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 미녀 고생담
戦国小町苦労談
작가: 夾竹桃
어느 날, 한 명의 소녀가 전국시대로 타임슬립했다.
그야말로 신의 변덕, 악마의 심심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뜬금없이.
소녀는 세계를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디에나 있는 극히 보통의, 그리고 평범하고 수수한 소녀였다.
그런 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다.
전국 시대를 살아남는다 - 그것 뿐이다.
번역: 가리아
텐쇼(天正) 원년(元年) 키나이(畿内)의 사회기반 정비
113 1574년 1월 하순
설날(元日). 새해 인사를 나누기 위해 노부나가가 있는 곳을 찾는 사람들은 작년에 비해 몇 배로 불어나 있었다.
혼잡을 예상하고 준비된 대합소(待合所)는 사람으로 넘쳐나서, 대합소에 들어가려고 해도 장사진(長蛇の列)을 각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그런 상태였기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할당되는 시간은 엄격히 제한된다. 간결하면서 필요 최소한의 말로 노부나가에게 기억되기 위해 모두가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화톳불(篝火)이 피워져 있다고는 해도, 찬바람이 불어닥치는 시련을 견뎌내고 간신히 노부나가와의 알현이 이루어져도, 나눌 수 있는 말은 정형화된 인사 외에는 한두마디에 불과하다.
인사를 마친 사람이 실의에 잠겨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좀 더 잘해보이겠다고 야심을 불태우는 사람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차가 맛있네"
설날쯤 되면 다들 본가(実家)로 돌아간다. 항상 소란스럽던 시즈코의 저택도 이 날만큼은 정숙함에 휩싸여 있었다.
무슨 일만 있으면 소동을 일으키는 이치(市)와 챠챠(茶々), 하츠(初)도 정월(正月) 동안에는 오다 가문으로 귀성해 있었다.
시녀나 하인들에게도 휴가와 노잣돈(路銀)을 주어 돌려보내버렸기에, 시즈코의 저택에서는 사람의 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곁에서 시중드는 사람들(側仕え)이 전부 나가 있기에 뭘 하려고 해도 직접 움직일 수밖에 없지만, 시즈코는 이걸 불편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로리(囲炉裏)에서 느긋하게 물을 끓여 직접 자신과 아야(彩) 몫의 차를 끓여 한잔 마시고 있었다.
"미노(美濃)에서 나는 좋은 찻잎을 준비했습니다"
지금 시즈코가 사용한 차통(茶筒)을 들어보이며, 포커 페이스에 어딘가 뽐내는 듯한 표정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아야와도 오래 알고 지냈기에, 약간의 표정 변화를 읽어낼 수 있게 되었다.
맛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이 느긋한 시간도 포함하여 총평(総評)한 건데, 라고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아야답다고 시즈코는 웃었다.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하면 두 사람 다 신분이 지나치게 높아졌다. 항상 주위에 누군가가 대기하고 있었기에, 둘만이 조용히 대화할 수 있는 시간 같은 건 정월 이외에는 있을 수 없었다.
최근의 시즈코는 노부나가의 명령을 받고 집을 비우는 일이 많다. 한편, 아야는 시즈코가 없을 때 집을 보게 되므로, 쇼우(蕭)와 함께 집 안을 관리할 필요가 있다.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엇갈리는 생활을 하게 되어, 대화는 커녕 자칫하면 한 달 넘게 얼굴을 마주칠 수 없는 경우까지 있었다.
"뭔가, 설(正月)이라는 느낌이 드네"
다른 사람 없이 아야와 둘이서 조용히 이야기를 한다. 겨우 그런 것이 어렵다. 지금의 시즈코에게는 1년에 한 번, 설에만 찾아오는 특별한 시간이었다.
조금 옛날을 떠올려보았다. 지금의 저택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좁은 방에 자신이 있고, 주위를 케이지(慶次)나 사이조(才蔵), 나가요시(長可), 아야가 둘러쌌다.
무슨 이야기를 했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다들 웃었던 것은 확실했다. 옛날 쪽이 나았다는 말은 하지 않겠지만, 시즈코는 꽤나 멀리 와버린 듯한 심정이었다.
"뭔가, 여러가지가 변해가네"
"시즈코 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지는 모르겟습니다만, 당신께서 필요없다고 하시지 않는 한, 저는 당신 곁에서 계속 모실 것입니다"
"……고마워"
아야의 꾸밈없는 말을 듣고 시즈코는 약간 간지러운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이후로 어느 쪽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무언(無言)의 시간을 거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주상(上様)께서 일본을 통일하시면 조금은 조용해지려나?)
일본에서 전쟁이 사라지고, 세상에 태평(泰平)이 찾아오면 조용히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몽상을 하면서 시즈코는 아야와 둘만의 설을 보냈다.
하룻 밤이 지난 후, 다음날부터는 평소대로 돌아왔다. 고용인(家人)들도 돌아와서, 전날의 고요함이 거짓말처럼 떠들썩했다.
첫 일거리로서, 우선 노부나가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러 간다. 올해부터는 노부타다에 대한 인사도 필요해져, 준비에 다들 정신없이 바빴다.
주군에 대한 인사를 마쳐도 쉴 수 있는 틈 따윈 없다. 사흘째가 되면 자신의 부하들이나 오다 가문 내의 요인(要人)들도 설 인사를 하러 시즈코의 저택을 방문한다.
상대에 맞춰 안내할 방에서 입을 의상까지 바꿀 필요가 있어, 사전에 쇼우와 상담했다고는 하지만 익숙하지 않는 점도 맞물려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그런 것들을 마치면, 다음은 자신의 관할령(所領)인 주요 마을(街)에 새해 인사를 하러 갈 필요가 있었다.
이때쯤 되면 케이지가 돌아오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시즈코 저택으로 돌아와 있기에, 행사에 호위로서 따라온다.
여기까지 만사 지장없이 끝낼 수 있다면 한숨 돌릴 수 있지만, 그때는 한달도 절반은 지나 있다.
애초에 마츠노우치(松の内, ※역주: 설에 門松(=대문 앞에 세우는 소나무 장식)를 세워 두는 동안(설날부터 7일 혹은 15일까지))라 불리는 기간은, '정월 대보름(小正月)'까지의 15일로 치기 때문에, 새해는 정신없이 바쁘게 지나간다.
