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 미녀 고생담

戦国小町苦労談


작가: 夾竹桃


어느 날, 한 명의 소녀가 전국시대로 타임슬립했다.

그야말로 신의 변덕, 악마의 심심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뜬금없이.


소녀는 세계를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디에나 있는 극히 보통의, 그리고 평범하고 수수한 소녀였다.

그런 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다.


전국 시대를 살아남는다 - 그것 뿐이다.





번역: 가리아



에이로쿠(永禄) 11년, 상락(上洛)



049 1568년 8월 중순



그 이후에는 특별한 이벤트도 없었고, 또 오다 군은 롯카쿠 군으로부터 기습을 받지도 않고 평온무사하게 다음 날을 맞이했다.

오다 군 4만에서 5만 정도, 도쿠가와 군 1천 정도, 아자이 군 3천 정도, 총 6만에 가까운 상락군.

그에 대해 본진의 칸온지 성에 당주 롯카쿠 요시하루(六角義治), 요시하루의 아버지인 요시카타(義賢), 그리고 요시하루의 동생인 요시사다(義定)와 정예 호위대 1천 기, 미츠쿠리 성에는 강하고 용감한 것으로 알려진 요시다 시게미츠(吉田重光), 타케베 히데아키라(建部秀明), 코마 슈리노스케(狛修理亮), 요시다 신스케(吉田新助)를 필두로 한 3천여명, 그리고 와다 산성에 타나카 지부노다유우(田中治部大輔) 등을 대장으로 하는 6천여명을 배치한 총 1만 정도의 롯카쿠 군이었다.

숫자만 놓고 보면 롯카쿠 군은 상락군의 반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와다 산성을 공격하면 배후를 미츠쿠리 성에게 잡히고, 본진인 칸온지 성을 공격하면 와다 산성과 미츠쿠리 성으로부터 협공을 받는다.

미츠쿠리 성이 있는 미츠쿠리 산은 표고 3백 미터 정도의 작은 산이지만, 성으로 통하는 길은 급경사의 외길밖에 없는데다, 그 주위가 큰 나무로 뒤덮힌 천연의 요새다.


미츠쿠리 산은 두 곳의 정상을 가지며, 그 중 하나인 북쪽 정상에 미츠쿠리 성이 있다.

북쪽의 미츠쿠리 산에서 북서쪽으로 칸온지 산(현재는 키누가사(繖) 산이라고 한다)이 있으며, 칸온지 성이 있다.

그리고 칸온지 산에서 동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아이치 강과 다이도(大同) 강의 합류점의 서쪽에 위치하는 표고 180m 정도의 와다 산, 그 산꼭대기 부근에 와다 산성이 있다.

와다 산성은 50m x 100m 정도의 성역 주위에 흙성을 둘러, 남쪽에서 마출곡륜(馬出曲輪, ※역주: 일본 성의 특정 구조를 가리키는 용어, 이후의 주곡륜, 노대도 마찬가지로, 자세한 내용은 http://underzero.net/html/casl/cas_m_a.htm 등을 참조), 주곡륜(主曲輪)이 연이어 배치되어 있고, 게다가 주곡륜 뒤쪽에 10m x 10m 정도의 노대(櫓台)가 배치되어 있다.


미츠쿠리 산과 칸온지 산은 코토(湖東) 평야, 즉 오우미 분지(近江盆地)에 있는 산이다.

그리고 두 개의 산 사이에는 좁고 험한 길이 형성되어 있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현대에는 국도 8호선, JR 비와코선, 및 신칸센이 키누가사 산과 미츠쿠리 산 사이를 지나고 있다.

이 루트를 장학하기 위해서 롯카쿠 씨가 칸온지 산에 본성, 그리고 미츠쿠리 산에 지성을 쌓은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긴 세월에 걸쳐 쌓아올린 방위선에 롯카쿠 씨 당주 롯카쿠 요시하루는 절대적인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불행이 닥쳤다.

그것은 그가 절대적인 자신을 가지고 있는 방위망, 및 이번의 작선이나 인원의 배치, 옛 방식에 따라 도주하는 루트 등, 대부분의 군사 관계 정보들 중 기록에 남아 있는 것들…………은, 모두 노부나가와 그의 주요 부하들에게 알려져 있는 점이다.


"롯카쿠 따위에게 책략을 부릴 필요는 없다. 우리가 가진 힘으로 놈을 유린하라"


노부나가가 선언하는 것과 동시에, 칸온지 성 전투의 막이 올랐다.


이른 아침부터 전투를 개신한 오다, 도쿠가와, 아자이 3군은, 아이치 강을 건넌 후 세 부대로 나뉘었다.

이나바 요시미치(稲葉良通)가 이끄는 제 1대가 와다 산성, 시바타와 모리 요시나리가 이끄는 제 2대가 칸온지 성, 니와, 히데요시, 그리고 노부나가가 이끄는 제 3대가 미츠쿠리 성으로 향했다.

싸움은 미츠쿠리 성에서 시작되었다. 북쪽 입구에서 히데요시가 이끄는 2천 3백명이, 동쪽 입구에서 니와가 이끄는 3천명이 공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미츠쿠리 성은 급경사나 큰 숲에 둘러싸인 견고한 성. 그리고 요시다(吉田) 이즈모노카미(出雲守隊) 대의 수비도 굳건하여, 히데요시와 니와는 고전을 강요받고 있었다.

그 동안, 노부나가는 뭘 하고 있었는가. 그것은 미츠쿠리 성으로 이어지는 외길의 봉쇄였다.

