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 미녀 고생담
戦国小町苦労談
작가: 夾竹桃
어느 날, 한 명의 소녀가 전국시대로 타임슬립했다.
그야말로 신의 변덕, 악마의 심심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뜬금없이.
소녀는 세계를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디에나 있는 극히 보통의, 그리고 평범하고 수수한 소녀였다.
그런 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다.
전국 시대를 살아남는다 - 그것 뿐이다.
번역: 가리아
겐키(元亀) 원년(元年), 제 1차 오다(織田) 포위망
064 1570년 3월 상순
겨울의 추위가 누그러지기 시작하는 2월 하순, 오다 가문 가신들 사이에서는 청주를 뜨겁게 데워 마시는 것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탁주로도 뜨겁게 데워마시는 건 가능하지만, 데우는 것으로 독특한 튀는 맛이 나오거나 신맛이 강해지는 술이 많다.
그에 반해 청주는 데우는 것으로 한층 향기가 짙어지고, 요리와의 상성이 증가한다.
또, 첫잔 째부터 마신 만족감을 얻을 수 있고, 음주 속도가 적정하다면 적은 양으로도 적당히 취할 수 있다. 게다가 알코올의 신체를 따뜻하게 해주는 작용이 강해지기 때문에, 추운 날에 청주를 뜨겁게 데워마시는 것은 이치에 맞는다.
탁주는 뜨겁게 데워마시는 것이 어려운 술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청주보다 못하다는 것은 아니다.
차갑게 식히면 풍부한 맛과 목넘김이 좋아지는 탁주는, 냉주(차게 한 청주)와는 다른 맛이 있다. 또, 주질이 청주보다 변하기 쉬워, 경년변화(経年変化, ※역주: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생하는 변화)에 따른 숙성을 즐길 수도 있다.
오다 가문 가신들 사이에서도 탁주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어, 전원이 한결같이 뜨겁게 데워마시는 데 빠져 있는 것은 아니다.
차게 해서 마시는 탁주와는 달리, 청주를 뜨겁게 데워마시는 데는 한 가지 결점이 있다. 그것은 안주가 먹고 싶어지게 되는 것이다.
알코올에는 위액의 분비를 늘리고 소화를 촉진하는 작용이 있다. 따라서 탁주라도 안주가 먹고 싶어지게 되는 경우는 있지만, 뜨겁게 데워마실 경우 알코올이 데워지기 때문에 식욕을 증진하는 2차 효과가 강하다.
이것은 딱히 일본주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소주(焼酎)를 뜨거운 물로 희석한 것, 쓴맛 성분 홉이나 탄산 가스가 있는 맥주도 식욕 증진 효과가 높다고 한다.
술안주를 구하는 것만이라면 기후(岐阜)에서도 가능하지만, 바다를 접하고 있는 오와리(尾張) 쪽이 종류는 풍부하다. 그런 의미에서도 시즈코가 있는 장소는 최적이었다.
숙박할 시설이 갖춰져 있고, 술안주가 되는 것들이 많이 보관되어 있다. 기후에서 적당히 가깝고, 또 바다와도 적당히 가까우며, 다음날에는 따뜻한 목욕물에 들어갈 수 있다, 고 하면 유행하지 않을 리가 없다.
계절에 따르긴 하지만 가지의 간장조림(煮浸し)이나 말린 전갱이(真鯵), 겨울숭어의 훈제, 생선뼈를 가볍게 구운 것, 고기 감자조림(肉じゃが), 문어의 초된장무침, 냉두부(冷奴) 등 다종다양한 안주가 선호되었으나, 그 중에서 가장 선호되는 것이 카라스미였다.
짭쪼름하고 맛있는 카라스미(※역주: 어란. 명란젓과는 다른 것임)는 일본주와의 상성이 좋고, 스스로 한 조각의 두께를 조정할 수 있는 점이 인기의 이유였다.
일본에서 카라스미라고 하면 숭어의 난소(卵巣)로 만든 것, 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나 숭어의 난소는 카라스미 중 하나에 불과하며, 본고장인 지중해 연안에서는 다양한 바닷생선의 난소가 사용된다. 카가와(香川) 현에서는 삼치(サワラ) 또는 고등어의 난소를 사용한다.
따라서 어떤 난소를 사용하더라도 카라스미의 제법에 따라 만들면 카라스미가 되는 것이다.
손이 많이 가는 관계로 카라스미의 값은 비쌌기에, 주머니 사정이 허전한 사람은 선뜻 손대기가 어렵다.