"크어ー, 겨우 끝났다"
시즈코는 좌식 책상(文机) 위에 엎어져 있었다. 아직 선물(進物)의 체크가 남아 있었지만, 그건 크게 번거로운 것은 아니다.
시즈코가 새해 인사를 하고 있는 동안, 아야와 쇼우가 신분별로 정리한 자료를 준비해주었다.
그 후에는 시즈코가 내용을 확인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기만 하면 되었다. 서류를 확인하고 추가로 몇 통의 글을 썼기 떄문에, 1시간 쯤 지나가 끝이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흐ー음. 쿠로쿠와슈(黒鍬衆)를 데리고 있어서 그런가, 이런저런 사람들이 왔네"
미츠히데(光秀)나 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藤孝) 등의 쿄(京)에 거점을 두는 유력자들이나, 히데요시(秀吉)를 시작으로 시바타(柴田)에 사쿠마(佐久間) 등 오다 가문 후다이(譜代)의 가신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최저한의 답신은 하고 있으나, 추가로 뭔가 선물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시즈코는 서류를 뒤적이고 있었다. 문득, 시즈코는 서류와는 별도로 두 통의 편지가 첨부되어 있는 것을 깨달았다.
"이게 뭐지?"
손에 들고 보니 한 통은 사키히사(前久)로부터 온 것이며, 다른 한 통은 아시미츠(足満)로부터의 편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키히사는 그렇다치고, 아시미츠가 편지를 보내다니 희한하다고 시즈코는 생각했다.
급한 일이라면 직접 찾아올 아시미츠의 편지를 뒤로 미루고, 먼저 사키히사의 편지를 열어보기로 했다.
적혀 있는 내용은, 조정이 소유한 보물창고(宝物殿)인 쇼소(正倉)의 출입을 허가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건…… 흠흠"
쇼소란 당대의 조정이 재물(財物)을 보관하기 위해 마련한 창고이며, 현대에는 그 대부분이 소실되어 버렸다.
예전에는 남도(南都) 7대사(七大寺)에 각각 쇼소가 줄줄이 세워져 있는 구획을 담벼락으로 둘러싼 '쇼소인(正倉院)'이 존재했으나, 현존하고 있는 것은 토우다이지(東大寺) 쇼소인 중 한 채만 남게 되어버렸다.
당시의 보물이 시간을 넘어서 아직도 양호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고상식(高床式)의 구조에 의해 습도에 의한 훼손이나 벌레의 피해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칙봉(勅封) 제도로 엄중하게 관리되어 함부로 개봉되지 않았던 점도 이유로 들 수 있다.
"아무래도 시기는 미정인가. 뭐, 당연하겠지"
엄중하게 봉인되어 제한된 사람들 밖에 볼 수 없는 쇼소의 보물을 열람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에치젠(越前)에서의 행동이 있었다.
시즈코 자신이 의식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치죠다니(一乗谷)에 있는 문물(文物)을 피난시킨 후에 불태웠다는 사실은, 문화의 수호자(担い手)를 자칭하는 공가(公家)나 조정(朝廷)에게 대사건이었다.
노부나가에게 아사쿠라(朝倉)란 몇 번이고 골탕을 먹은 존재. 그 아사쿠라를 앞두고, 노부나가에게 문물을 반출할 유예를 청하고 그걸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무거웠다.
직접 노부나가를 만날 기회가 없는 공가들에 있어, 노부나가는 악마(鬼神)처럼 무서운 존재이며, 그 노부나가를 제어하여 문물을 보호하는 시즈코에게서 공가들은 '문화의 수호자'의 모습을 보았다.
"언제 허가를 받아도 괜찮도록, 준비만큼은 게을리하지 말아야지"
조정의 보물창고이기에 쉽게 열리지는 않는다. 그것을 이해하고 있는 시즈코는, 뛰는 마음을 억누르면서 상대방의 대응을 기다리기로 했다.
시즈코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쇼소의 출입허가증에 날짜가 기재되어 있지 않는 것에는 조정의 노림수가 존재하고 있었다.
만약 시즈코가 허가증의 내용에 불만을 품고 강권(強権)을 통해 출입을 요청하면, 조정 측은 이유를 붙여 거절할 생각이었다.
의도하지 않게 보물을 앞에 두고도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이성적인 인물로 보이게 된 시즈코는, 옆으로 치워두었던 아시미츠의 편지를 열어보았다.
"흐ー음, 검술사범(剣術指南) 역할로 야규(柳生) 가문의 협력을 요청하기로 했구나. 일부러 편지를 보내와서 대립 관계라도 된 줄 알았네"
현재의 야규 가문은, 아시미츠와 인연이 깊은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를 섬기고 있었다.
그 마츠나가가 정월 인사를 하러 기후(岐阜)를 방문했을 때, 아시미츠는 억지로 교섭의 자리를 만들었다. 마츠나가는 '쾌히 승락'해 주었다, 고 편지에는 적혀 있었다.
"네놈에게는 거부권 따윈 없다. 승복할지, 싸울 준비를 할지, 원하는 쪽을 선택해라"
"절대로(努々) 도망치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말아라. 네놈의 일거수 일투족은 항상 감시되고 있다고 생각해라"
"여기서 결단하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조건은 혹독해질 거라는 것을 명심해라"
"오해가 없도록 말해두지만, 이것은 내 뜻이 아니라 오다 님의 의향을 전하는 것이다"
"이것들을 고려하여 가급적 신속하게 대답을 보내라"
"네놈이 야규를 아까워하여 대답을 하지 않는다면, 이쪽에도 생각이 있다. 그렇게 무서워할 것은 없다. 적어도 고향(国許)까지는 돌아갈 수 있겠지. '지금은' 말이다"
이러한 명백히 협박(恫喝)에 가까운 교섭이 이루어졌다. 교섭이라는 것은 말뿐이고 일방적인 최후통첩에 지나지 않는 내용을 모르는 시즈코는, 야규 가문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의 야규 가문 당주는 무네토시(宗厳)가 맡고 있다. 하지만, 무네토시 본인은 전쟁에서 귀국하던 도중 말에서 떨어져 큰 부상을 입었다.
적자(嫡男)인 미치카츠(巌勝)의 경우에는 타츠이치 성(辰市城)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시중을 들어줄 사람(介添え)이 없으면 일어날 수 없는 상태였다.