미츠쿠리 성으로 이어지는 길은 하나밖에 없고, 그 이외에는 거목으로 뒤덮여 있거나 경사가 급한 짐승이나 다니는 길이거나 했기에 통상의 군사행동을 수행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즉 외길이 봉쇄되면 미츠쿠리 성에 있는 수비대는, 조직적인 철수는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산기슭에 세 군데, 그리고 길 위에 네 군데의 봉쇄를 마친 노부나가는, 어떤 것이 들어있는 항아리를 대량으로 운반해 왔다.

어느 정도의 숫자가 모이자, 병사들은 그것을 성을 향해 던져넣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항아리가 깨지고, 내용물이 주위에 튀었다.

노부나가가 항아리에 넣은 것, 그것은 알코올 도수가 60도를 넘는 액체였다. 술이라기보다 위험물에 해당하는 그것을, 노부나가는 계속 성 안으로 던져넣게 했다.

요시다 이즈모노카미 대는 노부나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여, 곤혹스러워하면서도 히데요시 대나 니와 대를 상대했다.

이윽고 일부 바닥에서 작은 물구덩이가 생길 정도로 던져진 알코올이, 주위의 열기에 반응하여 조금식 증발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미츠쿠리 성에 경고 피리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에 호응하듯이 히데요시 대와 니와 대가 공격을 멈추고 재빠르게 철수했다.

그들의 행동이 하나도 이해되지 않아, 가벼운 패닉 상태에 빠진 요시다 이즈모노카미 대는, 그 자리에 멍하니 멈춰서 있었다.


그것이 그들의 운명을 결정했다.


한 대의 불화살이 성으로 쏘아졌다. 그것이 기화한 알코올에 닿은 순간, 세계는 일변했다.

순식간에 미츠쿠리 성이 불바다로 뒤엎였다. 그 상황에 이해가 따라가지 못한 요시다 이즈모노카미 대였으나, 현 상황을 인식할 수 있게 된 순간, 패닉이 병사들을 휘감았다.

만약 그들이 알코올은 연소 속도는 빠르지만, 순발력 뿐이지 지속력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면, 또 다른 미래가 펼쳐졌으리라.

하지만 그들은 주위가 단번에 불바다에 뒤덮여, 어디로 도망쳐야 안전한지 방향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허둥댔다.

그것이 패닉의 전염에 박차를 가했다. 짧은 시간에 그들은 집단 패닉 상태가 되어, 요시나 이즈모노카미 대는 궤멸되었다.


애초에 롯카쿠 군은 롯카쿠 가문 당주인 롯카쿠 요시하루가 그릇도 재능도 없는 주제에 자존심만 높아서 거드름피는 태도로 명령만 했기에 사기가 낮았다.

그런 그들이 불바다가 된 미츠쿠리 성을 지킬 리가 없었고, 무구류를 내던지고 앞다투어 도망쳤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도주조차 용납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을 사냥하기 위한 준비를 마친 오다 군이, 성으로 이어지는 외길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츠쿠리 성 함락. 그것은 성이 공격받은지 겨우 6시간 후의 일이었다.

반나절 정도에 미츠쿠리 성이 함락된 것에 롯카쿠 군, 특히 현 당주인 롯카쿠 요시하루는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와다 산성과 칸온지 성, 그리고 미츠쿠리 성을 동시에 공격받았지만, 앞의 두 곳에서는 유리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대로의 기세로 간다면 상락군을 되밀어내는 것도 가능,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달랐다.

상락군은 성에서 그들을 끌어내기 위해, 또 미츠쿠리 성의 상황을 의식하게 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밀리는 연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기가 서투른 자들도 있었기에, 어딘가 어색한 느낌으로 싸움에 지는 것을 연기하고 있던 상락군이지만, 승산이 있다는 것에 눈이 먼 롯카쿠 군은 그 어설픈 연기를 꿰뚫어보지 못했다.


다행히도 요시하루는 칸온지 성에 있었지만, 책략에 넘어간 그의 아버지와 동생은 호위대 7백을 이끌고 성을 나서 버렸다.

다급히 아버지와 동생에게 칸온지 성으로 돌아올 것과, 와다 산성에 농성해서 버티도록 전령을 보냈다. 하지만 돌아온 전령이 가져온 정보는 그를 절망에 빠뜨리는 내용 뿐이었다.


"마, 말도 안 돼……! 내 정예 호위대가 전멸, 게다가 아버지와…… 동생이 전사했다고!"


정예의 호위대 1천 기 중, 7백이나 되는 호위대가 전멸. 게다가 그 7백을 끌고 나간 아버지 요시카나와 동생 요시사다는 전사했다.

게다가 와다 산성은 미츠쿠리 성이 함락된 것으로 거의 와해되어 버렸다. 잡병들은 물론이고, 무장들도 무구를 버리고 앞다투어 도망쳤다.

요시하루는 겨우 반나절 만에 미츠쿠리 성과 와다 산성을 잃었다. 해가 완전히 지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게다가 지금의 계절은 여름, 가을이나 겨울에 비해 낮이 길다.

그 시간을 겨우 2백여 정도의 호위대로, 1만을 넘는 상락군을 상대해야 한다. 그 사실을 이해한 순간, 요시하루는 무릎을 찧으며 무너져내렸다.


"어, 어째서냐, 어째서 이렇게 상락군에게 유리한 일만 일어나는 것이냐!!"


분통을 터뜨리는 어린애처럼, 그는 바닥을 양손으로 두들겼다. 하지만 이러고 있는 와중에도 상락군은 칸온지 성을 노리고 있다.

