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 미녀 고생담

戦国小町苦労談


작가: 夾竹桃


어느 날, 한 명의 소녀가 전국시대로 타임슬립했다.

그야말로 신의 변덕, 악마의 심심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뜬금없이.


소녀는 세계를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디에나 있는 극히 보통의, 그리고 평범하고 수수한 소녀였다.

그런 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다.


전국 시대를 살아남는다 - 그것 뿐이다.





번역: 가리아



겐키(元亀) 3년 결전(決戦), 미카타가하라(三方ヶ原) 전투


098 1572년 12월 하순



바바 노부하루(馬場信春),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昌景)의 전사. 그 소식이 신겐(信玄)에게 전해진 것은, 시즈코가 타케다(武田) 군으로의 돌격명령을 내리기 직전이었다.

다들 전령이 가져온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감정이 이해를 거부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사태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타케다는 이 일전에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타케다 가문 최강으로 이름높은 야마가타 마사카게가 이끄는 적비대(赤備え), 40년이나 되는 긴 세월 동안 전장에서 살아오며 긁힌 상처 하나 입지 않았던 불사신 바바 노부하루. 두 사람을 잃은 타케다는 양 팔이 뜯겨나간 거나 마찬가지였다.


"영주님(お屋形様)! 놈들에게 한 방 먹여주지 않으면 타케다의 이름에 먹칠을 하게 됩니다! 소생에게 돌격을 명해 주십시오!"


이 시점에서라면 타케다에게는 두 개의 선택지가 있었다. 즉, 계전(継戦)이냐 철수(撤退)냐이다. 하지만 주력을 잃었음에도 여전히 타케다와 오다(織田)-도쿠가와(徳川) 연합군의 전력은 비등한 상태였다.

승리할 확률이 있을 때 퇴각한다는 선택은 그들의 긍지가 용납하지 않았다. 뭣보다 여기서 퇴각하면, 지금까지 얻은 전과가 전부 물거품으로 변하는데다, 치른 희생이 무의미하게 되어버린다.

타케다의 명령을 따르기로 한 토오토우미(遠江)의 영주들도 다시 변절할 선물(手土産)로서 타케다를 추격할 것은 뻔했다.

명예만을 위해서라면 굴욕에 견디며 권토중래(捲土重来)의 때를 기다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군을 동원해놓고 전과가 없는 철수는, 오다-도쿠가와 연합군과의 계전보다도 손해가 크다고 판단되었다.


"제 3진을 보내라. 놈들을 이 이상 우쭐하게 만들지 마라"


계전을 결정한 신겐은, 본진을 제외한 전군에 공격명령을 내렸다. 그 호령에 전군에 활기가 돌았다. 오야마다 노부시게(小山田信茂), 야마가타 마사카게, 바바 노부하루의 군은 괴멸되었으나, 타케다에는 용맹한 무장이 부족하지 않았다.

나이토 마사토요(内藤昌豊), 사나다 노부츠나(真田信綱), 마사유키(昌幸) 형제에 스와 카츠요리(諏訪勝頼), 타케다 노부토요(武田信豊), 요네쿠라(米倉) 탄고노카미(丹後守)가 가세하면, 기세가 붙은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을 되밀어내는 것도 쉬운 일이라 생각되었다.


하지만 신겐은 여기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그는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은 전군이 적비대나 바바 군과 충돌하여 간신히 두 사람을 처치했다고 생각했다.

신겐의 판단을 어긋나게 한 것은 정보 부족이었다. 전장은 극도로 혼란되어, 패인(敗因)은 둘째치고 유력 무장의 전사 보고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우선시되었기에, 신식총(新式銃)이나 작렬통(炸裂筒)의 위협은 아직 신겐에게까지 보고되지 않았다.

그리고 신겐이 자신의 실책을 이해했을 때는, 모든 것이 늦은 상태였다. 전령으로부터 급보가 전해졌다.


"주군(ご注進)!! 증원이…… 오다의 증원이 나타났습니다! 그 숫자는 대략 8000!"


"뭣이라!"


최악의 타이밍에 나타난 증원에 제아무리 신겐이라도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노부나가는 방어를 최대한으로 깎아내면서 원군(後詰め)을 보냈을 테니, 추가적인 증원 같은 건 뒤집어 털어봐도 나오지 않는다.

오와리(尾張)를 버리고 구원하러 달려왔다고도 생각했으나, 그렇게 되면 이 자리에서 승리를 거두더라도 오다-도쿠가와는 공멸한다.

어디서 8000이나 되는 전력을 짜냈는가. 신겐의 안목으로도 그 실마리조차 잡지 못했다.


"영주님! 원군이 내건 군기에 시바타(柴田)에 아케치(明智), 니와(丹羽) 등 이름높은 무장들의 문장(旗印)이 있습니다! 이대로는 제 2진이 버티지 못합니다!!"


"주군!! 추가로 삿사(佐々)에 마에다(前田), 하시바(羽柴), 모리(森)의 깃발이 확인되었습니다!"


"영주님! 오다의 맹공을 받고 나이토 님의 군은 괴멸! 나이토 님은 전사하신 것 같습니다!"


"사나다 님의 군도 패했습니다! 사나다 사에몬노죠(真田左衛門尉) 님은 전사! 무토 키헤에(武藤喜兵衛, 사나다 마사유키) 님의 모습도 본 자가 없습니다! 아마도 전사하신 게 아닐까 합니다!"


"일선에서 물러났던 모리 산자에몬(森三左衛門)이 나타났습니다!! 노도의 진격을 거듭하여 병사들이 전의를 잃고 물러나고 있습니다!!"


신겐에게 연달아서 부보(訃報)가 전해졌다. 증원의 출현과 함께 균형을 이루던 천칭(天秤)은 크게 기울었다. 단 하나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대로 손을 놓고 있다가는 타케다는 패배한다.


(뭐가, 대체 어떻게 되고 있는 거냐!)


신겐은 불가해(不可解)한 증원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관두고, 당장의 대처에 주력했다. 이 상황은 나란히 장기를 두기 시작한 국면에서 상대방만이 많은 장기말을 숨겨 가지고 있었던 거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전장에서 마주치기 전부터 싸움은 시작되었다. 그 계략(絡繰り)을 꿰뚫어보지 못한 스스로의 어리석음(不明)이 부끄러웠다.

역전(歴戦)의 강자(強者)인 신겐은, 동요를 억누르고 몸매무새를 바르게 한 후, 코우사카 마사노부(高坂昌信)를 부르도록 명했다.

즉시 코우사카 마사노부가 나타나자, 신겐은 그에게 가까이 오도록 손짓했다.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코우사카 마사노부는 신겐의 바로 곁에 무릎을 꿇었다.

신겐이 뭔가를 속삭였을 때, 코우사카 마사노부가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다. 그대로 신겐의 얼굴을 응시하는 코우사카에게, 신겐은 결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님…… 알겠사옵니다!"


뭔가 머뭇거리듯이 코우사카 마사노부는 눈을 감고, 신겐을 마주본 후에 깊이 고개를 숙이고 그 자리를 떠났다. 신겐은 그 뒷모습을, 감정을 죽인 채 말없이 전송했다.




때는 조금 거슬러올라가, 오다 쪽은 케이지(慶次)와 타카토라(高虎). 타케다 측은 나이토 마사토요에 사나다 노부츠나, 마사테루(昌輝), 마사유키 형제 등이 부딪히고 있을 때, 케이지는 사나다 노부츠나와 일기토를 벌이고 있었다.


"으라차차차차차차차차!!"


경묘(軽妙)한 기합소리와 함께 케이지는 사나다 노부츠나의 맹공을 전부 받아내보였다.