후세에서 야규(柳生) 신카게류(新陰流)의 지위를 확립한 무네노리(宗矩)도, 이 시점에서는 나이어린 꼬마에 불과했다.
선조대대의 영토(所領)가 있기에, 누굴 파견해 올지 생각하니 일말의 불안이 있었다.
(순리대로 간다면 차남인 큐사이(久斎)일까? 3남인 토쿠사이(徳斎)는 어릴 때 출가했으니 일단 대상에 올라가지 않겠지. 4남인 무네아키(宗章)는 열 살도 되지 않는 소년…… 으ー음, 이건 어려우려나)
현재 상태에서 판단하면, 무네아키가 성인식(元服)을 치를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겠다고 시즈코는 생각했다.
현 시점에서는 만족스럽게 지도(指南)을 할 수 있는 인물이 없다.
카미이즈미 노부츠나(上泉信綱)의 직계 제자이자, 야규 무네토시를 쓰러뜨리고(여러가지 설이 있음), 역사적 사실에서는 오다 노부타다(織田信忠)나 토요토미 히데츠구(豊臣秀次) 등에게 무술(兵法)을 전수했다고 하는 히키타 카게토모(疋田景兼)도 생각했지만,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그가 후보로 올라가지 않는 이유로서, 그의 방랑벽(放浪癖)을 들 수 있다. 역사적 사실에서는 평생 무사수행(武者修行)의 길을 걸으며, 결코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 유랑 생활을 계속했다.
"아무래도 검술 사범(指南)이, 무사수행 여행이라고 하고 종종 행방을 감추는 건 문제니까"
천천히 생각할 필요가 있겠다고 시즈코는 한숨을 쉬었다. 그런 그녀에게 추가타(追い打ち)를 먹이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것은 1월도 다 지나서 며칠만 있으면 2월이 되려는 시기의 일이었다. 노부나가로부터 호출을 받고, 시즈코는 그의 거성(居城)인 기후 성(岐阜城)으로 향하고 있었다.
성에서는 호리(掘)와 란마루(蘭丸)의 울퉁불퉁(凸凹) 콤비가 여전히 만담(漫才) 비슷한 대응을 주고받으며 시즈코를 안내했다. 맹장지가 열리고 시즈코의 눈에 들어온 광경에 그녀는 엉거주춤했다.
"잘 왔다. 기다리고 있었느니라"
시즈코는 노부나가의 말에 놀란 것이 아니다. 상좌(上座)에 있는 노부나가를 중심으로, 좌우로 주루룩 중신(重臣)들이 모여 있는 현장을 보고 보통 일이 아니구나라고 겁을 먹은 것이다.
적자인 노부타다를 시작으로, 히데요시(秀吉)에 미츠히데(光秀), 시바타(柴田)에 삿사(佐々),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에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 등, 쟁쟁한 인물들이 죄다 모여 있었다.
자신이 이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것에 메마른 웃음을 떠올리면서 시즈코는 상좌 가까이 준비된 자리에 머뭇거리며 앉았다.
"자, 시즈코의 도착으로 전원이 모였구나. 드디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겠다"
노부나가의 말에 전원의 표정이 조여졌다. 노부나가가 명언(明言)하지 않아도 모두 이해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노부나가가 말하는 내용에 의해 자신들의 진퇴(進退)가 좌우될 것이라는 것을.
전원이 노부나가의 말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고 마른 침을 삼켰는데, 그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노부나가는 웃음을 떠올리면서 입을 열었다.
"그렇게 조바심내지 마라. 먼저 조정(朝廷)에서, 재미있는 칙서(勅書, 천황(天皇)으로부터의 명령서)가 왔다"
그 말과 동시에, 등 뒤에 시립하고 있던 소성이 움직였다. 두 명의 소성이 쟁반에 얹힌 칙서를 공손하게 받쳐들고 시즈코와 미츠히데 앞에 각각의 쟁반을 놓고 물러났다.
시즈코는 시선만을 미츠히데에게 향했는데, 그도 같은 생각을 했었는지, 의도치 않게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는 모습이 되었다.
두 사람의 행동에 신경쓰지 않고 시즈코는 턱짓으로 시즈코를 재촉했다. 읽어라, 라는 말이라고 헤아린 시즈코는 칙서의 내용을 확인했다.
"폐하(帝, みかど)께서 그대들 두 사람에게 예사(芸事)의 보호를 맡기고 싶으시다고 한다"
독특하고 난해한 표현(言い回し)에 애를 먹는 시즈코를 보고 노부나가가 칙서의 내용을 요약해서 말했다.
새로운 직함을 만들고 조정이 후원할테니 일본 각지에 흩어져 있는 예술품이나 기술자들의 보호를 하라는 내용이었다.
형식상은 명령이지만, 거절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간원(懇願)에 가까운 내용이었다. 조정의 보물을 맡는 토우다이지(東大寺)조차 과거에 두 번이나 불탄 적이 있다.
물론, 보물을 노린 방화(焼き討ち)는 아니었지만, 불교의 총본산 중 하나로 꼽히는 토우다이지조차 안전하지는 않다.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와 미요시(三好) 3인방(三人衆)이 벌인 토우다이지 대불전(大仏殿) 전투는 공경(公卿 ,※역주: 조정에서 정3품, 종3품 이상의 벼슬을 한 귀족)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재미있으니, 시즈코가 맡아라. 낑깡은 그러한 것에는 관여하지 마라. 네게는 다른 일을 맡기겠다"
"옛, 잘 알겠습니다"
칙서를 건네주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노부나가가 방침을 결정했다.
노부나가의 말에서, 칙서에는 시즈코와 미츠히데 중 어느 한 쪽이 받아들여주기만 하면 된다고 써 있었던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은 무가(武家)의 정점에 서서 천하에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오다 가문의 위광과, 지방을 다스리는 사원들(寺社)의 힘을 합치면 문물의 보호가 가능할 것이라고 조정은 생각한 것이리라.
(흠……)
하지만, 이 이야기를 받아들여봤자 노부나가에게 이익이 없는 것이 석연치 않았다. 예사에도 이해를 보이고 있다고는 하나, 노부나가는 그렇게까지 문예(文芸)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니다.