하지만 난소의 된장절임말림(味噌漬け干し)이라는 유사품이 만들어져서, 하급무사라도 카라스미에 가까운 맛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만드는 법은 단순해서 된장에 마늘, 미림, 술을 섞어서 터퍼(Tupper) 등의 보존 용기에 된장, 천, 난소, 천, 된장의 순서대로 넣고 10일 정도 차고 어두운 곳에 보관한다.
그 후에는 그물(干し網)에서 카라스미처럼 표면이 딱딱해질 때까지 천일(天日) 건조시키면 완성이다.
낮은 가격에 염분이 적다는 이유로 인기 상품이 되었지만, 술의 소비량이 급증하여 지갑을 직격한다는 문제도 발생했다.
뜨겁게 데워 마실 때의 안주는 뭐가 제일이냐 하는 것으로 백열된 논쟁을 벌인 가신들이었으나, 그들의 주군인 노부나가는 술이 아니라 망토의 완성에 열심이었다.
처음에는 시즈코에게 만들게 한 망토를 걸치고 있던 그였으나, 후에 선교사들로부터 헌상된 빌로드의 망토를 보고 이것저것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생겼다.
이것은 시즈코의 성격상 어쩔 수 없는 것인데, 그녀는 외관보다 기능을 중시했다. 게다가 색상은 차분한 색을 좋아했기에,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노부나가로서는 영 마음에 차지 않는 색상이었다.
노부나가는 선명한 붉은 색을 한 망토를 원하여, 홍화(紅花) 로 염색한 시제품을 장인들에게 몇 번이나 만들게 했다.
최종적으로 노부나가의 마음에 든 제법으로 완성된 붉은색이 채용되었다.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천의 색 이외에도 노부나가는 많은 공을 들였다. 망토의 끝부분 처리를 하고, 그 위에 금사(金糸)나 은사(銀糸)로 자수를 넣었다.
등 부분에 닿는 곳에는 일면에 무늬가 그려진데다, 끝부분과 마찬가지로 금사나 은사로 자수를 넣었다. 고정구 부분도 훌륭할 정도로 정교한 세공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세부에 이르기까지 노부나가의 취미가 채용된, 시가총액 불명의 노부나가 전용 망토가 완성되었다.
그 완성도에 대단히 만족한 노부나가는, 관련된 장인들에게 상을 내리고 그들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후하하핫! 어떠냐, 내 망토는! 큰 돈이 들어갔지만 그에 걸맞는 완성도가 아니냐!"
완성된 망토를 노부나가는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그럴 때, 모(苗)의 경과보고와 도우조 하치야(堂上蜂屋) 곶감을 헌상하기 위해 노부나가를 방문한 시즈코를 발견했다. 그는 불문곡직하고 시즈코를 붙잡아서는 그녀에게 망토의 완성도를 자랑했다.
아주 기분이 좋은 상태로 망토를 휘날리는 노부나가에게, 시즈코는 어떻게 대답할지 속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대, 대단히 잘 어울리십니다"
"음! 그렇지, 그렇지!"
노부나가가 아주 기분이 좋은 태도를 보니 무조건 칭찬만 하면 되는 것이다, 라고 시즈코는 깨달았다. 다만, 노부나가가 조금이라도 기분이 변하면 즉시 대답이 바뀌기 때문에 잘 주시할 필요는 있다.
"그럼, 다른 이야기가 되는데, 시즈코. 기술자 마을에서 굴리고 있는 짐수레는 언제 이쪽으로 돌릴 수 있느냐?"
"어, 아, 리어카 말씀이신가요. 그거라면 큰 문제를 해소했기에 현재 양산중입니다. 4월 말에는 100대 정도 생산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습니다"
"흠…… 쌀을 사용하는 이상, 과잉 생산은 어려운가. 하지만 짐수레를 사용한 병참을 조기에 운용하게 하고 싶다. 짐수레를 10대, 제 5군에 납품하라"
"옛, 알겠습니다"
지금부터 바빠질 것이라고 시즈코는 예감했다.
애초에 리어카의 고무 타이어에는 팩티스로 대용하고 있다. 역시 고무의 대용품으로 선택되는 만큼, 팩티스의 성능은 고무에 가깝다.
고무와 비교하면 고온에 대한 내구성에 난점이 있기는 하나, 현재 상황에서 고온 환경하에서 타이어를 사용할 일은 없다.