전장에서도 여전히 눈을 끄는 카부키모노(傾奇者)의 차림새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무위(武威). 신겐으로부터 장래를 촉망받은 맹장, 사나다 노부츠나와 호각으로 겨루는 케이지에 사나다 군은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핫하ー! 댁의 동생은 조금 부족했는데, 댁하고라면 재미있는 승부를 할 수 있겠어"


동생이란 마사유키가 아니라 사나다 마사테루 쪽이었다. 케이지에게 목숨을 잃은 사나다 마사테루 대신, 지금은 형인 사나다 노부츠나가 명공(名工) 아오에 사다츠구(青江貞次)가 벼려낸, 길이가 1미터는 되는 진태도(陣太刀)로 케이지와 싸우고 있었다.


"괴물같은 놈…… 내 공격을 이렇게 쉽게 받아내다니"


"쉽지는 않지만 말야. 댁의 공격을 받아내는 건 실수가 용납되지 않으니 필사적이라고"


할버드(halberd)를 겨누며 케이지는 사나다 노부츠나를 칭찬했다. 이만한 강적과 만날 수 있었던 행운, 그리고 자신의 힘이 그와 나란히 한다는 현실, 케이지의 가슴이 뛰지 않을 리가 없었다.


"사선을 넘나드는 것을 즐기는 것이냐. 이해할 수 없군"


"죽음을 앞둬야 삶을 실감할 수 있지. 그러니 좋은 거 아니겠어!"


노부츠나에게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케이지는 이 일기토를 진심으로 즐기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에 교차되는 목숨의 다툼만큼 재미있는 것은 없다고 말하는 듯한 웃음에, 사나다 노부츠나는 쓴웃음을 떠올렸다.


"카부키모노가…… 무사인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간단해. 이해같은 건 안 해도 돼. 댁의 전부를 부딪혀 주면 되는거야"


대화가 끝남과 동시에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퍼졌다. 쉬익 하는 칼날이 우는 소리를 내며 할버드와 진태도가 날을 부딪히는 소리였다. 몇 번 울려퍼졌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소리가 멎었을 때가 결판이 났을 때라는 것이다.


"이해가 안되는군. 그만한 무용이 있다면, 어디든지 사관할 수 있었을텐데. 타케다에 왔다면 호용(剛勇)한 무사로서 이름을 날릴 수 있었을 것을"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삐딱해서 말이지. 나는 자유롭게 살고, 스스로 정한 죽을 자리에서 생을 마치고 싶은 거야. 딱딱하고 숨막히는 근시(近習) 같은 건 사양이라고"


"고노에(近衛)의 딸을 섬기면서 근시는 싫다는건가. 완전히 모순이로군"


치고받는 사이사이에 서로 대화를 했다. 보통 사람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재주였다. 그걸 어렵잖게 해내는 케이지도 경탄할 만 하지만, 그것을 힘들지 않게 받아내는 사나다 노부츠나도 무서운 무사였다.


"하핫! 확실히 밖에서 보면 근시인가. 지금의 주인은 나를 속박하려고 하지 않지. 물론 최저한의 일은 해야 하지만, 그것만 하면 내 방식을 존중해 주거든. 용맹스러움은 전혀 없지만, 묘하게 사람을 끌어들여서 놔주질 않아. 나와 상성이 좋았던 거겠지"


"핫, 웃기고 있군! 수하를 속박하지 않는 주인에, 속박되지 않음에도 떠나지 않는 수하라. 양쪽 다 모순되어 있으니 상성은 좋겠지"


칼날을 부딪힌 충격으로 양쪽 다 크게 거리를 벌렸다. 간격은 벌어졌으나, 한 발자국만 내딛으면 서로의 참격의 간격이 되는, 긴장감을 품은 위치였다.

다음 일 합이 승부를 가른다. 두 사람 사이에 감도는 분위기에서 주위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것을 이해했다.

죽고 죽이는 와중에서도 계속 웃음을 떠올렸던 케이지도, 시즈코조차 본 적 없는 진지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갑자기 돌풍이 불었다. 그것은 땅바닥에 쓰러져 있던, 본래 깃발이었을 천쪼가리를 하늘로 날려올려, 두 사람 사이에 그것을 펄럭이며 떨어지게 했다.

펄럭인 천에 서로가 가려진 순간, 두 사람은 움직였다. 양쪽 모두 한 동작에 간격을 좁혀, 손에 든 무기를 상대를 향해 내리쳤다.

케이지의 할버드와, 사나다 노부츠나의 진태도는, 그러나 교차하지 않고 휘둘러졌다. 양쪽 모두 참격의 기세를 타고 땅바닥을 찍고, 그 자세 그대로 정지했다.


정숙이 자리를 지배하며, 누구 하나 소리를 내지 않았다. 이윽고 케이지가 무릎을 꿇고, 조금 간격을 두고 사나다 노부츠나가 땅바닥에 쓰러졌다.


"내…… 생애 최고를 뛰어넘는가"


땅바닥에 박힌 칼을 지팡이삼아 사나다 노부츠나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허리 부근까지 비스듬하게 베여 있었다.

한편 케이지도, 몸에 두른 갑주가 깨지고, 오른쪽 어깨에서 쇄골에 걸쳐 일직선으로 베인 상처가 나서 약간 피를 흘리고 있었다.


"크큭, 끝내주는군. 그런 재주……를 부리면, 무사의 체면이 말이 아니군"


돌진(踏み込み)과 참격은 사나다 노부츠나 쪽이 위였다. 케이지는 사나다 노부츠나보다 한 박자 늦게 움직였다.

사나다 노부츠나는 회피를 버리고, 혼신의 일격을 날렸다. 그에 반해 케이지는 날아오는 참격을 회피하면서 역공을 했다.

케이지라도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케이지의 상식을 벗어난 반응속도, 무거운 할버드를 나뭇가지처럼 다루는 경이적인 완력, 전력의 돌진이면서 몸을 피할 수 있는 순발력, 생과 사의 갈림길이라는 극한 상태에서의 집중력이 갖춰져 처음으로 가능한 일격이었다.

자기 몸에 새겨진 상흔(傷痕)을 보고 그것을 이해한 사나다 노부츠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떠올렸다.


"하나 묻고 싶어. 당신, 이게 진 싸움이라고 알고 있었지? 어째서 도망치려고 하지 않은거지?"


입 속에 고인 피를 뱉어내고 사나다 노부츠나가 대답했다.


"……이 싸움에서 깨달았다. 지금부터는 철포(鉄砲)의 시대가 되지. 활이나 칼, 창 밖에 재주가 없는 무사는 언젠가 시류(時流)에 휩쓸려간다. 내가 평생에 걸쳐 닦아올린 기량이 쓸모없는 것이 되지. 나는 그걸 참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 몸을 던져 저항한 것이다!"


사나다 노부츠나는 이 일전에서 싸움의 양상이 변하여, 철포의 숫자가 승패를 결정할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개인의 무용을 필요로 하지 않는, 무사의 시대의 종언(終焉)임을 이해했다.

이해는 했으나, 사나다 노부츠나는 납득할 수 없었다.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의 미래를 생각했을 때, 그는 이곳, 미카타가하라(三方ヶ原) 대지(台地)가 자신이 죽을 장소임을 깨달았다.


"철포에 죽는 것 따위 견딜 수 없다! 나는 무사다! 최후에는 싸움터에서, 내가 인정한 남자와의 싸움 끝에 죽고 싶다!"


사나다 노부츠나는 격하게 기침을 하며 입가에서 피를 흘렸다. 근시들이 다가오려 했으나, 그는 그것을 손으로 제지했다. 이미 자신이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은 그 자신이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다.


"사는 법, 죽는 법에 집착하는 네놈이라면 알겠지. 나는 내 숙원(本懐)을 이루었다"


케이지는 대담한 미소를 떠올리더니, 할버드를 힘있게 쥐었다.