어디에 노부나가의 심금(琴線)을 울리는 요소가 있었는지, 그것을 파악해두지 않으면 노부나가의 기대를 저버리게 된다. 노부나가가 직접 밝히지 않는 이상, 스스로 그 마음 속을 추측할 수밖에 없다.
(…………아, 알 것 같다)
노부나가가 시바타와 이야기하고 있는 도중, 시즈코는 계속 심사숙고(沈思黙考)하고 있었다. 몇 가지 추론은 떠올랐으나 확신을 얻지 못하고 있을 때, 시즈코의 귀는 노부나가가 흘린 '다기(茶器)'라는 단어를 포착했다.
빠져 있던 퍼즐의 조각이 갖춰졌다. 시즈코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
(문물을 보호하게 되면, 당연히 다기도 그 대상에 포함되지. 폐하의 칙명으로 문예의 조사를 하고 있다고 하면, 이 요청을 거절할 수는 없어. 주상께서 마음에 들어하실 경우, 소유주에게는 기한을 정하지 않는 차용증(借用書)과 협력에 대한 감사장(感状)이 보내지겠지)
나는 새도 떨어뜨릴 기세의 오다 가문에 더해, 쇠락하기는 했으나 결코 얕볼 수 없는 조정이 손을 잡았다. 무력으로는 오다 가문에게 밀리고, 대의명분조차 상대에게 있다.
이 상태에서 싸움을 거는 건 어리석음의 극치. 협력의 요청이라는 건 말뿐이고 징발 행위일 뿐이지만, 거역하면 '역적(朝敵)'으로서 후세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
(주상의 노림수는 알겠는데, 처음부터 힘으로 밀어붙이면 반발이 무서우니, 우선 온건하게 진행하자. 고노에(近衛) 님이나 호소카와(細川) 님의 조력을 부탁할까?)
대의가 이쪽에 있다고는 해도, 처음부터 시비조로 임할 이유도 없다. 강권에 의지하는 것은 최종수단으로 하자, 그렇게 결론지은 시즈코였다.
시즈코가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노부나가가 시바타의 처우를 발표했다. 호쿠리쿠(北陸)에 둥지를 튼 최후의 적, 카가(加賀) 일향종(一向宗)의 토벌에 있어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를 총대장으로 임명했다.
시바타가 이끄는 호쿠리쿠 방면군(方面軍)의 진용은, 히데요시나 삿사, 마에다 토시이에에 후와 미츠하루(不破光治) 등을 지원군(与力)으로 붙였다. 이 오다 가문 내에서도 손꼽는 군세로 호쿠리쿠를 평정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이 인사(人事)를 볼 때 호쿠리쿠를 맡게 되는 것은 시바타인 것이 확정되었다. 가신들의 출세 경쟁에서는 시바타가 한 발 앞선 모양새가 된다.
영달(栄達)에 흥미가 없는 시즈코를 제외하고 다른 중신들은 사태의 중대함을 이해하고 있었다.
(여기는 역사적 사실대로네)
역사적 사실에서는, 시바타 카츠이에가 1580년 11월 17일에 카가 국(加賀国)을 평정하여, 실로 90년이나 되는 동안 몇 번이고 반복된 잇키(一揆)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번의 경우에도 시바타가 평정의 임무를 받았으나, 역사적 사실과는 사회 정세가 달랐다.
역사적 사실에서는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이 카가 국까지 진출하여, 시바타는 테도리가와(手取川) 전투에서 켄신에게 호되게 당하게 된다.
그러나, 현재 상황에서는 우에스기 가문과는 동맹을 맺었으며, 정세를 돌아봐도 배신을 당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에치젠에는 미츠히데가 진을 치고 있어, 그는 카가 일향종의 퇴로를 끊는 임무를 받고 있었다.
이러한 것들을 고려할 때, 카가 일향종에게는 처음부터 승산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무장을 해제하고 노부나가의 지배를 받아들이던가, 아니면 전멸할 때까지 싸우던가 둘 중 하나 밖에 길은 없었다.
"훌륭하게 대임(大役)을 수행해 보이겠습니다"
"결코 이쪽에서 먼저 쳐들어가지 말도록. 놈들을 계속 도발하여, 놈들이 쳐들어왔다는 대의를 얻은 후에 반격하라"
이것은 장렬(壮絶)한 인내심 싸움(我慢比べ)이었다. 현재 노부나가는 혼간지(本願寺)와 화평을 맺고 있어, 이 동안 다른 혼간지 파가 노부나가를 공격했을 경우, 이시야마(石山) 혼간지는 아무 말도 못하고 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카가 일향종이 먼저 노부나가를 공격했다는 명분(体裁)만 있으면, 이시야마 혼간지는 병사 한 명조차 움직이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
화평의 약정을 깨면, 그것 자체가 노부나가에게 이시야마 혼간지를 공격하게 하는 대의명분이 되어 버린다.
"네 마음껏 공격해 보아라"
노부나가는 굳이 시바타에게 구체적인 방침을 내리지 않았다. 노부나가는 시바타에게 호쿠리쿠의 통치 및 켄신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길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슬슬 모든 것을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일 수 있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노부나가가 시바타에게 시련을 내린 것은, 시바타가 어느 쪽이냐 하면 지시를 기다리는 타입의 무장이기 때문이다.
그는 노부나가라는 주군을 모셨기에 100의 힘을 발휘하는 타입이었다. 주인의 명령을 받으면 주저없이 앞으로 나아가지만, 자신이 생각하게 되면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호쿠리쿠를 맡기려면 그래서는 안 된다. 노부나가의 눈이 구석구석 미치지 못하는 이상, 시바타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그 자리에 맞는 대책을 취해야 한다.
이 카가 일향종 토벌은, 시바타가 호쿠리쿠를 다스릴 자격이 있는지를 판단하는 시금석(試金石)이 된다.
"옛! 반드시 낭보를 전해드리겠습니다!"
"이번의 인사(采配)에 하고 싶은 말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호쿠리쿠 평정에 주력하라. 이곳을 무너뜨리면 남는 거점은 키이(紀伊) 뿐이다. 너희들은 그쪽에서 공을 세우도록"
"옛!"
