ユスリカ)의 벌레를 양식하여 수분을 위해 풀어놓았다. 예전에 서양인이 카카오를 재배했을 때, 카카오 나무와 그 주변을 지나치게 청결하게 해서 열매를 맺지 않았다는 일화도 있다.


시즈코도 카카오 나무가 꽃을 피우기 시작한 2년째부터 다양한 곤충을 투입하여 수분을 시도했다. 그 결과, 이 환경에서는 깔다구과를 풀어놓았을 때 수분률이 높았다.

이것을 고려하여 3년째가 되는 올해, 깔다구과의 벌레만 집중적으로 방충(放虫)했다. 상성이 좋았는지, 겨울 시기에 꽃을 피우는 식물이 달리 없었던 것이 다행이었는지 상세한 분석은 이제부터 해야 하지만, 어쨌든 많은 카카오가 열매를 맺었다.


방충에서 약 반년이 지난 현재, 많은 카카오 나무에 방울(鈴) 모양으로 카카오팟(cacao pod)이라 불리는 카카오 열매가 매달려 있었다.

수확 작업 자체는 어렵지 않아서 시즈코가 아니라도 가능하지만, 그녀는 자신 이외의 사람이 수확 작업을 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이유는 수확할 때 가지나 뿌리를 다치게 해버리면, 이듬해부터 그곳에는 꽃이 피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즈코는, 손이 닿는 범위는 작은 칼 등으로 주의깊게 수확하고, 높은 곳에 있는 것들은 특주(特注)한 전정가위(高枝切り鋏)를 사용하고 있었다.

알루미늄 같은 건 바랄 수 없다보니 통짜 철제(総鉄製)라서 그에 걸맞는 무게도 있기에 다루기가 어려워, 시즈코 혼자서 작업하고 있었다.


"좋아…… 이제 괜찮으려나"


시즈코는 눈 앞에 매달려 있는 카카오팟을 수확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수확용의 작은 칼을 꺼내어 신중하게 열매 부분만을 잘라냈다.

수확된 카카오팟은 두껍고 단단한 껍질로 덮여 있으며, 그 안에서 하얗고 부드러운 과육(섬유질이기에 펄프(pulp)라고 부른다)에 둘러싸인 씨앗(種子), 소위 말하는 카카오 빈즈(cacao beans)가 30개에서 45개 정도 얻을 수 있다.

이 펄프 부분도 식용 가능하지만, 잘 익어 반투명하게 비치는 것이라면 약간의 단맛과 약간의 신맛을 갖는 나타데코코(nata de coco) 같은 식감을 가진다.

특별히 맛있는 것은 아니지만, 카카오 빈즈에 초콜렛의 풍미를 주기 위해 필요한 부위라서 펄프째로 씨앗을 꺼낸다.

현대에서의 1차 발효(発酵)에서는 크게 두 가지의 방법이 사용된다. 하나는 수확한 씨앗을 바나나 잎으로 감싸 발효시키는 히프(heap) 법. 또 하나는 대규모 플랜테이션 등에서 채용되는 나무 상자를 이용한 박스(box) 법이 있다.

카카오 빈즈의 품종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어느 방법을 채용하더라도 1주일 정도면 발효가 끝난다. 시즈코의 경우, 그다지 대규모가 아닌데다, 동시에 재배하고 있기에 바나나 잎을 입수할 수 있었기에 히프 법을 선택했다.


이 공정에서는 크게 만든 대나무 바구니에 바나나 잎을 가득 깔고, 그 위에 펄프로 감싸인 상태인 씨앗을 올려놓고, 다시 그 위에 바나나 잎을 덮는다는, 히프 법의 발전형인 배스킷(basket) 법을 도입했다.

현대에서는 '질'보다도 '양'을 중시하기 때문에 병변(病変)한 카카오 빈즈도 같이 발효시켜 버리지만, 시즈코는 꼼꼼하게 선별했다.