와다 산성과 미츠쿠리 성에 비해, 칸온지 성은 방어가 약하다. 이미 촌각을 다툰다는 점을 깨달은 그는, 옛부터의 예를 따라 코우가(甲賀)로 도망친다는 판단을 내렸다.

원래는 야음을 틈타 이동할 필요가 있지만, 그 때까지 칸온지 성이 버틸 가능성은 낮다.

요시하루는 도망칠 것을 측근에게 전하고, 서둘러 준비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칸온지 성에서 도망치기 위한 비밀통로는 몇 개나 준비되어 있었다.


"다들, 각자의 장소로 도망쳐라. 나는 코우가 방면으로 가겠다"


그 말만 하고 그는 호위대 중에서도 가장 신뢰하고 있는 자들 20여명을 이끌고 도주 루트 중 하나를 이용해 칸온지 성에서 탈출했다.

어두컴컴하고 좁은 비밀 통로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멀리서 승전보 같은 목소리가 요시하루의 귀에 들어왔다.

원통하다는 표정으로 비밀통로의 입구를 노려본 후, 그는 숨을 죽이고 비밀통로를 걸었다. 한동안 걷자 산 속의 나무들로 숨겨진 출구에 도착했다.

경계하면서 호위대 중 한 명이 비밀통로에서 기어나갔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사람 그림자는 없고, 멀리서 상락군의 목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안전하다고 판단한 호위대가 신호를 보냈다. 잠시 후 호위대 20여명과 요시하루가 비밀통로에서 기어나왔다.

의복의 먼지를 털어낸 후 요시하루는 코우가 방면을 향해 이동했다.


"도망칠 방향은 이쪽이다. 가자"


그렇게 말하며 맨 앞을 걷고 있던 요시하루였는데, 몇 발자국 걸었을 때 갑자기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갑작스런 일에 호위대는 웅성거리면서 요시하루를 찾았다. 나무들이 스치는 소리에 위를 올려다본 호위대는, 땅으로 떨어지고 있는 요시하루를 발견했다.

그는 트랩에 걸려, 하늘로 던져졌던 것이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몇 번 난 후,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요시하루는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물론, 트랩은 요시하루로만 끝나지 않았다. 망연자실 상태였던 호위대에게도 덮쳐갔다. 앗 하는 사이에 호위대는 전멸하고, 살아남은 것은 요시하루 뿐이었다.


"뭐, 뭐…… 가……"


"설마 롯카쿠 가문 당주께서 스스로 맨 먼저 함정에 걸려서 부하들에게 모범을 보이시다니, 선도자(露払い)를 세울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서두르신 것이오?"


요시하루는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눈만 움직였다. 타키카와와, 그가 이끌고 있는 닌자 집단이 자신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것이 보였다.


"어째서……"


비밀통로의 출구가 알려진 것, 이 장소에서 자신이 나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 미리 함정을 설치해둔 것, 등 다양한 의문을 떠올리며 요시하루는 입을 열었다.

그러나 타키카와는 요시하루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사무적인 말투로 짧게 말했다.


"편하게 해 줘라"


그것이 남 오우미를 지배하고 있던 롯카쿠 가문의 당주, 롯카쿠 요시하루가 이 세상에서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남 오우미에서 벌어진 상락군과 롯카쿠 군의 전투, 칸온지 성 전투(또는 미츠쿠리 성 전투)는 겨우 하루 만에 결판이 났다.

오다 군은 천 명 정도의 피해, 도쿠가와 군은 수십명의 피해, 아자이 군은 300명 정도의 병사의 피해, 나가마사의 가신 와키자카 야스아키라(脇坂安明)가 전사했다.

이에 대해 롯카쿠 군은 롯카쿠 가문 당주 요시하루, 아버지 요시카타, 그리고 동생인 요시사다는 전사. 정예 호위대 1천 기는 전멸, 롯카쿠 가문을 떠받치고 있던 유력한 무장들은 대부분이 전사했다.

병사는 4000 정도의 피해, 4500이 도망, 남은 병사들은 최후까지 주군과 함꼐, 라는 등의 기특한 마음가짐은 없었고, 전에 아군이었던 자들의 시체에서 장비를 강탈하는 상황이었다.

칸온지 성, 와다 산성, 미츠쿠리 성은 폐성, 나머지 무사한 지성들도 롯카쿠 가문의 노신(老臣)인 가모 카타히데(蒲生賢秀)가 지키는 히노(日野) 성 이외에는 대세가 결정된 그 날에 상락군에 항복한다는 참담한 결말을 맞이했다.

그 히노 성도 뒷날 오다 가문의 무장 칸베 토모모리(神戸具盛)가 단신으로 히노 성으로 들어가서 가모 카타히데를 설득했다. 어째서 그에게 이런 일이 가능했느냐 하면, 그것은 토모모리의 아내가 카타히데의 여동생이었기 때문이다.

토모모리의 설득에 응한 카타히데는 항복했고, 친아들을 바치고 노부나가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 때의 친아들이, 노부나가의 딸인 후유히메(冬姫)를 아내로 맞이한 카모 우지사토(蒲生氏郷)이다.


"그래서, 겨우 하루 만에 함락되었는데, 이건 상대가 도망칠 생각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본진 대기를 명령받은 키묘마루, 나가요시, 시즈코 등 세 명. 따분함을 견디지 못하고 있던 키묘마루와 나가요시는, 롯카쿠가 하루 만에 무너진 이유를 생각하고 있었다.