"먼저 가 있어. 뭐, 금방 다시 만날거야. 그러면 술이라도 마시자고"


"음! 네놈이 사는 모습, 저 세상에서 구경하며 기다리겠다"


그것이 사나다 노부츠나의 마지막 말이 되었다. 케이지는 할버드로 사나다 노부츠나의 목을 베어 떨어뜨렸다. 사나다 노부츠나의 죽은 얼굴은 평온하여, 이 세상에 후회는 없다고 말하는 듯 맑고 깨끗한 표정이었다.


"사나다 사에몬노죠, 진정한 무사로다"


사나다 마사테루에 이어 사나다 노부츠나까지 전사하자 사나다 군의 사기는 와해되었다. 무릎을 꿇고 엎어져 무기를 버리고 죽은 주인을 애도(偲)했다.


"실례하오"


그런 병사들을 헤치고 말에 탄 한 사람의 무장이 앞으로 나왔다.


"할 건가?"


분위기를 볼 때 무사라는 것을 안 케이지는, 할버드를 가볍게 치켜올리며 물었다. 하지만 무장은 고개를 가로젓고, 허리에 찬 칼을 땅바닥에 던져버렸다.


"내 목숨으로 형님 두 분의 목, 그리고 병사들의 목숨을 구해주시오"


"……당신, 이름은?"


"무토 키헤에. 무토 가문에 양자로 간 몸이지만, 그대에게 쓰러진 사나다 사에몬노죠의 동생이오"


그렇게 말하면서 무토 키헤에, 뒷날의 사나다 마사유키는 갑주를 벗었다. 토시(籠手)와 정강이 보호대(臑当)만 찬 상태가 되자 다시 케이지의 얼굴을 보았다. 대답은 어느 쪽이냐고 그의 눈이 묻고 있었다.


"알았어. 당신의 제안, 받아들이지"


잠시 생각한 후 케이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케이지는 사나다의 목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지금 이상의 지위 따위 족쇄일 뿐이다. 대장의 목 같은 게 없어도 충분한 보수를 얻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그 말을 하면, 자기 목숨을 걸고 병사들의 구명을 청한 무토 키헤에에게 창피를 주게 된다.

시즈코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서 적당한 때에 풀어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감사하오. 다들, 잘 들어라. 이제 이 싸움은 끝이다. 형님들을 잘 장사지내다오. 잘 부탁한다"


"예, 옛!"


사나다의 병사들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힘있게 대답했다. 재빨리 사나다 마사테루와 사나다 노부츠나의 목을 겉옷(陣羽織)으로 감싸고, 패군(敗軍)의 병사라고는 생각되지 않은 통솔을 보이며 떠나갔다.

병사들의 움직임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무토 키헤에는, 죽음을 각오한 자 특유의 맑은 눈으로 철수하는 병사들을 배웅했다.

이윽고 사나다 가문의 병사들이 모두 떠나게 되자, 케이지가 무토 키헤에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그 목을…… 이라고 말해야 하겠지만, 그 전에 당신, 우리 대장을 만나보지 않겠어?"


"뭐라고?"


케이지의 기묘한 제안에 무토 키헤에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케이지는 신경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댁을 죽이는 것보다, 우리 대장에게 만나게 하는 편이 재미있을 거라고 내 감이 속삭이고 있거든"


"그것에 무슨 의미가 있지? 내 목을 베어, 무공의 증거로서 제출하면 되지 않나"


"자자, 잠깐 내 농담에 어울려 달라고"


"알았다. 애초에 내 목숨은 네게 맡겨놓았으니, 네 여흥에 어울리도록 하지"


"그렇게 나와야지. 자, 그러면 얼른 가자고"


"잠깐, 지금부터 말인가? 네 앞에는 전장이 있고, 무공을 세울 기회가 여기저기 있는데? 그걸 버리면서까지 해야 할 일인가?"


패주하고 있는 타케다 군이라면 손쉽게 무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용명을 떨친 무장이나 지장(智将)을 처치하면, 포상은 원하는 대로 받을 수 있다.

그 기회를 버리고, 무토 키헤에를 시즈코에게 만나게 하려는 의미가 이해되지 않았다.


"이 싸움, 처음에는 어떻게 될지 몰랐어. 그렇기에 재미있지. 하지만, 지금은 당신 말대로, 승기는 이쪽에 있지. 추격은 다른 녀석들에게 맡겨두면 돼. 나는 포상을 원해서 수급을 긁어모으는 얄팍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아.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지"


"이…… 삐딱한 놈이"


"자주 듣는 소리야. 자, 병사들이여. 나는 본진으로 돌아간다. 너희들은 마음대로 해도 좋아"


그 말을 들은 케이지의 병사들은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대장님, 버리고 가는 건 너무하잖아요"


"맞아요맞아요, 대장님이 돌아가면 같이 갑니다"


"뭣보다 대장님을 따라 돌아가면, 이 이상 싸움에 참가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되니까요!"


"야야, 겐로(玄朗) 영감한테 들리면 작살난다"


병사들이 왁 하고 웃었다. 누구 하나 타케다 군을 쫓아가서 공을 세우려고 하지 않았다. 케이지는 뭐라 말할 수 없는 표정을 지은 후, 넉살좋은 미소를 떠올리며 병사들을 돌아본 후 외쳤다.


"좋았어, 나보다 못하지 않은 바보들아. 시즛치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자ー!"


"오ー!"


케이지의 말에 병사들이 무기를 들어 화답했다.

이리하여, 케이지 부대는 다른 군이 승전의 기염을 토하는 가운데 당당히 본진으로 돌아간다는, 보통 사람에겐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했다.

물론, 케이지의 행동에 후세의 역사가들이 하나같이 골머리를 앓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쌍안경으로 타케다 군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자니, 시즈코는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제 3진에 포진하고 있던 스와 카츠요리의 군이 물러나고, 대신 본진에서 다른 군이 앞으로 나오려 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카츠요리를 물러나게 하는 노림수는 뭘까 고민한 시즈코였으나, 그 이유는 금방 깨달았다. 신겐은 패배를 받아들이고,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 각오를 굳힌 것이다.


"텟포슈(鉄砲衆) 앞으로! 타케다가 최후의 공세에 나선다!"


"옛!"


전고가 울리고, 텟포슈가 돌출햇다. 시즈코는 폭죽이 매달린 화살을 재더니, 그것을 하늘을 향해 쏘았다.

공중에서 몇 개의 폭죽이 터졌다. 북과 폭죽의 심호를 들은 오다 군이 후퇴했다. 열이 올라서 물러나지 않는 부대도 잇었으나, 시즈코 군이 개입하여 억지로 후퇴시켰다.

그렇게 오다 군은 '소정의 위치까지 이동'했다. 오다 군의 맹공을 받던 타케다 군은, 갑작스레 느슨해진 압력을 괴이쩍게 여겼다.

전장에 찾아온 잠깐의 휴식에, 타케다 군은 반격을 하는 게 아니라 자군의 진형을 재편하는 쪽을 우선시했다.


오다 군이 물러나면서도 좌우로 벌려가는 모습은, 마치 타케다 군을 삼키려고 하는 듯 했다.

그 움직임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자가 있다면, 오다 군이 학익진(鶴翼陣)으로 변경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신이 아닌 타케다 군은, 지금이야말로 호기라며 전력을 온존하는 것을 우선시하여, 오다 군의 행동에 대해 확인하는 것을 게을리했다.

그거야말로 타케다 군 최후의 일격을 둔화시켜, 결정적인 패배로 이끄는 요인이 되었다.


"텟포슈에게 탄종 전환을 전달! 탄환은 2식 관탄(弐式カ弾)에서 2식 산탄(弐式サ弾)! 탄두의 색으로 구별하여 혼동되지 않도록 철저히 주의시키세요!"