가장 먼저 시바타가 대답하고, 히데요시나 미츠히데도 그에 따라 엎드렸다. 그들의 모습에 노부나가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즈코. 네게는 독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재량을 주겠다. 이 세상의 누구도 네 움직임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겠지. 일부러 너를 자유롭게 두는 것으로 자리를 휘저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 옛"
시즈코는 노부나가의 말에 한방 먹은 느낌이었다. 말하자면 백지 위임장을 받은 것에 가깝다. 노부나가의 지시를 받지 않아도, 시즈코의 판단으로 군을 움직이는 것이 가능해진다.
시즈코의 성격상, 오다 가문에게 불이익이 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의 증거라고도 할 수 있었다. 단독 부대라도 눈부신 전과를 올리는 시즈코 군이 공격으로 전환한다.
이만큼 적대 세력에게 위혐적인 것은 없다. 국면을 한 수에 뒤엎을 수 있는 '조커(鬼札)'가 보이지 않는 장소에 숨어있는 것이다.
이름높은 시즈코 군이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적에게 계속 압력을 줄 수 있다.
(시즈코의 속박을 풀어주면, 가신들은 일제히 협력을 요청하려 움직이겠지. 우선은 집안 싸움을 제어하는 수완을 보도록 하자)
일부러 시즈코를 자유롭게 풀어준 이유. 그것은, 이 자리에 모인 야심이 넘치는 가신들의 움직임을 볼 속셈도 있었다.
지금은 서로 견제하며, 입 밖으로 내지는 않지만 눈은 웅변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히데요시나 미츠히데, 그리고 시바타까지 어떻게 시즈코를 자기 진영으로 끌어들일까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그럼, 이 녀석들을 인도(舵取り)할 수 있을지 아닐지, 그에 따라 나라를 맡길 수 있을지를 알 수 있지. 시즈코를 미끼로 모두가 움직이고, 결과가 어떻게 되던 내게 손해는 없다. 후훗, 어떤 결과가 나올지(鬼が出るか蛇が出るか) 즐겨보도록 하지)
노부나가나 시바타들의 생각과는 별개로, 시즈코는 태평하게도 어떻게 문물을 보호할까 생각하고 있었다.
모두가 침착함을 되찾을 무렵을 재어 노부나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호쿠리쿠에 이어, 노부타다에게 토우고쿠(東国) 토벌의 총대장을 명했다.
이미 예전의 기세는 없다 해도, 아직까지 강국(強国)으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타케다(武田). 그리고 타케다나 우에스기에 필적한다고 하며, 아직까지 기치(旗幟)를 뚜렷하게 드러내지 않고 있는 호죠(北条).
원래대로라면 삼자가 서로 견제하여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三竦み)이지만, 우에스기를 받아들인 것으로 저울이 크게 오다 쪽으로 기울었다.
여기까지 밥상(お膳立て)을 차려놓으면, 노부타가가 후계자가 되는 데 어울리는 무훈(武勲)이면서도 목숨을 잃을 위험성은 현격하게 낮아진다.
"토우고쿠 정벌 임무, 삼가 받들겠습니다"
타케타다 호죠 등의 열강(列強)에 겁먹지 않고 노부타다는 당당한 태도로 명령을 받았다. 어엿한(一廉) 무장으로서의 편린(片鱗)을 보이기 시작한 노부타다에게, 노부나가는 미더운 듯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 후, 각자 준비를 게을리하지 말라는 노부나가의 말로 그 자리는 마무리되었다.
가장 먼저 시즈코에게 말을 건 것은 노부타다였다. 그는 용무도 끝났으니 얼른 퇴장하려고 하던 시즈코를 발견하고 다짜고짜 끌고들어왔다.
"간자를 빌려달라고?"
기선을 제압하여 용건을 말하는 노부타다에게 수상쩍다는 시선을 보내면서 그녀는 노부타다의 말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음. 앞서 토우고쿠 출신의 무장들을 받아들였지 않으냐? 뭐라고 했더라……"
"혹시 사나다(真田) 가문 말야?"
"그래그래, 그 사나다 뭐시기다. 빌리고 싶다고는 말했지만, 내가 운용하는 것은 아니다. 사나다 뭐시기가 지휘해서 소문을 흘려줬으면 한다"
"……어쩐지 노림수는 알겠는데, 네 입으로 정확하게 알려줬으면 하는데?"
소문을 흘린다는 시점에서 시즈코는 노부타다가 뭘 하고 싶은지를 헤아렸다.
노부나가는 대체로 말이 부족하여, 그의 마음 속을 헤아리는 것에 익숙해진 결과, 노부나가가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아도 의도하는 바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시즈코의 헤아림이 좋은 것에 안주하여, 노부나가는 시즈코 이외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애매한 지시를 내리게 되었다.
알아듣기 쉽게 차근차근 설명해달라는 것까진 바라지 않지만, 하다못해 필요 최소한의 지시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시즈코였다.
"노림수는 단순하다. 백성들의 마음을 타케다에게서 멀어지게 한다. 전쟁에서는 현지의 백성들이 협력적인지가 상황을 좌우하지. 원래부터 유리한 상황이기는 하나, 바로 그렇기에 더욱 우위를 흔들림없는 것으로 할 한 수를 강구하는 거지"
"적지에 침투하여 이반(離反) 공작을 하게 되면 시간이 상당히 걸리는데, 그건 고려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되겠지?"
"당연하지. 서두르지 않고 지긋하게, 철저하게 한다. 카츠요리(勝頼)가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더라도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거 아냐? 라고 의심을 품을 정도로 말이지"
노부타다의 작전은 단순하지만 효과가 높다. 기본적으로 무사는 아무 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작물을 키우는 백성의 마음이 떠나면, 아무리 군사력이 있더라도 전쟁이나 할 상황이 아니게 된다.
현저한 예로서, 역사적 사실에서의 '나가쿠테(長久手) 전투'에서의 이에야스(家康)의 행동이 있다. 이에야스는 각 마을의 촌장들에 대해 처자식을 인질로 바치게 하여 이케다(池田) 군과 내통하지 못하도록 대책을 취했다.
이것은 도쿠가와(徳川)-오다 노부카츠(織田信雄) 연합군이 현지 백성들로부터 미움받고 있던 것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백성들의 마음의 떠나면, 그에 따른 이적행위(利敵行為)를 막기 위해 더욱 가혹한 조치를 취해야 하게 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역사적 사실에서의 노부타다는 겨우 한 달 정도만에 카이(甲斐)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는데, 이것도 백성들이 카츠요리를 싫어하여 위정자(為政者)를 갈아치우기 위해 움직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백성들은 적극적으로 오다 군을 받아들여 타케다 군의 내정(内情)을 알려주고, 마을이나 논밭을 불태우면서까지 오다에게 항복했다.