"내일이나 모레에는 쿄(京)인가……"


"그 전에 롯카쿠다. 무너진 원인, 그걸 생각하는 것이 무장으로서의 역할이랄까"


"그래…… 뭐 열심히 해. 나는 딱히 무장이 아니니까. 애초에, 그건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전통적인 전술이니까"


"잠깐, 그렇게 간단히 결론짓지 마라. 너라면 뭔가 자세히 알고 있겠지? 영주님께서도 이것저것 물으셨다고 하니까"


"때로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도 중요해"


어떤 명장이라도 하루 만에 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노부나가의 '하루 만에 결판을 낸다'라는 생각과, 롯카쿠의 '상황이 나빠지면 철수'라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전술이 일치한 결과, 칸온지 성 전투는 하루 만에 결판이 난 것이다.

애초에 요시하루는 장기전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겨우 하루 만에 철수를 선택하게 된 상황이 된 것은 그에게도 예상 밖이었으리라.


"지금 상태로는 아무 것도 모르겠어.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걸 줘"


"음―, 뭐 그거라면 괜찮으려나"


자신이 하나부터 열까지 설명하면, 키묘마루와 나가요시에게서 사고하는 능력을 빼앗아 버린다. 그렇게 생각해서 시즈코는 일부러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힌트 없이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그녀는, 큼직한 종이에 힌트가 되는 정보를 적어나갔다.


종이의 중앙에 롯카쿠라고 쓴 후, 비와 호(琵琶湖, 오우미 해(近江海)라고도 부른다), 후와노세키(不破関, 미노(美濃)), 아라치노세키(愛発関, 에치젠(越前)), 키몬슈고(鬼門守護, 히에이 산(比叡山)), 그리고 코우가(伊勢)를 써넣었다.

롯카쿠 글자 옆에 '쿄시키(京職, 쿄(京)의 치안 유지)'와 '케비이시(検非違使(조정 경찰))'을 써넣은 후, 그 종이를 키묘마루 앞에 놓았다.

두 사람은 사이좋게 그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이 두 사람, 어느 틈에 사이가 좋아졌지?)


나이가 비슷한 탓일까, 라고 생각하며 시즈코는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이 배치를 보면, 롯카쿠의 세수(税収)는 비와 호에 의존하고 있군"


"그렇게 되면 북 오우미의 아자이와 적대한 것은 롯카쿠에게는 심한 타격이라는 건가"


"아니 잠깐. 그것만으로는 도망친다는 선택지가 되지 않아. 롯카쿠에게 불리한 것…… 분명히 문헌인가 뭔가에서 후와노세키와 아라치노세키, 그리고 스즈카노세키(鈴鹿関)는 삼관(三関)이라고 부르고 있었지. 생각할 수 있는 건, 후와노세키도 오다 영토가 되었기에, 처음부터 도망을 계산에 넣고 있던 게 아닐까?"


"아자이 가문에겐 배신당하고, 사이토(斉藤) 가문은 멸망하고, 그 대신 미노를 지배한 오다 가문과는 적대…… 흠, 롯카쿠의 '불리해지면 철수'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전술이라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군"


(오오, 좋은 포인트를 잡았네. 뭐어 롯카쿠는 '강자'에 기생하는 타입이니까, 처음부터 싸울 생각 따위 없었다고 생각해)


롯카쿠가 사는 남 오우비는 비와 호와 3대 방위 거점(히에이 산, 후와노세키, 아라치노세키)으로 보호받는 땅이다.

세수도 비와 호와 3대 방위 거점에 기생하고 있다. 하지만 땅의 태반이 비와 호라는 입지상, 보유할 수 있는 병사는 항상 소수다.

동원 병력은 많이 잡아도 1만 전후 정도. 그런 상태의 롯카쿠는 기생할 곳이 히에이 산, 후와노세키와 아라치노세키, 비와 호의 상인연합 등 복수가 존재하고 있었기에, 롯카쿠 자체가 분열되어서 단합력이 없다.


남 오우미는 대대로 종종 큰 싸움의 장소가 되기 때문에, 대군이 밀어닥치면 숨어서 지나가길 기다리고, 전화(戦火)가 사그러들때까지 몸을 숨기는 수단이 롯카쿠 군의 상투 수단으로 변했다.

관문(関所), 또는 히에이 산이 뚫리면, 그들은 손 쓸 방법이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기 때문에.

덤으로 쿄로 올라가려고 하는 영주들은 대부분이 수만의 대군으로 밀고들어오며, 기백도 군비도 롯카쿠 군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상하군. 어째서, 롯카쿠 가문 당주는 처음부터 도망칠 태세를 취하지 않는 거지? 상락군은 약 5만, 그에 대해 놈들이 동원할 수 있는 병사들의 숫나는 1만 정도. 옛부터의 예를 따른다면, 처음부터 상락군을 통과하게 하고 몸을 숨겨야 할텐데"


"내게 말해도…… 단순히 당주가 상황 파악조차 할 수 없는 멍청이였던 게 아닐까?"


"아무래도 그건 아니겠지. 첫째 날의 상황에서 금후의 예정을 생각했던 걸까?

그렇다면 반나절만에 미츠쿠리 성이 함락된 것이 롯카쿠에게는 예상 밖이었다는 건가"


"으―음, 역시 내게는 단순하 멍청이로밖에 생각되지 않는군. 듣자하니 농성하고 있어야 할 칸온지 성에서 병사와 다수의 무장이 나왔잖아? 평범하게 생각하면 농성 중에 병사를 내보내다니 바보 이외의 무엇도 아닌데……"


그 후에도 두 사람의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거의 처음 만나는 것에 가까운 두 사람인데, 어째서인지 시즈코에게는 문경지교(刎頸之交)라고 해야 할 만한 굳건한 인연으로 맺어진 듯 보였다.