"옛! 지시를 전달하겠습니다!"


전령이 시즈코의 명령을 복창한 후, 즉시 말을 타고 최전선으로 달려갔다. 다시 쌍안경으로 타케다 군을 확인하자, 시즈코의 예상대로 주위의 군이 집결해 있었다.

타케다 군이 패주하여 물러서는 것을 깊게 쫓아들어가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의 진이 세로로 길게 늘어졌을 때, 뼈아픈 카운터 공격을 걸어 반격한다는 게 타케다의 속셈이었으나,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이 후방으로 물러났기 때문에 헛물만 켠 셈이 되었다.

하지만 작전을 변경할 기색은 없었으며, 곧 타케다 군의 선봉대가 움직였다. 그에 이어지는 형태로 후속도 차례차례 돌격해왔다.


"주군, 탄종 전환이 끝났습니다"


"수고했다. 이제 놈들이 살상 거리에 도달할 때까지 때를 기다린다. 관측수(高見)는 타케다의 선봉대가 '표식을 넘으면' 알리도록"


"옛!"


적의 움직임을 확인하기 위해 굵은 나무로 만든 사다리를 세웠다. 그걸 주위 사람들이 받치고, 맨 위까지 올라가 거기에서 쌍안경으로 적의 상황을 확인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 관측수이다.

시력은 물론, 높은 곳에서도 정확한 관측이 가능한 균형감각과, 불확실한 발판에 겁먹지 않는 담력이 요구되었다. 관측수의 보고에 따라서 전황이 판단되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주군! 놈들이 표식을 넘었습니다!"


"신호를 보내라! 2식 관탄 일제 사격으로 선봉대의 기세를 저지하는 것이다!"


전고로 신호가 보내짐과 동시에, 좌우 4백 정, 합계 1천 정이나 되는 총성이 울려퍼졌다. 살상 거리에 들어와 있던 타케다의 선봉대는 손에 든 목제(木製) 방패와 함께 관통당하여 차례차례 땅에 쓰러졌다.


"계속 쏴라! 방패수가 없어지면 2식 산탄으로 면제압(面制圧)을 한다. 명중 정밀도는 신경쓰지 마라!"


"옛!"


텟포슈는 차례차례 발포했다. 그 때마다 타케다 군의 병사들이 재미있을 정도로 쓰러져갔다. 종래의 화승총과는 달리 직진성이 뛰어난 신식총이기에, 한데 모여서 사격할 필요가 없다.

장전이 끝나자마자 각자 자의로 사격하기 때문에 사격 간격에는 편차가 발생하고 있었다.

통상적으로는 일제 사격을 하는 쪽이 제압력도 높고 효과적이지만, 지금은 타케다의 기세를 꺾는 것이 최우선이었기에, 끊임없이 총탄이 날아다니는 수시 사격(随時射撃) 쪽이 유리했다.

그리고 떨어진 밀도를 메우기 위한 2식 산탄이었다.


2식탄(弐式弾)이란, 현대에서 말하는 이중장전탄(二重装填弾)으로 분류되는 탄환이다. 대단히 거칠게 말하면 약실 안에 탄두를 두 개 세로로 겹쳐서 장전한 탄환이다.

두 발의 탄두를 날리기 때문에 장약량(装薬量)은 많아지고 탄환도 무거워져서 많은 숫자를 준비할 수는 없다. 그러나 특필할 만한 것은 그 압도적인 관통성능에 있었다.

격발한 화약이 우선 뒤쪽의 탄두에 에너지를 전달하여 앞쪽의 탄두를 밀어내고, 이어서 뒤쪽 탄두도 날아가기 떄문에, 앞의 탄두가 뚫은 구멍에 뒤쪽 탄두가 돌입하여 그 구멍을 더욱 깊게 파며 전진한다.

목제 방패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관통성에 특화된 탄종. 그것이 2식 관탄, 관은 관통탄의 관(カ)이다. (※역주: 원문에서는 2식 '카(관통의 일본어 발음인 칸츠으(かんつう)에서의 '카' 부분)'탄으로 되어 있으나, 읽기 편한 쪽을 우선시하여 관탄으로 번역했음. 이하 2식 산탄도 마찬가지로 '사'탄으로 되어 있으나 '산탄'으로 번역)


하지만 관통력이 높아지는 반면, 타격력이 일점에 집중되기에, 어쩔 수 없이 제압 범위라는 면에서는 떨어진다.

그걸 보충하기 위해 개발된 것이 2식 산탄이다. 이것은 앞서의 이중장정탄의 뒤쪽에 위치하는 탄두를 약간 기울여두는 것으로, 한번의 사격으로 두 곳으로 공격을 가능하게 한 탄환이다.

직진하는 것은 앞의 탄두 뿐으로, 뒤쪽의 탄도는 조준점에서 상하좌우로 약간 엇나간 지점에 착탄한다. 당연히 도달거리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2번째 탄두의 어긋남은 커지게 된다.

이에 의해 사선(射線)에서 몸을 피했음에도 그 몸에 총탄이 박히는 타케다 병사들이 속출했다. 참고로 2식 산탄의 산(サ)은 산탄(散弾)의 산이다.


이러한 이중장전탄은 베트남 전쟁 때 개발되었으나, 연발총이 당연한 근대 전투에서 중량 증가라는 디메리트를 덮을 정도의 전과를 올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단발식의 총이라면 평가는 바뀐다. 한 동작에 2발을 쏠 수 있고, 관통력과 공격범위의 각각에 맞춰 대응할 수 있다는 이점은 컸다.

그리고 총성의 숫자보다 많은 탄환을 흩뿌리는 제압력은 대단하여, 타케다 군의 기세는 눈에 보일 정도로 떨어져갔다.


"주군! 타케다의 기세가 멈췄습니다! 잡병들부터 뒤로 도망치기 시작합니다!"


"주군! 해냈습니다!"


관측수가 흥분하며 보고를 올렸다. 그 보고를 듣고 옆에 시립해 잇던 겐로도 환호했다.

하지만 시즈코는 보고를 듣고도 표정을 바꾸지 않고 전황의 변화를 계속 관찰했다.


"우선 승리하고, 그 후에 싸움을 하라. 그런 후, 이긴 후에도 투구의 끈을 조여라"


"옛? 뭐라고 하셨습니까?"


의미를 알 수 없어 겐로가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사람들도 시즈코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지 알 수 없어 곤혹스러운 표정을 떠올렸다.


"싸움이란, 상대에게 이길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그런 후에 승기(勝機)가 올 때까지 기다린다. 두 가지가 갖춰진 후에야 비로소 싸움을 하여, 승리가 자기 손에 들어오는 거에요. 하지만 승리의 미주(美酒)는 승자를 오만하게 만드는 독이기도 하지요. 그렇기에 승리해도 방심하지 않고, 다음 싸움에 대비하기 위해 투구 끈을 조일 것을 명심하라, 라는 격언이에요. 뭐 저 나름대로의, 싸움에 대한 철학일까요"


"과, 과연. 항상 앞을 내다보시는 혜안이 놀라우십니다. 타케다에게 승리한다는 대승리(大金星)에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스스로를 다스리시는 모습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그보다, 슬슬 어떤 작전이었는지 저희들도 알 수 있도록 개요를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겐로는 칭찬했으나, 시즈코는 미묘한 표정을 떠올릴 뿐이었다. 기분이 상했는가, 하고 당황한 겐로는 서둘러 화제를 바꾸었다.

수하의 칭찬을 솔직히 기뻐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시즈코는, 표정을 조이면서 겐로의 질문에 대답했다.