민심이 떠난 것에 의해, 방어하는 측이 초토화 작전(焦土作戦)을 받는다는 굴욕적인 정세를 낳아, 단기 결판을 초래했다.
"거기까지 하게 되면, 카츠요리의 문제점을 찔러서 가신들에 대한 구심력(求心力)을 땅에 떨어지게 할 필요가 있네. 뭐, 지금도 이미 미움받고 있고, 타케다 가문의 가문(家督) 상속에 대한 교육도 받지 않아서, 후다이(譜代)의 신하들에게 얕보이고 있지…… 그런 의미에서는 조금 불쌍하네"
카츠요리가 걸어간 인생의 족적(足跡)을 알고 있는 시즈코는 그렇게 혼잣말을 했다. 타케다 신겐(武田信玄)의 4남이기는 하나 서자(庶子)였기에, 카츠요리는 형제들 중에서 유일하게 모친의 생가(生家)인 스와(諏訪) 가문의 성씨(名跡)를 이었다.
타케다라는 성을 쓸 수 없었기에 가신들로부터 계속 얕보여서, 성인이 된 후에도 타케다 가문 직계의 남자들에게는 반드시 주어지는 '신(信)'이라는 이름 글자를 받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 카츠요리가 큰 불만을 품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신겐이나 후다이의 중신들은 그것을 묵살했다.
신겐이 죽은 후 타케다 가문의 당주가 된 카츠요리였으나, 처음부터 임시(中継ぎ) 당주 취급이었다. 특히 카이 수호직(甲斐守護職)이나 대선대부(大膳大夫) 등의 관위(官位)가 카츠요리에게는 하나도 주어지지 않았다.
싸움에 있어서도 풍림화산(風林火山), 타케다비시(武田菱) 등의 타케다 가문을 상징하는 깃발의 사용도 금지당했다. 그렇기에 집안(一門) 사람들이나 친족들, 후다이의 중신들은 카츠요리를 더욱 얕보았다.
솔선하여 카츠요리의 말을 거역하고, 카츠요리의 정책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했다. 그 결과, 좋은 성과가 나오면 공을 자기 것으로 하고, 나쁘면 카츠요리 탓을 했다.
타케다 가문을 이어받는 교육을 받지 못한 채, 신뢰할 수 있는 참모나 심복을 얻지 못한 채, 타케다 가문을 이었다.
그 때문에, 스와 가문에서는 '타케다 사람'이라고 거리를 두고, 타케다 가문에서는 '스와 사람'으로서 한층 낮게 보여졌다.
형식상이라고는 해도 주군을 주군으로 생각하지도 않는 가신들을 규합하지 못하여, 신겐이 죽은 후의 타케다 가문의 몰락을 결정지은 우장(愚将)으로서 이름을 남겼다.
"선대(先代)가 위대했기 때문의 불우함에는 동정하지만, 봐주지는 않는다"
"……뭐, 그렇지"
역사적 사실 이상으로 가혹한 길을 걷기 시작한 카츠요리였으나, 그래도 타케다 가문을 이어받은 이상 손을 늦출 수는 없다.
타케다 가문을 쳐부수는 것으로 비로소 오다 가문은 무가(武家)의 정점에 섰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3년, 아니 2년일까? 호상(豪商)들에게도 타케다 가문이 정체를 숨기고 거래를 요청해 오겠지만 신경쓰지 말고 거래해도 좋다고 통지해둘게"
"그래서는 타케다가 힘을 되찾게 되어버리지 않을까?"
"어느 정도의 힘은 돌아오겠지. 하지만, 공을 서두른 카츠요리는 군비 확장을 강행하려고 하지 않을까? 그 군비를 사들일 자금은 어디에서 조달할 거라 생각해? 순리적으로 생각하면 영민들에게서 더욱 징수할 수밖에 없겠지. 지금의 타케다 가문의 전력으로는 타국을 침공할 여유 따윈 없으니까"
가능하다고 해도 국경 부근을 조금 빼앗는 정도가 한계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하면 약간의 이익과 맞바꾸어 타국의 원한을 살 뿐이다.
지금의 타케다 가문에는 영지(所領)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는 것 이외에 취할 수 있는 부흥의 길이 없다. 가능하다면 신푸 성(新府城)의 축성에 착수해줬으면 하고 시즈코는 바랬다.
신푸 성의 축성은 경제 부흥을 목적으로 한 공공사업이지만, 그 이익에 관여할 수 있는 사람은 한정적이라서 나라 전체로 이익이 재분배되는 구조가 아니다.
과도한 부담을 짊어지게 되어 영민들의 불만이 한꺼번에 폭발하면, 카이 곳곳에서 잇키(一揆)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었다.
"과연…… 확실히 방법이 없군. 뭐, 세세한 건 그쪽에 맡기겠다. 시즈코나 사나다 뭐시기가 좋다고 생각하는 방법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카츠요리에게서 멀어지게 해 줘. 나는 그 후의 통치에 대해 생각해 두겠다"
시즈코가 말하려는 바를 이해한 노부타다는, 내용을 확인하는 의미도 겸하여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타다와 헤어진 후, 이번에야말로 귀가하려고 한 시즈코였으나, 방을 나서자 곧장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시즈코 님, 잠시 시간을 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여어 시즈코, 잠깐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괜찮겠느냐?"
시즈코가 볼 때 오른쪽에서는 미츠히데가, 왼쪽에서는 히데요시가 말을 걸어왔다. 서로 상대의 존재를 깨달은 듯, 시즈코를 사이에 끼고 시선을 충돌시켰다.
""실은, 긴히 부탁할 것이……""
이거 번거로워졌네라고 시즈코가 생각하고 있을 때, 히데요시와 미츠데의 목소리가 깔끔하게 겹쳤다. 타이밍도 내용도 단어 하나하나까지 일치한 것에 서로 놀란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즉시 제정신이 들자 서로 불쾌한 듯한 표정을 떠올리며 상대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이 이상 순번 때문에 다투시는 건 사양하겠습니다. 여기서는 운을 하늘에 맡기도록 하죠. 주사위 숫자가 짝수라면 아케치(明智) 님, 홀수라면 하시바(羽柴) 님의 이야기를 먼저 듣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시즈코는 품에서 꺼낸 정육면체의 주사위를 던졌다. 주사위는 마루의 판자(板) 사이를 몇 번 굴러가며 맹장지에 부딪힌 후 움직임을 멈추었다.