"그러고보니 미츠쿠리 성에서 화공을 했는데, 불씨를 어떻게 운반한 걸까"


"응? 그건 이걸 쓴 거라고 생각해"


나가요시의 말에 시즈코는 파이어 피스톤을 꺼내면서 대답했다.

두 사람은 사이좋게 그녀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그리고 동시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들이 보기에는 파이어 피스톤은 단순한 나무 막대기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므로, 당연한 반응이다.


"남만에서 쓰이고 있는 불피우는 도구의 일종이야. 우리 집에서 제일 오래 쓰고 있는 것은 아야 짱이려나?"


나무 막대기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불씨를 만들 수 있다고 해봤자 두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시즈코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그들의 앞에서 불피우기를 실제로 해 보였다. 작은 천쪼가리가 앗 하는 사이에 불씨로 변하자 두 사람은 나란히 경악했다.


"이런 도구가 있다니. 하지만 확실히 이거라면, 일부러 불씨를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어. 크기도 지나치지 않으니, 숨기는 것도 가능하겠군"


"만드는 것도 작은 칼 하나면 되니까. 세 개 만들었는데 영주님이 전부 가져가셨어"


"당연하지, 멍청아. 불씨를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 는 게 얼마나 유리한지 모르는 거냐"


불씨는 불씨를 보관하는 전용 장인이 있을 정도로, 전국 시대에는 귀중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히이레(火入れ, ※역주: 불씨를 보관하는 작은 그릇)라는 전용의 도구를 준비하여, 아궁이로 불을 유지하는 등의 연구를 하여 불씨를 계속 유지해 왔다. 그 정도로 불피우기는 힘든 작업인 것이다.


"하여튼, 시즈코에게는 항상 놀라는군"


"그렇군. 그런 편리한 도구가 있다면 더 일찍 내놓았어야지"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은 사이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관계가 이후로도 좋은 관계로 계속되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었던 시즈코였다.




6월 30일.

앗 하는 사이에 남 오우미를 평정한 노부나가는, 곧장 후와 미츠하루(不破光治)를 요시아키가 있는 곳으로 보내어 입락(入洛)의 준비를 하게 했다.

그로부터 열흘 후인 7월 10일, 요시아키는 쿄를 향해 출발한다. 7월 15일, 노부나가는 미이데라 고쿠라쿠인(三井寺極楽院, 시가(滋賀) 현 오오츠(大津) 시)으로 진을 옮겼다.

다음 날, 노부나가는 미이데라 고쿠라쿠인에서 요시아키를 맞이했다. 그리고 7월 17일, 노부나가는 드디어 쿄에 입성한다.


노부나가가 토우후쿠지(東福寺)에 진을 치자, 선진(先陣)인 시바타 카츠이에, 하치야 요리타카(蜂屋頼隆), 모리 요시나리, 사카이 마사히사(坂井政尚)의 군은 카츠라(桂) 강을 건너, 우선 사전 연습삼아 세이류지(青竜寺, 勝竜寺(쇼우류지)라고도 한다)에 있는 미요시 3인방 중 한 명인 이와나리 토모미치(岩成友通)를 공격했다.

미요시 세력은 저항했으나 곧 농성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노부나가의 승리에 안심했는지, 요시아키도 쿄에 있는 키요미즈데라(清水寺)에 들어갔다.


다음 날, 노부나가의 본진이 출진해오자 이와나리 토모미치는 단념하고 항복했다. 그 후에도 노부나가는 손을 멈추지 않고, 미요시 측의 성을 차례차례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아쿠타가와(芥川) 성의 호소카와 아키모토(細川昭元), 미요시 나가야스(三好長逸)는 변변한 저항도 하지 못하고 퇴거했고, 코시미즈(越水) 타키야마(滝山) 성의 시노하라 나가후사(篠原長房)도 성을 버리고 퇴거했다.

텅 비게 된 아쿠타가와 성에 요시아키는 입성했다.

그 동안 오다 군은 이케다 카츠마사(池田勝正)의 거성인 이케다(池田) 성을 공격했다. 하지만 여기만큼은 다른 성과 달리 저항이 격렬하여, 오다 군은 전사자가 다수 나오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저항하는 이케다 카츠마사도 압도적인 힘을 자랑하는 오다 군 앞에 이윽고 항복하고, 노부나가에게 인질을 바쳤다.

미요시 3인방과 대립하고 있던 미요시 가문 당주 요시츠구(義継) 진영의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는, 최고급의 다기(茶入れ)인 '츠쿠모가미(九十九髪)'를 노부나가에게 헌상하고 그의 부하가 되었다.


상락군은 상락 후 겨우 며칠만에 키나이(畿内) 및 주변의 나라들을 지배하에 두었다.

압도적인 쾌진격을 계속한 노부나가였으나, 여기서 상락군에 어떤 문제가 드러났다. 아자이 군의 사기가 저하한 것이다.

오다 군은 병농분리(兵農分離)를 하고 있었기에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도쿠가와 군과 아자이 군은 백성들을 잡병으로 징용하고 있다.

따라서 아자이 군의 잡병들은 논밭의 상황이 신경쓰여 견딜 수 없었기에, 거의 마음이 딴 데 가 있었다.


원래는 농번기 이후였을 상락 예정을, 무리하게 단축시켜 7월 전으로 가져온 것은 다름 아닌 노부나가였다.

따라서 그는 아자이 군의 사기 저하에 대해 한 마디도 불만을 말하지 않고, 반대로 나가마사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며 그의 몸 상태에 신경썼다.