"자세한 것들은 생략하고 한 마디로 하자면, 상대를 공황상태에 빠뜨려서, 조직적인 통솔을 잃어버리게 하여 우위에 선다. 그게 제가 이번에 쓴 계책의 개요에요. 차례차례 예상밖의 상황으로 몰아넣어, 처음 보는 공격(初見殺し)으로 압도하여 상황을 악화시키죠. 영문도 모르고 몰려서 시시각각 악화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 누구나 착란 상태에 빠져요., 공포나 초조함은 전염되어, 공황에 빠진 병사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어떤 한 점을 넘어서면 병사들은 통솔에서 이탈하여 군의 지휘계통은 붕괴하죠. 그렇게 되면, 이후에는 숫자만 많은 오합지졸이에요"


"예, 예에…… 하지만 개중에는 이해가 빠른 자나 배짱이 두둑한 자들도 있는 게 아닙니까? 병사들이 겁먹은 정도로 천하의 타케다 군이 붕괴하게 되는 걸까요?"


아직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는 겐로는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생각한 의문을 차례차례 시즈코에게 질문했다.


"처음 질문에 대한 대답인데, 그건 있어도 문제없어요. 목숨을 주고받는 전장에서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나요? 천 명 중에 한 손으로 꼽을 정도겠죠. 저들은 총력전을 걸어왔어요. 3만이나 되는 대군 중, 수십명 정도 똑똑한 사람이 있어도, 대다수의 병사들이 공황상태라면 그 목소리는 지워지죠. 그들은 정예무비(精鋭無比)한 대군이 강점이었지만, 이번에는 그게 되려 패착이 된 거에요"


대군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이기고 있는 동안에는 대단히 강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처음 보는 공격을 다수 이용하여 그 강함을 국소적인 승리로 꺾어보였다.

지휘계통이 와해되면, 병사의 숫자가 3만이건 10만이건 별 차이는 없다. 오히려 미쳐 날뛰는 병사들의 절대 숫자가 많아져, 지휘하는 사람이나 똑똑한 사람의 목소리는 병사들에게 전달되지 않게 된다.


"다음 대답인데, 한 번의 패배 뿐이라면 타케다 군은 금방 재기하여 대세를 만회하겠죠. 제 1진의 패배도, 오다 군이 기적적으로 이긴 것이라며 오명을 씻는 것을 노리고 분기할지도 몰라요"


시즈코는 지휘도(指揮刀)를 대신하는 쿠제(kuse)를 전장 쪽으로 향했다. 이미 승패는 결정나서, 타케다 군이라고 부를 만한 집단은 미카타가하라 대지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연이어서 패배를 맛보았죠. 제 2진의 패배는 오다 군의 실력이 우연이 아니라는 걸 알게 하고, 타케다 병사들의 마음에 의심(猜疑)의 씨를 뿌리게 되죠. 틈을 두지 않고 제 3진까지 패배하면, 씨앗은 싹을 틔우고 의혹은 패배의 공포라는 꽃을 피워요. 죽음의 공포는 병사들을 잠식하고, 몸을 위축시켜, 최종적으로는 반드시 마음이 꺾이죠"


헐레벌떡 도망치는 타케다 병사들이 시즈코의 눈에 들어왔다. 갑주를 벗어던지고, 허리에 찬 칼을 내던지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도망치는 모습이.

타케다 병사들의 꼴사나운 모습을 보고도 시즈코의 마음은 평온했다. 자칫 잘못하면 저 꼴을 보였을 것은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언제 자신에게도 찾아올지 모른다, 고 생각하면 타케다 병사들의 모습을 도저히 비웃을 수 없었다. 얼른 싸움터에서 은퇴해서 농업에만 종사하면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조차 생각했다.


"마음이 꺾인 상태에서 여전히 분전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요. 대부분은 목숨을 아까워하여,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도주하는 것을 선택하죠. 지휘계통이 붕괴하고, 병사들이 마음이 죽음에서 도망치는 것으로 가득하면, 설령 신겐 그 사람이라도 흐름을 바꾸거나 할 수는 없겠죠"


누구의 눈에도 알기쉽게 승패가 결정되었을 경우, 잡병들은 보신(保身)을 꾀한다. 그건 당연한 생각이었다. 어지간한 사정이 있지 않는 한, 잡병들은 무장을 위해 순사(殉死)한다는 선택은 하지 않는다.

공포에 휩싸인 잡병들은 앞다투어 도망치고, 그걸 본 자들도 나도나도 하며 도망치기 시작한다. 잡병에 이어 아시가루(足軽) 들조차 도망치기 시작하면, 붕괴는 결정적이 된다.

그렇게 되면 이미 군이라고 부를 수 없으며, 무장들은 어쩔 수 없이 패배를 받아들이게 된다.


"과연…… 아! 주군! 도쿠가와의 군기가 타케다의 후방에 나타났습니다!"


타케다 군의 배후에, 지금까지 모습을 감추고 있던 도쿠가와 군 8000이 갑자기 나타났다. 도주하던 타케다 군(이었던 자들)은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유일한 퇴로인 배후를 차단당했다는 것이, 그들의 마음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던 이성을 붕괴시켰다. 잡병들은 조금이라도 적병이 적은 쪽으로 가려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그것은 타케타 일족의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예정보다 조금 늦었지만, 별 문제는 없네요"


이것이야말로 1년에 걸쳐 시즈코가 미카타가하라 대지의 지형을 조사했던 이유이다.

도쿠가와 군이 '어떤 장소'에서 타케다 군의 배후로 돌아들어가는 시간. 그 때에 오다 군이 어디에 있어야 포위가 완성되는가, 타케다 군을 어디로 유인하면 좋은가, 그걸 알기 위한 조사였다.

많은 비용을 들인 것 치고는 평범한 내용으로 생각되지만, 이 포위의 유무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사였다.


오다 군이 학익진(鶴翼陣)을 펼치고, 타케다 군이 중앙의 일점돌파를 꾀한다. 거기서 학익의 군은 투입하지 않고 중앙군만으로 타케다 군을 막아내어 그 기세를 꺾는다. 타케다 군의 진격이 멈췄을 때, 유일한 퇴로인 후방을 도쿠가와 군이 틀어막는다.

하늘에서 보면 오다 군의 중앙을 정점으로 한 이등변삼각형 안에 타케다 군이 갇힌 것이 된다. 어느 방향을 향하더라도 두터운 적병에 가로막혀 이제 도주조차 할 수 없다.

신겐 정도의 인물이 자신이 놓인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리가 없다.

상황을 헤아렸기 때문에야말로 타케다 군은 움직임을 멈추었다. 어떤 수를 짜내던 자신들이 살아남는 미래는 없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잡병이나 아시가루 뿐만이 아니라, 무장들도 인정했습니다. 자신들의 패배를"


타케다 군은 격퇴된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완벽한 패배를 맛보았다고 인식했다.

타케다 스스로가 패배를 인정했다는 사실은, 반 오다 연합의 각 세력(諸氏)들에 격진을 일으키리라. 타케다의 깃발 아래 모였던 반 오다 연합의 의도는 근본부터 뒤엎어진 것이다.


"이걸로 외통수에요. 이 이상 싸워봤자 타케다에게 승리는 없어요. 쓸데없는 희생을 내지 않기 위해서도 타케다에게 투항하라고 권고하세요"


"옛!"


4박자로 전고가 울렸다. 그것은 승리가 확정되어 적병에게 투항을 권고하라는 신호(符丁)였다. 포위당했으면서도 저항하는 타케다 군에게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이 투항을 권고했다.

일부는 여전히 저항하려 했으나, 대부분은 권고에 응하여 무장을 해제했다. 강하게 저항하던 집단도, 신식총의 총구를 들이대고 발밑에 총탄을 쏘아넣자, 만사 포기한 표정으로 투항했다.


"다들! 함성을 질러라! 우리들의 승리다!!"