병에 걸려 검게 변색된 카카오 빈즈는 당연히 제거하고, 극단적으로 크기가 다른 씨앗도 선별하여 제거했다. 이 때 지나치게 커서 선별에서 떨어진 씨앗을 꺼내 주위를 덮는 펄프를 찢어서 입에 넣었다.


"음ー, 새콤달콤하네"


1차 산업 종사자의 특권인 집어먹기(つまみ食い)를 감행한 시즈코는, 증거인멸을 하듯 남은 씨앗을 품종개량용으로 분류했다.

카카오 빈즈를 발효시키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발아(発芽) 능력을 잃게 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향미(香味) 물질의 전구체(前駆体, precursor)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발효 전의 카카오 빈즈는 전술한대로 점성(粘性)이 있는 펄프에 감싸여 있기에, 빈즈끼리 달라붙어 공기가 통하지 않는 혐기(嫌気) 상태가 되어 있다. 이 혐기 상태에서 활약하는 것이 '효모(酵母)'이다.

효모는 약 15퍼센트 정도 존재하는 펄프의 당분을 양식으로 활동하여, 당분을 알코올로 바꾼다.

이 1차 발효가 되는 것으로, 펄프가 분해되어 빈즈에서 벗겨져 떨어지던가 카카오 빈즈에 그 성분이 흡수된다.

그렇게 되면 카카오 빈즈가 공기에 접촉하는 호기(好気) 상태가 된다. 이 후, 카카오 빈즈 자신이 발효하는 2차 발효로 스테이지가 이동한다.


2차 발효에서는 활동의 주체가 '효모'에서 '유산균(乳酸菌)'이나 '아세트산균(酢酸菌)'으로 바뀐다. 2차 발효 초기단계에서는 유산균이 많지만, 발효가 진행됨에 따라 아세트산균이 늘어난다. 이 때, 아세트산균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1차 발효에서 산출된 알코올을 베이스로, 아세트산균은 아세트산(酢酸)을 생산한다. 이 아세트산이 카카오 빈즈에 스며들면, 카카오 빈즈의 떫은 성분을 줄요준다. 거기에 알코올과 산이 반응하면 에스테르(ester)가 생성되어, 이것이 독특한 좋은 향기를 낳는 것이다.

2차 발효에서는 균류가 산소를 좋아하는 호기성(好気性)이기에, 하루에 세 번 정도 교반(撹拌)하여 발효를 촉진시키는 경우도 있다.


여담이지만 카카오 빈즈의 알코올 발효를 이용하여 카카오 술을 만들 수 있다. 카카오의 원산지인 중남미에서는 옛부터 마시던 술이다.


시즈코가 집어먹던 씨앗을 포함하여 모양이 크고 무거운 씨앗을 선별하여 다음 세대의 모를 육성한다. 미리 준비해둔 화분에 씨앗을 뿌리고 느긋하게 생육을 지켜본다.

일본의 기후에 적응한 카카오 빈즈를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큰 씨앗이 튼튼한 품종으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다양성을 가지게 하여 교배를 계속하면, 언젠가 우수한 유전형질이 표출될 가능성도 있다.


카카오의 씨앗을 심은 화분을 그늘(日陰)에 안치한 후, 다음으로 시즈코는 커피 나무를 확인하기로 했다. 역시 이쪽도 시즈코가 직접 관리하고 있지만, 카카오와 커피 이외의 것은 시즈코의 손을 떠나 버렸다.

남은 식물들에 대해서는 전임(専任)의 관리자(世話係)를 붙여 인수인계를 실시했다. 그 이유는 시즈코는 바쁘기 때문에 집을 비우는 횟수도 증가하기만 하는 경향이라, 시즈코를 전임으로 하면 충분한 데이터를 얻을 수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커피 나무는 나무 높이(樹高)가 90cm까지 성장해 있었다. 100cm를 넘을 무렵부터 열매를 맺기 시작하기에, 당분간 더 상황을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온실환경에 있음에도 꽤나 느릿한 성장이라고 생각하면서 시즈코는 커피 나무의 상태를 관찰했다.