행인지 불행인지, 그 노부나가의 태도에 나가마사는 좋은 인상을 받았다.

지금은 아직 현저하지는 않지만, 도쿠가와 군도 곧 사기가 저하할 거라고 생각한 노부나가는, 7월 20일에 상락군을 해산했다.


금후의 일은 노부나가에게 일임한다, 는 요시아키의 언질을 받은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와 나가마사의 귀국을 전송한 후, 곧장 행동에 나섰다.

요시아키가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이 되려면 천황의 칙령으로 임명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부나가가 조정과 교섭을 할 필요가 있다.

그 교섭을 하고 있는 동안, 요시아키가 아쿠타가와 성에서 혼코쿠지(本国寺, 本圀寺)로 옮기거나, 헌상품을 가지고 인사하러 온 이마이 소우큐(今井宗久)나 그 외의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거나 하는 등, 노부나가는 이런저런 일로 정신없이 바빴다.

그리고 키나이를 평정한 후 대략 3주일 후인 8월 12일, 요시아키는 황궁(内裏)에 입궐(参内)하여 정이대장군에 임명되었다.

여기에 무로마치(室町) 막부(幕府) 최후의 쇼군이 되는 제 15대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탄생했다.


요시아키를 쇼군의 자리에 앉힌 노부나가는, 그의 허가를 받아 키나이의 인사에 착수했다.

요시아키 휘하의 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藤孝)를 쿄(京) 산성(山城)에 배치하고, 마찬가지로 요시아키 휘하의 와다 코레마사(和田惟政)를 셋츠(摂津) 타카츠키(高槻) 성에 넣었다.

셋츠에 있는 그 밖의 성에 배치한 인원은 이타미(伊丹) 성에 이타미 타다치카(伊丹忠親), 이케다(池田) 성에는 이케다 카츠마사(池田勝正)다.

카와치(河内)에 있는 성은 와카에(若江城) 성에 미요시 요시츠구(三好義継)、타카야(高屋) 성에는 하타케야마 타카마사(畠山高政)、그리고 야마토(大和)에는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를 배치했다.


노부나가는 자신에게 항복한 요시아키 휘하 이외의 무장, 즉 옛 미요시 계 무장들이 가진 영지의 소유권을 인정해주었다.

이것은 미요시 3인방과, 미요시 가문 당주 요시츠쿠 및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대립으로 내부 분열을 일으켜 노부나가에게 항복한 대부분이 무장들이 미요시 3인방 반대파였기 때문이다.

노부나가에게는 그들의 영지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으로 미요시 3인방의 세력을 뭉개고, 나아가 미요시 3인방 반대파와의 적대를 피하려는 속셈이 있었다.

약간 요시아키의 의도도 들어가 있었지만, 그건 정말 새발의 피 정도였다. 그걸로 요시아키는 만족했기 때문에, 정말 멍청한 쇼군이시라고, 책략을 쓴 노부나가는 어이없어할 수밖에 없었다.


인사를 마친 노부나가는, 다음으로 영지 내의 관문과 조합(座)을 폐지했다. 이것은 쿄의 민중들의 지지를 얻고 치안을 회복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다.

예상대로 쿄에 사는 민중의 대부분이 노부나가의 정책을 지지했다. 민중의 지지를 얻은 노부나가는 추가적인 개혁을 시행했다.

쿄의 치안을 회복하고 유지하기 위해, 노부나가는 자신의 병사를로부터 5천 명 정도를 모아서 '쿄 치안유지 경라대(警ら隊)'를 결성했다.

경라대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시즈코가 기술자 집단의 마을에서 실시했던 경찰 시스템을 유용한 것 뿐이다.

하지만 이 경라대, 노부나가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수준으로 민중에게 침투했다.


경라대는 쿄의 정식 직함을 가진 집단은 아니지만, 노부나가의 정규군인 것에 변함은 없다.

따라서 범죄자들은 그들에게 손을 댈 수 있을리 없었기에 도망치듯 쿄에서 나갔다.

범죄자가 없어진 결과, 경범죄를 포함하는 사건은 눈에 보이게 줄었다. 치안의 회복과 함께 경라대는 민중들에게 환영받았다.


치안 회복과 인사 등을 포함하여 요시아키는 노부나가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능악(能楽, ※역주: 일본의 가면 음악극)을 열었다. 이 때, 요시아키는 호소카와 후지타카나 와다 코레마사 등을 사자로 삼아, 노부나가를 부 쇼군(副将軍)이나 관령(管領) 직에 임명하려고 생각했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신참자인 제가 부 쇼군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쿄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맡아야 합니다'라고, 요시아키의 자존심을 자극하지 않도록 배려하며 거절했다.

대신 원래는 능악의 연주곡을 5번까지 줄이려고 했던 노부나가였으나, 사죄라는 형태로 13번까지 요시아키와 함께 관람했다.

부 쇼군을 사퇴하는 이유, 그리고 좋은 사교성에 요시아키는 물론이고 많은 사람들이 감탄했다.

물론, 일부러 쇼군인 요시아키와 시간을 보낸 것은, 노부나가가 부하에게 비밀리에 명한 것이 알려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지만.




시간을 조금 거슬러올라가서, 요시아키가 쇼군이 되고 '쿄 치안유지 경라대'가 결성되었을 무렵, 시즈코는 쿄의 거리를 산책하고 있었다.

함께 한 것은 케이지와 사이조, 그리고 나가요시, 카이저와 쾨니히였다. 그녀가 노부나가에게 명령받은 임무는, 장인을 많이 기후(岐阜)로 보내는 것이다.