시즈코가 승리의 함성(勝ち鬨)을 지르자, 여기저기서 병사들이 뒤를 따랐다. 타케다 군은 차례차례 무기를 땅바닥에 떨어뜨렸고, 큰 혼란도 일어나지 않은 채 역사에 이름높은 미카타가하라 전투는 막을 내렸다.




도쿠가와 군의 도착이 약간 늦었기에, 아깝게도 스와 카츠요리와 코우사카 마사노부를 놓쳤다. 하지만 신겐의 신병을 확보할 수 있었기에, 그들의 도망은 사소한 일이라고 시즈코는 판단했다.


신겐이 포박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시즈코는 포박된 것은 대역(影武者)인 타케다 노부카도(武田信廉)가 아닌가 조금 의심했다.

하지만 간자(토비카토(鳶加藤))가 입수한 타케다 신겐의 의류(衣類)와 포박한 타케다 신겐의 냄새가 일치한 것에 따라 타케다 신겐 본인이라고 단정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역인 노부카도도 포박되었다. 갑양군감(甲陽軍鑑)대로 신겐과 대단히 닮았기에, 구별하기 위해 대역 쪽에는 색깔 있는 천으로 팔을 묶고, 그만은 신겐이나 근시(近習)들과 다른 장소로 이동시켰다.


실은 시즈코는 신겐을 죽일지, 아니면 포박할지 마지막까지 판단하지 못했다. 이것은 노부나가나 이에야스(家康)의 정치적 의도가 얽힌 것이 원인이었다.

신겐이 침공한 것은 어디까지나 토오토우미(遠江)이며, 그곳은 노부나가가 아니라 이에야스의 영토이다.

신겐과 이에야스의 싸움에서 오다 군이 필요 이상으로 활약하면, 이에야스는 그렇다치고 도쿠가와 가문 가신들 사이에 불만이 남는다.

따라서 타케다 가문 가신들은 오다 군이 처치하지만, 신겐의 수급(首級)은 이에야스에게 일임한다는 것이 가장 타당한 판단이었다. 이에야스가 어느 쪽을 선택할지는 계책이 전달될 때까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이에야스가 고른 선택지는 포박이었다.

신겐을 죽이지 않고 포박한 이유는, 역시 정치적인 의도 때문이었다. 도망치는 신겐을 처치하면, 진짜 신겐은 도망쳤을 가능성이 있다고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타케다 군을 붕괴시킬 준비는 오다 군이 갖추었기 때문에,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의 부록(添え物)이라고 생각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한 판단들을 방지하기 위해서도, 살아있는 신겐을 포박하여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포박까지의 일련의 흐름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다와 도쿠가와 양쪽이 짠 계책이었다고 강변할 수 있다.

누가 봐도 이에야스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병력을 온존시켰다가 가장 중요한 부분만을 채가는 모양새지만, 그렇게 중요한 부분을 선뜻 내주는 영주(国人)는 없다.

중요한 부분을 취할 수 있을 만한 공헌이 있었다고 세상은 판단한다. 승자만이 역사를 이어갈 권리를 얻는다. 아무리 타케다 측이 아니라고 외쳐도, 싸움에 진 개가 짖는 것이라고 단정되어 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신겐만큼은 싸움에서 단순히 처치한다, 는 결론은 되지 않는다. 그 후의 외교 카드, 국내에서의 정치적 의도 등, 다양한 것들이 어쩔 수 없이 얽히게 되는 것이다.

애초에 이것은 신겐 뿐만이 아니라 노부나가아 이에야스도 마찬가지지만.


어쨌든 신겐이 포박되었기에 타케다에게 싸울 힘은 거의 남지 않았다. 스와 카츠요리가 타케다 가문을 계승하더라도, 점점 포위망이 좁혀져 으깨질 것이 뻔하다.

뭣보다 카츠요리는 지금부터 딜레마에 빠진다. 타케다의 힘을 되찾으려면 돈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터무니없은 징수를 했기에, 이미 카이(甲斐)에 남은 돈은 거의 없다.

돈이 없으면 힘을 되찾을 수 없다. 하지만, 돈을 지금 이상으로 터무니없는 방법으로 모으면 타케다 가문은 붕괴한다. 답이 안 나오는 이율배반이 지금부터 카츠요리를 덮치게 된다.


"휘이, 끝났다. 전부 외줄타기였지만, 어찌어찌 이쪽의 예상대로 진행됐네"


피로를 토해내려는 듯, 시즈코는 성대하게 한숨을 쉬며 어깨의 힘을 뺐다. 얼핏 보기엔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외줄타기의 작전이었다.


먼저 타케다가 호우다 언덕(祝田の坂) 입구에 진을 치는 것이 절대적인 조건이었다. 이것에 실패했을 경우, 지금의 상황이 되었을지는 대단히 의문이다.

왜냐하면 도쿠가와 군은 같이 출진한 척 하며 사실은 하마마츠 성(浜松城)에서 미카타가하라 대지를 크게 우회하여 호우다 언덕 출구로 이동, 시즈코의 신호를 받고 입구로 돌입했기 때문이다.

도쿠가와 군의 이동 루트 및 행군 시간까지 시즈코는 면밀하게 조사했으나, 도쿠가와 군이 호우다 언덕 출구에 도착하는 시각과 오다 군이 타케다 군을 상대하는 시각은 거의 같은 시각이 아니면 신겐에게 계책을 간파당할 위험이 있었다.

그 때문에, 만약 호우다 언덕 출구에 타케다 군이 기다리고 있었다면, 어슬렁어슬렁 나타난 도쿠가와 군은 순식간에 박살나고, 시간은 걸릴지언정 시즈코의 계책도 간파당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시즈코의 계책은 근본부터 뒤엎어졌다. 만약을 위해 시즈코는 호우다 언덕을 파뒤집어서 타케다 군이 행군하기 어렵게 해놓았다.

다만, 신겐이 그걸 무시하고 진군할 가능성이 있었기에, 호우다 언덕 입구에서 타케다 군이 진을 쳤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 시즈코는 내심 쾌재를 올렸다.

단, 호우다 언덕을 파뒤집은 것 때문에 도쿠가와 군의 도착이 약간 늦어졌다, 는 실패도 발생시켰다.


다음으로 갑자기 나타난 오다 군의 무장들은 어디서 어떻게 이동시켰는가.

그건 단순명쾌한 이야기로, 아시미츠(足満)가 싸움 전에 물자를 피스톤 수송했을 때 수송의 호위병으로서 하마마츠 성에 들어가 있었다.

그 후에는 시즈코의 군에 있던 본래의 물자수송 병사들을 호위병과 바꿔치기하면, 다소 인원수가 증감한 정도로 얼핏 봐서는 차이를 알 수 없다.

뭣보다 피스톤 수송을 하여 인원의 출입이 빈번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들어왔을 때와 나갈 때의 인원이 다르다는 건 쉽게 눈치챌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리하여 비밀리에 하마마츠 성에 오다 군의 정예들이 포진하게 되었다.


물론, 그들은 급거 불려온 것이 아니라, 시즈코가 병사들을 융통해달라고 사전에 부탁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나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 등 무장들 본인이 나올줄은 시즈코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부른 가장 큰 이유는 타케다 군에게 놀라움을 주기 위해서다. 싸움에서 혼란으로 사고가 정지하는 것은, 때때로 치명적인 패배를 불러오는 경우가 있다.

특히 타케다 신겐처럼, 직감이 아니라 이론으로 싸움의 흐름을 설계하는 사람에게 예상 외의 상황이 벌어지는 것은 사고(思考)의 구렁텅이에 빠지기 쉽다.