다행히 질병같은 징후도 없이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카카오 빈즈를 발효시키고 있는 대나무 바구니에 번호와 날짜를 적어넣고 시즈코는 비닐하우스를 나왔다.


부근에 있는 휴식용의 벤치에 앉아서 시즈코는 일련의 작업에 대해 상세한 내용을 기록했다.

시즈코가 꼼꼼하게 기록을 작성하기 때문에 비교적 용이하게 인수인계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지만, 그녀 자신도 그 때 어떤 의도로 작업을 했는지, 어떤 발견을 했는지 등을 자세히 기록하지 않으면 잊어버리기 떄문에 필요에 따른 조치였다.

이제와서 기억력이 비약적으로 좋아질 리도 없으니, 귀찮다고 생각하면서도 카카오 나무와 커피 나무에 관한 작업 일지를 작성했다. 대략 다 정리가 끝났을 무렵, 반투명한 팩티스(factice) 너머로 이쪽으로 다가오는 사람 모습이 보였다.

곧장 이리로 향하는 사람 모습이 몇 명으로 구성된 단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시즈코는 또 성가신 얘기가 들어왔구나 하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시즈코 님, 급한 손님이 오셨습니다…… 몸이 안 좋으시다면 다른 날에 다시 오시도록 전하겠습니다만?"


"괜찮아, 잠깐 생각을 좀 하고 있었던 것 뿐이야. 오늘 손님이 올 예정이 있었던가?"


"아뇨, 오늘 예정된 손님은 없습니다"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쇼우가 대답했다. 갑작스럽게 급한 손님 방문이라고 하면, 대단히 귀찮은 이야기가 될 거라고 시즈코는 확신했다.


"그래서, 누가 왔어?"


"네. 시바타(柴田) 님과 삿사(佐々) 님, 그리고 저희 아버지입니다"


"……성가신 일, 확정이잖아"


시즈코는 중얼거림과 동시에 고개를 숙이며 양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흘러나오는 소문에 의하면, 그들은 카가(加賀) 일향종(一向宗)에 대한 도발에 관해 작전회의가 분규(紛糾)하고 있다고 했다.

각각 세력이 팽팽한 상태에서의 파벌싸움이기에, 무공에 흥미가 없는 시즈코는 방관자의 입장을 취할 생각이었으나, 각각의 파벌의 수장이 찾아왔다고 하면 피할 수도 없다.


"뭐, 이 꼴로 만날 수는 없으니…… 일단, 손님을 응접실(応接間)로 안내하고, 그 동안 갈아입을 옷이라던가 이런저런 준비를 부탁해"


"옛"


한 번 깊게 인사를 한 후, 쇼우는 준비를 위해 달려나갔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입욕을 마친 후 응접실로 가자, 그들은 이미 준비된 좌탁(座卓)에 앉아 있었다. 본래 시즈코를 따라와야 할 케이지(慶次)는,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와 얽혀 이야기가 탈선하는 것이 싫었는지, 술병(徳利)을 한 손에 들고 목욕탕으로 가버렸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쪽이야말로, 사전 연락도 없이 방문했음에도 회의 자리를 마련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사이조(才蔵)를 대동한 시즈코가 상좌에 앉자, 시바타가 대표하여 인사를 했다.


"여러분도 바쁘시겠죠. 쓸데없는 말(建前)는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소문은 듣고 있습니다. 오늘 용건은 카가 일향종의 건이시겠죠?"


"헤아리신 대로, 저희들은 카가 일향종 공격을 앞두고, 첫걸음부터 발이 꼬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나다 가문(真田家)이라는 첩보부대를 거느린 지금, 외부 뿐만이 아니라 오다 가문 내부의 동향도 실시간으로 시즈코의 귀에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의도적으로 정보를 수집하지 않아도, 정기적으로 실시되는 보고에 의해 대략적인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카가 일향종을 향한 도발에 관해서는, 누가 그걸 담당할지로 다투고 있다고 들었다. 어떻게 도발(徴発, ※역주: 원문에는 '징발'로 되어 있는데, 이것도 작가가 도발(挑発)과 일본어 독음이 같은 한자를 잘못 쓴 것으로 보임)하고, 어떻게 상대에게 손을 쓰게 할지가 정해지지 않았다.