히데요시도 미츠히데도 마른침을 삼키며 주사위의 숫자를 보았다. 나온 숫자는 '4(四)'였다. 자신이 먼저라는 것을 이해한 미츠히데는 득의만면해졌으며, 반대로 히데요시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의기소침해졌다.
"그럼, 아케치 님부터 말씀을 듣겠습니다. 이후, 하시바 님을 찾아뵙겠습니다"
"사전 연락(先触れ)은 필요없다. 그 쪽의 용무가 끝나는 대로 아무 때나 와도 상관없다"
하늘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히데요시는 의외로 순순히 물러났다. 미츠히데는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는 있었으나, 아마도 웃음이 짙어졌으리라.
"서서 이야기할 수도 없겠지요. 방을 준비해 두었으니, 그쪽으로 와 주시겠습니까?"
미츠히데가 직접 안내한 방은, 화려(華美)하지는 않으나 절묘하게꾸며진, 미츠히데답게 약간 멋을 부린 방이었다.
그러나, 세련된 자리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 몇 명, 좀 떨어진 아랫자리(下座)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시즈코는 깨달았다.
약간 경계하면서도 시즈코는 상석(上座)으로 안내되고, 그 등 뒤에 사이조(才蔵)가 서고, 어느 틈엔가 달려와 있던 케이지(慶次)가 사이조 옆에 앉았다.
"조금 복잡한 이야기가 됩니다. 미리,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우선 뒤에 있는 사람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이쪽은 쵸소카베(長宗我部) 님의 수군(水軍)을 맡고 있는 이케(池) 님입니다"
미츠히데에게 소개된 인물, 이케가 약간 앞으로 나서며 시즈코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소생, 쵸소카베의 신하, 이케 시로자에몬(池四郎左衛門)이라 합니다"
"아, 정중한 인사 감사드립니다(これは御丁寧に, ※역주: 일본에서는 흔히 쓰이는데, 굳이 우리말로 하면 '아이고, 이렇게 정중하게 인사해 주시다니' 정도의 뉘앙스). 저는 시즈코라고 합니다"
예기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시즈코는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대답을 해버렸다.
이케 시로자에몬 요리카즈(頼和). 이케는 원래 토사(土佐)의 영주이며, 당초에는 쵸소카베 쿠니치카(長宗我部国親)와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딸을 처로 맞은 이후에는 그 밑으로 들어가, 쵸소카베 수군의 주력을 맡게 되었다.
사카이(堺)와 활발하게 교역하여 쵸소카베의 재정을 뒷받침한 인물이기도 하다.
역사적 사실에서는 후에 아내와 불화가 생겨 모반의 혐의를 뒤집어쓰고, 그 당시의 주군인 쵸소카베 모토치카(元親)의 명령으로 자결하게 되었다.
"저희 주군을 위해 오랫동안 조력을 해주셨음에도 인사가 늦은 점을 사죄드립니다. 주군은 오다 님, 시즈코 님의 진력(尽力)에 대단히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건 다행입니다 (실험장으로 삼았다고 말하면 화내려나?)"
이케가 감사의 말을 했다. 그에 대해 시즈코는 표면적으로는 생긋 웃는 태도를 취하면서도, 내심 볼이 경련하는 느낌이었다.
역사적 사실에서는 토사를 통치하는 데 10년이 걸리고, 시코쿠(四国) 통일에 다시 10년이 소요된 쵸소카베가, 어떻게 12년이나 때를 앞당겨 시코쿠 통일을 앞두고 있는 것일까.
거기에는 몇 가지 우연과, 쵸소카베에게 기가막힌 행운이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노부나가가 상락했을 때, 쵸소카베 모토치카는 아직 토사 통일을 이루고 있지 못했다. 그 후, 1년 정도 노부나가의 동향을 지켜보고 있었으나, 갑자기 모토치카는 결단했다.
자주독립을 버려서라도,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는다. 최악의 경우 그 밑으로 들어가게 되어도 상관없다고 모토치카가 말했다. 당연히 가신들로부터는 반대의 목소리가 나왔으나, 그는 그것들을 전부 침묵시켰다.
하지만, 노부나가의 입장에서는 토사 한 나라조차 통일하지 못하는 모토치카와 동맹을 맺어봐야 전혀 이익이 없다.
첫번째는 만나보지도 못하고, 미츠히데에게 중재를 부탁한 두번째도 냉담하게 축객을 당했다.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각오를 한 모토치카는, 삼세번(三度目の正直)이라고 말하듯이 나라를 팔아넘기는 것 같은 조건으로 종속될 것을 청했다. 그래도 노부나가에게서 썩 좋은 대답은 듣지 못했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뭔가 생각하는 바가 있었는지, 시즈코를 참고인(引き合い)으로 내세워, 모토치카에게 그녀와 동맹을 맺도록 유도했다.
시즈코의 입장에서는, 모토치카가 노부나가에게 동맹을 요청한다는 것은 청천벽력이었다.
그러나, 쵸소카베의 취급을 둘러싸고 노부나가와 미츠히데가 반목하여 혼노지 사변(本能寺の変)이 일어났다는 설이 있는 것을 알고 있는 몸으로서는, 도저히 이것을 못본 척 할 수 없었다.
쵸소카베가 빠른 단계에서 시코쿠를 통일하는 것이 최종적으로는 오다 가문에게 이익이 될 거라 판단한 시즈코는, 시즈코에게 동맹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무엇이 어떻게 이익이 되는 것이냐?"