실제로, 바바 노부하루와 야마가타 마사카게가 전사하고 갑자기 오다 군의 증원이 나타난 것에 의해 혼란스러워진 신겐은, 차례차례 군이 와해되어 가는 것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간신히 신겐의 사고가 정상화되어 타케다 군을 재편하기는 했으나, 상황을 바꾸려고 시도한 일점돌파는 신식총에 의한 면제압 앞에 맥없이 무너졌다.


하지만 신겐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코우사카 마사노부에게 일점돌파가 실패했을 경우, 스와 카츠요리를 데리고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그 때문에,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은 스와 카츠요리를 놓치게 되었다.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완전히 타케다를 괴멸시킨다는 노부나가의 의도는 달성하지 못했으나, 그래도 이 이후에 타케다가 오다에게 이기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다만 타케다의 멸망은 노부나가의 비원(悲願)이기에, 설령 타케다가 약간의 병사밖에 움직이지 못하게 되더라도 완전히 멸망시킬 것이리라.


"훌륭합니다. 계책이 깨끗하게 들어맞으면 이토록 아름다울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투항병의 처리를 마친 타케나카 한베에(竹中半兵衛)가 시즈코를 치하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저, 사상자는 얼마나 나왔나요?"


타케다 군의 사상자는 상상도 되지 않지만,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에 얼마만한 사상자가 나왔는지 그것은 시즈코도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런 걸 파악하기 전에 차례차례 계책을 실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상황이 진정된 지금, 타케나카 한베에가 조사하여 겨우 사상자의 숫자가 판명되었다.


"후훗,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들의 사상자는 100 정도입니다. 도쿠가와와 함치면 300에서 400이 되겠지만, 이건 코우사카나 스와의 저항이 예상 이상으로 격렬했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타케다의 총 전력을 상대로 이 숫자는 놀랍다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과장스러운 손짓이나 몸짓을 하며 놀라는 타케나카 한베에였는데, 냉정한 그도 이번의 사상자의 숫자는 놀라운 결과였다. 동시에, 신식총이 싸움의 승패를 결정지어 부상자의 숫자를 늘리는 것도 이해했다.


"카하하하, 타케다가 꼬리를 말고 내빼는 모습은 두 번 다시 볼 수 없겠지! 그 우에스기(上杉)조차 본 적이 없는 광경, 정말로 속이 다 시원하군!"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광경이라는 건 찬성하겠지만, 너무 품위없이 떠드는 게 아니다"


"뭐 어떠냐. 이럴 때는 요란하게 떠드는 편이 다들 실감이 나는 법이다"


뒷정리를 마친 시바타나 미츠히데, 삿사 등 오다 가문의 무장들이 시즈코가 있는 본진으로 돌아왔다. 조금 늦게 모리 요시나리(森可成)나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가 돌아왔다.

그리고 타케다의 배후에 위치했던 도쿠가와 군이 돌아오게 되어 겨우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이 집결하게 되었다.

나가요시(長可)나 케이지는 그들보다 먼저 돌아와 있었으나, 모리 요시나리에게 칭찬받아서 감격에 겨워있는 나가요시를 진정시키기 위해 현재 시즈코의 곁에는 없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시즈코 님. 우선 저희 도쿠가와의 위기를 구해주셔서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돌아온 이에야스가 시즈코를 보자마자 머리를 숙이고 감사의 말을 했다. 뒤에 있던 타다카츠(忠勝)나 한조(半蔵)도 이에야스를 따랐다.

그들 뿐만이 아니었다. 별로 면식이 없는 도쿠가와 가문 가신들이나, 그들의 근시들, 거기에 병사들까지 마찬가지였다.


"머, 머리를 드십시오, 도쿠가와 님. 저 같은 것에게 숙여도 되는 머리가 아닙니다"


"아니오. 당신이 없었다면 우리 나라는 타케다에게 유린당했을 겁니다. 이 이에야스의 머리로 괜찮다면 얼마든지 숙이겠습니다"


곤란하네, 라고 생각한 시즈코는 시선을 돌렸으나, 보기좋게 전원이 그 시선을 피했다. 배신자들, 이라고 내심 우는 소리를 하면서 이에야스가 머리를 들기를 기다렸다.


"도쿠가와 님"


이윽고 이에야스가 머리를 들었을 때, 사쿠마(佐久間)와 히라테(平手), 미즈노(水野)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투구를 벗더니 이에야스에게 깊이 머리를 숙였다.


"도쿠가와 님이 타케다와 내통했다는 의심을 한 저희들의 무례,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도쿠가와 님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얄팍한 생각(浅慮)으로 도쿠가와 님과 가신 분들을 모욕한 저희들의 죄, 깊이 사죄드립니다"


"도쿠가와 님의 뜻에 따라 어떠한 처분도 달게 받겠습니다"


"그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지요. 결과가 좋으면 다 좋은 법, 입니다. 그런 것들은 다 흘려버리십시다"


"도쿠가와 님의 관대하신 뜻, 감사드립니다"


오다와 도쿠가와 사이에 있던 앙금이 사라지고 동맹이 굳건해졌다고 시즈코는 생각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하늘은 꼭두서니 빛(あかね色)으로 물들어 있었다.

싸움을 시작한 것이 점심 무렵이었으니, 이래저래 몇 시간은 싸웠다는 것을 시즈코는 새삼 인식했다.

하지만 시즈코에게는 타케다와의 싸움 후에 할 일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지금은 그걸 잊고 승리에 취해서 떠들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하마마츠 성으로 돌아갈까요"


"아, 그 전에 한 가지 상의드릴 게 있습니다"


"네? 무슨 일이 있었나요?"


바로 의논해야 할 일이 있었나, 하고 시즈코는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와 달리 귀여운 몸짓(仕草)에 타다카츠가 기절하려고 했으나, 뜨뜻미지근한 표정을 떠올린 한조와 야스마사(康政)가 재빨리 시즈코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도록 가렸다.

이에야스의 뒤쪽에서 수수께끼의 공방이 펼쳐지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시즈코는 이에야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포박한 신겐이 당신을 만나게 해달라고 난리라서 말입니다"


"아하, 네? 저를요?"


"예. 아무래도 저희들만으로 결정할 수 없어서, 판단을 여쭈러 왔습니다"


이에야스 왈, 신겐은 입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시즈코와 만나게 해달라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즈코는 어디까지나 노부나가의 가신이기에, 이에야스의 의향만으로 만나게 할 수도 없었다.


"만날 필요는 없다. 어차피 패전의 원한을 말할 뿐일 것이다. 그런 헛소리를 들어줄 필요는 없겠지"


시즈코가 생각하기 전에 아시미츠가 즉각적으로 거절의 의사를 드러냈다. 다들 판단을 망설이는 상황에서 순식간에 결론을 내리는 건 역시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으ー음, 딱히 상관없을 것 같긴 한데, 마지막에 만나는 게 나라면 나중에 불명예가 되지 않을까요?"


목이 잘리기 직전에 여자와 만났습니다, 라는 소리를 들으면 신겐의 명예가 상처를 입지 않을까 시즈코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자기 때문에 신겐이 조롱거리가 되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문제없을 것이다. 본인이 선택한 길인데, 그 결과를 본인이 달게 받아들이지 못하면 어쩔 것이냐"


"그런가요. 뭐 저쪽이 바란다면, 나는 딱히 문제없지만 말이에요"


시즈코의 한 마디로 면회가 실현되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최대의 공로자를 혼자 가게 할 수는 없었다. 사후처리에 몇 명 남겨놓기는 했으나, 태반의 사람들이 호위로서 시즈코를 따라가게 되었다.


(엄청난 상황이 되었네)


평소 이상으로 주위가 엄중하게 굳혀져 있는 것에 시즈코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와서 자신이 얼빠진 짓을 하면 그건 다른 사람의 불명예도 되기 때문에 호위를 받아들였다.