현대에서 말하는 스카웃이다. 그와는 별개로, 시즈코는 쿄에 있는 책을 사들이며, 현대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문화재를 구경하고 있었다.

구경한 문화재는 건조물, 회화, 조각, 공예품, 서적(書跡, ※역주: 여기서는 유명한 서예가나 승려가 쓴 글을 말함), 전적(典籍, ※역주: 중국이나 일본의 오래된 책 및 불교의 경전 등을 말함), 고문서(古文書, ※역주: 여기서는 옛날에 살았던 사람들의 개인적인 기록이나 일기, 편지 등을 말함), 참고 자료, 역사 자료 등 다방면에 이르렀다.

또, 현대에서는 국보지만 당시에는 가치가 없는 것이라 간주되는 것들도 사모았다.

사모으다, 라기 보다는 문화재의 보호를 명목으로 하고 있지만.


"대박대박, 오늘도 잔뜩 샀어"


산 것들은 어떤 공가(公家)의 장편일기 20권, 해외에서 수입되었지만 읽을 수 없어 헐값에 팔린 책 4권, 제작된 시기가 확실치 않은 공예품이 몇 점, 잘 알 수 없는 조각이 1점이었다.


"뭐가 좋은지 모르겠어"


"네가 시즛치를 이해할 수 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굉장하다고 생각해, 쇼우조"


"슬슬 책 때문에 바닥이 빠질 것 같은 느낌인데"


호위라기보다 짐꾼이 된 세 명은, 시즈코가 산 것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공가의 일기의 뭐가 좋은 것인지, 그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다. 시즈코에게는 어떤 것이든지 전국시대를 알 수 있는 제 1급의 사료(史料)인 것이다.

특히 일기류는 훗날의 역사가가 편찬한 자료류에는 없는, 당시의 사람들의 생생한 생각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날아갈 듯한 기분으로 쿄의 거리를 걷는 시즈코를, 쿄의 백성들은 멀리서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번의 상락군은 과거와는 달리, 규율이 바로잡힌 군대라서 대규모의 약탈이나 학살은 발생하지 않았다.

노부나가가 약탈 행위를 엄금하여, 위반한 병사는 엄하게 처벌받는데다, 애초에 병사들에게는 군율을 잘 지키며 임무를 수행하면 충분한 보상이 확실히 약속되어 있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쿄 치안유지 경라대'도 결성되었기에, 쿄의 백성들은 대부분 상락군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그 상락군 안에서 시즈코가 하고 있는 일은 세 가지다.

첫번째는 노부나가가 가장 중요한 명령이라고 한 장인 찾기, 두번째는 고아를 모아서 고아원에 살게 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은 사체 처리 등 위생면의 개선이다.

그런 틈틈이 시즈코는 사장되어있던 곰팡내나는 목상(木像)이나, 언제 것인지 알 수 없는 경화(硬貨), 가난한 공가가 쓴 일기 등의 책을 개인적으로 수집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놀랐지만, 폐품 회수를 해 준다면 좋다, 라고 말하듯 쿄의 백성들은 물건을 팔았다.

그 중에는 가짜를 팔아넘기려 한 패거리도 있었지만, 그녀의 감정안(鑑定眼) 앞에 어이없이 간파되어, 누구 하나 가짜를 팔아넘기지 못했다.


"작물의 씨앗도 꽤나 입수했으니 아주 좋아 (매번, F1종인지 고정종인지 조사하지 않아도 되니까 편하네―)"


씨앗의 권리 단체가 존재하지 않은 전국시대에는, 물물교환으로 고정종의 씨앗을 쉽게 입수할 수 있다.

하지만 현대에서 고정종을 손에 넣는 것은 어렵다.

일단 씨앗의 입수는, 그에 관련된 이벤트에 참가하거나, 고정종을 취급하고 있는 연구기관, 또는 개인적으로 씨앗의 연구를 하고 있는 농가에서 구입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그에 반해 F1종은 시장에 넘쳐나고 있어 씨앗을 입수하는 것은 쉽다.


어째서 이만큼 차이가 생겼는가.

그것은 생육이 빠르고 모양이 균일하며 질병에 강한 F1종 쪽이 편하기 때문이다.

고정종은 질병에 대해 깊은 지식이 필요하고, 모양새는 들쭉날쭉하며, 육성에는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시장에 출하하는 농가도, 가정텃밭을 하는 사람들도, 고정종을 키우는 일은 일단 없다.

F1종을 취급하는 회사나 농협 조합이 정기적으로 이익을 얻기 위해 고정종을 시장에서 배척하고 있는 것을 고려해도, 주위의 환경이 아주 좋지 않은 이상 고정종을 키우는 것은 난이도가 너무 높은 것이다.


"그럼, 경라대의 보고를 받으러 가볼까요"


그렇게 중얼거린 후, 시즈코는 케이지 들을 데리고 경라대가 이용하고 있는 기지 시설로 향했다.




시즈코가 맡고 있는 세 가지 일 중, 사체 처리가 제일 간단했다. 사체를 도시 밖까지 운반하여, 최저 1.5m의 흙을 덮게 하는 것과, 사체에 생석회를 뿌리는 것으로 끝났다.

장인 찾기도 쿄의 백성들과 사이가 좋아지게 되면, 현지 네트워크를 활용할 수 있기에 간단히 찾을 수 있다. 그 후에는 교섭에 달렸지만, 딱히 지체되지 않고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문제는 고아원의 확보와 고아의 소집이었다. 전쟁고아를 방치해두면, 이윽고 도당을 결성해서 도적이 된다.그렇게 되지 않는다 해도 고아들은 날마다 먹고살기 위해 절도 등의 죄를 저지른다.