정벌의 대의명분을 얻은 사람에게야말로 제1 무공이 있다고 다들 생각하여, 서로 견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공을 독점해서는 주위의 반감을 사게 되고, 그렇다고 중용(中庸)적인 안을 내놓으면 주위에서 반론이 나와 기각된다.


"지금 상태로는 시간만 흘러가 도저히 주상의 기대에 부합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서로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저희들 중 누가 주도해도 모가 나기 때문에, 제 3자인 시즈코 님의 조력을 얻고자 왔습니다"


"(으ー음, 못 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군요. 무공을 둘러싸고 서로 견제할 정도라면, 아예 특정한 무공으로 만들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만……"


"누구의 공인지를 확실히 하지 않으면 논공행상에 지장이 생깁니다. 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시바타가 입을 열기 전에 삿사가 대화에 끼어들어왔다. 그의 지적은 당연한 것으로, 책임이나 상벌의 소재라는 것은 확실히 해두지 않으면 다툼의 씨앗이 된다.

공이 있다고 인정받고, 보상이 있기에 목숨을 거는 것이며, 다소 무리한 명령을 내리는 것이 가능해진다.


"아뇨, 무공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이 건에 대해서만' 전원의 연대책임이자, 전원의 무공으로 하는 겁니다. 그 이후의 무공에 대해서는 종래대로 각자 평가하면 되는 겁니다"


"음…… 말씀하시는 의미를 잘 모르겠습니다만……"


"죄송합니다. 순서대로 설명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카가 일향종을 도발하여 전쟁터로 끌어내면 제1 무공이라고 생각하고 계시지요. 하지만 주상께는, 그들을 전쟁터로 끌어낸다는 것은 대전제(大前提)에 지나지 않습니다. 준비단계이기에, 이걸 전원이 해내야 하는 공통목표로 삼는 것입니다. 이게 가능해야 처음으로 각자 겨룰 수 있는 무대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걸 해내지 못하면 그것은 전원의 책임이 됩니다. 카가 일향종을 전쟁터에 세우고, 그로부터 얼마나 빠르게 평정할 수 있는지를 충분히 겨루시면 됩니다"


설명을 들은 세 사람은 신음했다. 노부나가는 카가 일향종의 토벌을 명했다. 즉, 카가 일향종을 공격하는 데 충분한 대의명분을 얻는 것은 당연히 가능해야 하는 요건이 된다.

역설적으로, 거기까지의 단계는 노카운트로서 고려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참가자격으로 간주하며, 실제로 카가 일향종을 정벌한 실적에 따라 무공을 매기는 평가방식이라는 쪽이 공평하다.

구체적인 성과를 숫자로 확인할 수 있기에, 노부나가로부터도 포상을 받기 쉬워진다.


"……확실히 그렇군. 주상께서는 도발하여 전쟁터로 끌어낸 후에 정벌하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을 무공이라고 요란하게 떠들어봤자 명예(ほまれ)가 될 수 없겠지. 그보다도 주상의 기대 이상의 속도로 제압하면 주상께서 기꺼이 생각하시겠지"


"우선은 겨룰 무대를 준비하는 데까지 협력한다……라"


"이야기는 이치에 맞는군. 시바타 님도 토시이에 님도 이의는 없으시겠지?"


세 사람은 자신들 나름대로 납득하는 말을 찾아내자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작전회의는 어떻게 되겠다, 고 시즈코는 휴 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물론, 그렇게 일이 원하는 대로 풀릴 리가 없다, 라는 것을 그녀는 후에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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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가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