이동이라고는 해도 그리 긴 거리를 걷는 것은 아니었다. 신겐은 포로로 잡혔지만, 병 때문에 이동시킬 수 없어서 미카타가하라 대지에 임시로 세워진 진 안에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근시들도 또한 마찬가지로 포박되어 있었다.


지위도 고려하여 중앙에 이에야스, 좌측에 타다카츠 등의 도쿠가와 가문 가신들, 우측에 시즈코와 사이조(才蔵), 아시미츠, 그리고 시바타와 삿사 등의 오다 가문 가신들이 위치하게 되었다.

각자가 소정의 위치에 자리잡자 이에야스는 신겐을 데려오도록 명했다. 잠시 후 손이 뒤로 묶인 신겐을 병사들이 데리고 왔다.


신겐은 트레이드 마크라고도 할 수 있는 갑주나 투구는 착용하고 있지 않고 중(坊主)을 방불케 하는 복장이었다. 호흡 소리는 거칠어서 한눈에도 상태가 나쁜 것을 엿볼 수 있었다.


"기다리셨습니다. 당신의 요청대로, 고노에(近衛) 님의 따님을 모셔왔습니다"


신겐의 눈이 희번득거리며 시즈코를 포착했다. 모든 것을 꿰뚫어보려는 그 눈에, 시즈코는 자기도 모르게 움찔할 뻔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아시미츠가 앞으로 나와 신겐에게서 시즈코를 가렸다.


"살기를 뿜는다면 용서하지 않겠다"


"아니, 괜찮아요. 그보다 안 보이니까 비켜줘요"


신겐을 마주 노려보는 아시미츠였으나, 시즈코에게 거칠게 취급받고 맥없이(悄然) 물러났다. 자신에게 기합을 넣은 후, 시즈코는 한 호흡을 두고 신겐을 마주 바라보았다.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문득 신겐이 웃음을 떠올렸다.


"훗, 이런 맹한 계집에게 나는 패한 것인가. 하지만, 뭐라 말할 수 없는 심정이로다"


그건 신겐 나름의 칭찬이었으나, 시즈코는 누구와 만나더라도 매번 맹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에 울고 싶어졌다.

어째서 그런 평가가 되는 것인지 이상하게 생각한 시즈코였으나, 다른 무장들처럼 기백이 없고, 자칫 겁이라도 주면 순순히 말을 들을 것 같은 외모와 분위기를 가진 것이 원인이라고 본인은 깨닫지 못했다.


"고노에의 딸이여, 이름은 뭐라고 하느냐"


"어, 아, 네. 시즈코라고 합니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다. 그대는 이 나를 쓰러뜨렸다. 당당하게 행동해주지 않으면 내 이름의 체면이 말이 아니지"


그렇게 말하며 신겐은 웃었다. 그는 그저 기분이 좋았다. 인생에서 최초이자 최후의 대패배, 그것이 시즈코 같은 사람에게 당한 것이다.

다른 사람으로는 이런 기분이 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신겐은 막연히 생각했다.


"아니, 저 뿐만이 아니라, 다들 따라와 준 덕분입니다. 저는 뒤에서 이것저것 말하기만 한 것 뿐이에요"


"후하하핫! 천하의 타케다와의 승리를 우쭐해하지 않다니. 어디까지나 눈에 띄는 게 싫다, 인가. 너는 뭘 하더라도 스스로를 과시하려고 하지 않았지. 그렇기에 주위에서도 놓쳐버렸다. 나 자신도, 안 좋은 예감만 들었지 설명이 되지 않았기에 무시해 버렸지. 후훗, 완패로다"


그건 누구나 귀를 의심할 말이었다. 신겐이 명확히 패배를 인정했다. 그것도 완패라는 말로. 말을 꺼낸 신겐보다도, 오다-도쿠가와의 무장들 쪽이 동요했다.

주위의 놀라움을 무시하고, 신겐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말을 꺼낼 때마다 그는 마음 속에서 매듭을 짓고 있는 듯 했다. 신겐의 표정이 서서히 의연(毅然)한 표정으로 바뀌어 갔다.


"도쿠가와의 꼬맹아. 내게서 훔쳐간 지휘부채(軍配団扇)를 시즈코 님께 넘겨라. 그건 네놈 따위가 가져도 되는 물건이 아니다"


불손한 태도로 신겐은 이에야스에게 명령했다. 신겐의 당당한 태도에, 승자 측인 이에야스가 당황하고 있었다.

자리의 분위기에 휩쓸린 이에야스는 병사에게 명하여 신겐의 지휘부채를 가져오도록 했다. 잠시 후 병사가 신겐의 지휘부채를 쟁반에 얹어 돌아왔다.


"그거다, 틀림없군. 어서 넘겨라"


"저어ー, 분위기가 고조된 상황에서 죄송한데, 지휘부채보다 라이쿠니나가(来國長)라던가 이즈미노카미카네사다(和泉守兼定) 쪽이 좋은데요……"


시즈코가 작게 손을 들며 머뭇머뭇 신겐에게 말했다. 라이쿠니나가란 타케다 신겐이 애용했던 패도(佩刀)다.

역사적 사실에서는 신겐이 죽은 후, 우여곡절을 거쳐 에도(江戸) 시대에 야나기사와(柳沢) 미노노카미(美濃守) 요시야스(吉保)가 신겐의 선조 대대의 위패를 모신 절(菩提寺)인 에린지(恵林寺)에 봉납했다. 그 밖에도 (2대째) 이즈미노카미카네사다라고 신겐이 사용했던 애도(愛刀)가 있다.

시즈코에게는 신겐의 지휘부채를 받아도 쓸 데가 없었기에, 받을 수 있다면 그가 애용한 칼 쪽이 좋았다.


"……크, 큭큭큭, 하하하핫! 소문대로 칼 수집가라는 건가. 상관없다, 가져가라. 네가 가진다면 안심이다"


무슨 이유로 시즈코가 맘에 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신겐은 배포좋게 칼까지 시즈코에게 주었다. 이리하여 시즈코 앞에 신겐이 사용했던 지휘부채와 애도가 놓였다.

일순간 칼을 보고 눈을 반짝인 시즈코였으나,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이해하자 즉시 표정을 조였다.


"다음에는 천하(泉下, 저세상)에서 싸워보자"


이 세상에서 할 일이 끝난 신겐은, 이제부터 참수될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평온하고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제 이렇게 피곤한 건 사양이에요"


"웃기지 마라, 이기고 도망치는 것 따위 용납할 수 없다. 천하에서 가신들과 절차탁마하여, 이번엔 내가 네 간담을 서늘하게 해 주마"


시즈코의 대답이 히죽 웃은 신겐이었으나, 갑자기 그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격하게 기침을 했다. 세 번째의 기침에서 그는 입에서 피를 토했다.

신겐은 위암을 앓고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진상은 알 수 없다. 그 병세가 악화되었다고 판단한 시즈코는 위생병을 부르려고 했다.


"됐다, 내 몸이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지"


입 안의 피를 뱉어버린 후, 신겐은 호흡을 정돈했다. 침착함을 되찾자, 그는 주위의 놀라움을 무시하고 일어섰다.


"또 만나자"


그것이 신겐의 마지막 말이 되었다. 해가 지기 전, 그는 타다카츠의 손에 의해 목이 떨어졌다.

타다카츠가 신겐의 목을 벤 이유는, 신겐이 포박당했음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전국시대 최강의 이름에 걸맞는 최후를 보여준 데 대한,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의 무장들 나름의 배려(手向け)였다.

그리고 신겐의 목은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일 없이, 신겐의 근시들의 손에 의해 카이로 귀국했다.

타케다(武田) 토쿠에이켄(徳栄軒) 신겐(信玄),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전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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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가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