"쵸소카베 님의 거점인 토사는 시코쿠의 하부(下部)에 해당합니다. 큐슈(九州) 원정을 고려했을 경우, 해로(海路) 상의 보급지점으로서는 대단히 좋은 위치가 됩니다. 또, 그가 조기에 시코쿠를 정리하게 되면, 츄고쿠(中国) 지방의 모우리(毛利) 등에게 압력을 가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확실하게 주종관계를 확립하여 시코쿠에 교두보를 구축하면, 일본 통일을 향해 약진하기 위한 포석이 될 것입니다"
"호오, 제법 앞을 내다보고 있구나. 재미있다, 관리(差配)는 네게 일임하마"
시즈코는 현대에서 가져온 지도를 노부나가에게 보여주면서 전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확무비한 지형도가 그려진 지도 덕분도 있어, 노부나가도 시즈코가 이야기하는 이점을 시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세 번째에 이르러 쵸소카베는 노부나가의 신하가 되게 되었다. 국력적으로 오다 가문과의 동맹은 이룰 수 없었으나, 그래도 오다 가문 비장의 시즈코와의 동맹은 훗날 뛰어난 성과가 되었다.
단, 이 시점에서는 쵸소카베의 입장에 변화는 없다. 그 후, 시즈코의 중재로 사키히사(前久)가 움직여, 조정에서 시코쿠 통일의 윤지(綸旨)가 나왔다.
하지만, 조정이 인정했다고 해도 멀리 떨어진 시코쿠의 땅에서는 실제 효력 같은 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어디까지나 '조정으로서는 쵸소카베를 시코쿠의 대표로서 인정합니다'라는 정도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초, 노부나가는 쵸소카베에 대한 군사적인 지원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오다 포위망 때문에 여유가 없었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렇게까지 할 의리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노부나가의 태도를 정반대로 바꾸어버린 사건이 일어났다. 시코쿠에서 쵸소카베와 패권을 다투고 있는 미요시의 군이, 노부나가가 남만에서 수배한 화물을 실은 배를 격침시켜 버린 것이다.
그 배에는 노부나가가 고심 끝에 남만에서 사들인 각종 광석(鉱石)이 가득 실려있었다. 당초, 미요시 군은 쵸소카베가 사카이와의 교역에 이용하고 있는 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미요시는 노부나가의 역린(逆鱗)을 건드렸다. 노부나가가 다음 약진을 기하여 막대한 비용과 많은 시간을 들인 성과를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배가 격침당한 것을 알게 된 노부나가의 분노는 대단했다.
전국시대에 화물의 보험(保障) 같은 게 있을 리도 없고, 그보다도 방대한 시간을 들여 준비한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가 다음 한 수를 두기 위한 기회를 놓친 것에 격노했다.
노부나가는 즉각 미요시를 멸망시키려고 시코쿠로 침공하려 했기에, 그를 뜯어말리기 위해 많은 가신들이 적지않은 상처를 입었다.
파손된 기물도 많아, 맹장지의 경우에는 무사했던 것이 적었을 정도의 상황이었다.
연일 분노를 터뜨렸으나, 일전(一転)하여 냉정해지자 노부나가는 쵸소카베를 이용하여 미요시를 멸망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토사 통일조차 애를 먹고 있는 쵸소카베였기에, 기폭제가 필요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거기서 주목받은 것이, 오다 가문이 보유하고 있는 쿠키(九鬼) 수군이었다.
스크류 선을 시작으로, 시즈코로부터 다양한 기술 공여 끝에 근대화를 달성한 쿠키 수군이었으나, 해전(海戦) 자체가 없었기에 실전 경험이 거의 없었다.
노부나가는 쿠키 수군의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하기 위해, 미요시를 상대로 시험(試し斬り)을 해볼 생각이었다.
이리하여 쵸소카베에게 쿠키 수군이 파견되어, 토사 통일을 하기도 전에 미요시와 전쟁을 벌인다는 생트집 수준의 과제(無理難題)가 쵸소카베에게 떨어졌다.
가신들은 밀어닥친 재난에 비탄(悲嘆)했으나, 모토치카는 "이 정도의 무리도 할 수 없다면 시코쿠 통일은 불가능"이라고 정색하며 가신들을 설득한 후 미요시에게 싸움을 걸었다.
급조한 연합군이었기에 처음에는 밀리는 느낌이었던 쵸소카베 군이었으나, 도중부터 상황이 호전되었다.
미요시 군의 유능한 무장이 '때마침(都合良く)' 병사하고, 미요시 군의 주력이었던 아와지(淡路) 수군이 쿠키 수군의 압도적 화력 앞에 전멸하기 직전까지 간다는 대패를 맛보았다.
게다가 미요시 군의 보급로를 끊기 위해 긴 사정거리를 살린 대지 포격(対地砲撃)을 반복하여, 그들이 사용하는 항구를 하나도 남김없이 파괴했다.
이에 의해 바다로부터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 미요시 군이었지만, 항구를 파괴했다는 것은 쵸소카베 군도 해상에서 육지로 공격해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대의 양륙함(揚陸艦)에 가까운 수송선을 개발해놓았던 쿠키 수군은, 항구가 없어도 인원이나 물자를 실어날라 쵸소카베 군을 지원했다.
그러는 동안, 제 2차 오다 포위망이 시작되어 오다 가문의 상황은 어려워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예상을 뒤엎고, 미카타가하라(三方ヶ原) 전투에서는 신겐을 격파하고, 겨우 며칠만에 나가시마(長島) 일향종을 쳐부쉈다.
이 급격한 전개에 쵸소카베 이외의 시코쿠의 영주들은 마음 속 깊이 두려움에 떨었다.
특히 미요시의 편을 드는 세력의 동요는 현저했다. 그에 반해 쵸소카베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정치적 책략(調略)과 무력을 번갈아 섞어가며 세력을 늘렸다.
지금은 시코쿠에서 쵸소카베를 다르지 않는 것은 미요시 세력만 남은 상태로, 다른 영주들은 모두 쵸소카베 모토치카에게 굴복했다.
"(파죽지세라는 건 이런 걸 말하는 거겠지) 자, 단지 인사만 하시려고 오셨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제게 어떤 용무이신가요?"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시즈코는 이케에게 다음 말을 재촉했다. 단순히 면회만 할 거라면 지금까지도 기회는 있었다.
그러지 않고, 지금 이 자리에서 미츠히데가 자리를 마련한다는 것은, 뭔가 중대한 이야기가 있는 것이라고 시즈코는 추측했다.
"옛. 혜안이 놀라우십니다. 실은 대단히 뻔뻔스러운 이야기입니다만, 시즈코 님께 긴히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부탁?"
시즈코의 질문에 이케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그는 의외의 부탁을 말했다.
"실은…… 이 이상의 지원을 사양하고자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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