전쟁고아들이 도적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고아원에 살게 하고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하며, 수양부모(里親)를 모집하는 것이 낫다.

이것은 에도 시대의 악법으로 이름높은 살생금지령(生類憐れみの令, ※역주: 도쿠가와 5대 쇼군 도쿠가와 츠나요시(徳川綱吉)가 포고한, 일반적인 동물 외에도 물고기, 조개, 심지어 벌레까지 죽이는 것을 금한 좀 황당한 법이라고 하는데, 당연하지만 잘 지켜지지는 않았다고 한다)을 베이스로 하고 있다. 도가 지나친 동물 애호법으로 오해받고 있지만, 살생금지령은 병자나 버려진 아이의 구제도 규정하고 있다.

6대째 이에노부(家宣, ※역주: 도쿠가와 이에노부(徳川家宣). 원문에는 家督이라고 되어 있는데, 오타로 보임)가 쇼군이 되었을 때 살생금지령은 폐지되었으나, 이 버려진 아이의 교육 제도는 남겼을 정도로 뛰어난 제도였다.


하지만 뛰어난 제도가 시행되어도, 고아들이 순순히 말을 들을 리도 없다.

대부분의 고아는 잡히지 않으려 도주, 어쩌다 잡혀서 고아원에 넣어져도 탈주를 반복한다, 는 완전히 숨바꼭질 상태였다.


"으―음, 오늘은 세 명 탈주. 개중 두 명은 금방 붙잡혔지만, 한 명은 절도……라. 힘으로 억누르면 괜히 더 악화될 것 같고, 그렇다고 해서 자칫 도시 밖으로 나가게 하면 도당을 결성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쿄 치안유지 경라대로부터의 보고를 받은 시즈코는 머리를 감싸쥐며 책상에 엎드렸다.

명목상으로는 노부나가의 휘하이지만, 실제로 경라대의 행동 지침을 결정하고 움직이고 있는 것은 시즈코였다.

2인 1조로의 순찰, 경비견의 도입, 순찰 루트의 제정 등, 그들에게는 처음 겪는 것들 뿐이었기에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시즈코에게는 기술자 마을에서의 노하우가 있었기에, 도입에 관해서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다행히, 오늘까지 하루 이상 도망친 적은 없습니다만…… 금후에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젊은 병사가 시즈코에게 그렇게 진언했다. 그는 남방 경라대 2번대의 대장이다.

북방, 동방, 남방, 서방 각각을 담당하는 치안유지대, 사무, 경리 등의 뒷일을 담당하는 업무지원대, 그리고 다섯 대의 건강 문제를 책임지는 위생대.

쿄 치안유지 경라대는 크게 나누어 이 여섯 개의 부대로 구성되어 있다.


이미 무로마치 막부의 쿄우시키(京職, 쿄의 치안 유지)는 있으나 마나한 것.

조정 주변의 치안 유지는 계통이 다르기에 기능하고 있었으나, 쇼군 주변, 나아가서는 쿄의 치안유지는 노부나가의 군사력과 재력이 있었기에 성립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 때문에 치안유지 조직을 편성하여 노부나가의 부하인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에게 인수인계하는 것이 시즈코의 역할이다.


(뭐어 인수인계라고 해도, 내가 작성한 서류를 아케치 미츠히데의 부하에게 넘기고 끝이지만……)


시즈코는 때가 되면 오와리로 돌아가지만, 미츠히데를 포함하는 부하 몇 명은 쿄에 남는다.

금후, 쿄 치안유지 경라대가 효율좋게 움직일 수 있을지는, 실은 시즈코의 조직 편성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것을 시즈코는 모른다.


"이거에 관해서는 평범하게 진행할 수밖에 없네. 고아를 솎아내기…… 같은 걸 했다간 오다 반대파에게 이용당할테니까"


고아가 도망치지 않게 하는 방법을 생각했지만, 평범하게 계속 붙잡는 것 이외의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고아를 죽이면, 오다 반대파가 그 점을 이용해 올 가능성이 높다.


"경비견의 도입에 대해서는 어떻게 되고 있지요?"


"그다지 순조롭지 않습니다. 수백 명의 부대라면 몰라도, 치안유지대는 4천 명을 넘는 규모라서…… 년 단위를 고려해 주실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흠…… 그러네요. 여기서 서둘러 도입해서 실패하는 건 피하고 싶으니까요. 개의 훈련은 충분한 시간을 두고 해 주세요. 물론, 빨리 끝내는 게 제일 좋지만요"


치안유지대는 네 개의 대를 합하면 4천 명을 넘는다. 경비견을 도입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애초에 개의 브리더(breeder) 조차 없는 전국시대이다. 개를 모으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데다, 경비견으로서의 훈련을 시킬 수 있는 사람이 적다. 경비견의 도입이 늦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정도겠지요. 보고, 연락, 상담을 잊지 말고, 이후에도 업무에 힘써 주세요"


더 들을 게 없어진 시즈코는, 각 대의 대장을 돌아보면서 종합적인 이야기를 한 후 회의를 마무리지었다.


그로부터 8월 12일까지, 그녀는 '쿄 치안유지 경라대'를 정리했다.

하지만 8월 13일, 시즈코는 노부나가에서 정식으로, 미츠히데에게 '쿄 치안유지 경라대'에 관한 권한 이양과 인수인계를 하도록 명령받았다.

그리고 8월 15일, 오랫동안 쿄에 체재하고 있었던 노부나가였지만, 이 이상 기후를 비워두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하여, 귀국을 결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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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가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