시판되고 있는 고무와 동등하다고 봐도 좋은 팩티스는, 시즈코에게 농기구를 진화시킬 길이 열린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사실은 생고무가 있으면 좋겠지만…… 현재는 인도 고무나무밖에 없지. 당분간은 고무 수액을 수입해야 하려나)
현대에서는 파라 고무나무(Hevea brasiliensis)에서 얻을 수 있는 고무액이 일반적이다.
어째서 파라 고무나무가 유명하냐고 하면, 브라질 국외로 반출이 금지되어 있는 파라 고무나무를, 영국이 몰래 가지고 가서 고난 끝에 식민지 각지에서 재배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국이 원산지 브라질과 마찬가지인 열대 우림 지대의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큰 이유이다.
게다가 원산지인 남미에서는 자낭균(子嚢菌)에 의한 남미 엽고병(葉枯病) 때문에, 고무나무를 원하는 대로 늘릴 수 없었다. 따라서 지금도 원산지에서는 천연의 자생수목으로부터 고무액을 채취하고 있다.
수액의 양은 인도 고무나무보다 파라 고무나무 쪽이 많지만, 수액의 질은 인도 고무나무 쪽이 우수하다.
또, 인도 고무나무는 내음성(耐陰性), 내서성(耐暑性), 내한성(耐寒性)이 뛰어나, 일본에서는 2차 대전 전부터 관엽식물로서 재배되었다. 지역에 따라서는 정원에 심어서 크게 자란 인도 고무나무도 있다.
(고무의 묘목은 수입한다고 치고…… 유리 가공도 궤도에 올라서 워디안 케이스(ウォードの箱)라는 성과도 나왔어. 이시야마(石山) 전투 때까지 쌍안경이나 필드 스코프가 완성되면…… 나쁘지 않은 성과이려나)
테라리움의 선구자 격이 된 워디안 케이스란, 대기오염이 심각했던 런던에서 외부와 단절된 세계를 내포하는 획기적인 발명이다.
1829년 무렵에 외과 의사였던 나다니엘 백쇼 워드(Nathaniel Bagshaw Ward)가 발명한 이 유리 용기는, 용기 바깥 세계로부터 일종의 독립된 환경을 유지하는 것으로 내부에 식물의 생육 환경을 봉입한 채 운반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이것은 세계 각지에서 식물을 모으는 플랜트 헌터들의 활동을 크게 돕게 되어, 선구적인 식물 재배 용기로서 평가가 높다.
우수한 가반성(可搬性)을 가진 워디안 케이스를 이용한 사례로서, 스코틀랜드의 식물학자인 로버트 포츈(Robert Fortune)은,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차나무 2만 그루를 인도 동북부의 아삼(Assam) 주로 운송했다.
그 밖에도 브라질에서 비밀리에 반출한 파라 고무나무 씨앗의 발아에 성공한 영국은, 이 케이스를 사용하여 스리랑카의 실론(Ceylon) 섬이나 일대 고무 농원을 계획하고 자국령이었던 말레이시아로 운반했다.
현대에서는 육상에서만의 환경으로 사육, 재배하는 테라리움, 수중에서만의 환경으로 사육, 재배하는 아쿠아리움, 수중과 육지가 혼재한 환경에서 사육, 재배하는 아쿠아테라리움 등, 워디안 케이스처럼 용기 내부에서 사육, 재배, 감상하는 기술이 여럿 발명되어 있다.
"(하지만 유리 연마가 장인의 감에 의존하고 있으니 양산이 힘드네)"
유리 제조가 궤도에 올랐다고는 해도, 아직 유리 제품은 희소품 취급이었다.
질이 나쁜 유리 제품이나 장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 유리 제품은 세상에 나오지 않고 잘게 분쇄되어 다시 재료에 섞는 것도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유리 장인이 적은 것이었다.
원재료에 소다 석회를 넣더라도 높은 투명도를 내기 위해서는 우수한 연마 기술이 요구되는 것이다.
세상에 나와 있는 유리 제품은 대단히 적어서, 일본에서도 오와리 하리코(尾張切子)를 소지하고 있는 것은 노부나가와 가신인 모리 요시나리(森可成)와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 노부나가로부터 헌상받은 천황, 챠챠(茶々)의 출산 축하 선물로 받은 아자이 나가마사(浅井長政) 뿐이었다.
"뭘 중얼거리고 있는 게냐"
"어, 아뇨, 죄송합니다. 잠시 생각할 것이 있었습니다"
"흠…… 뭐 좋다"
항상 있는 일, 이라고 생각하고 노부나가는 그 이상 시즈코를 추궁하지 않았다.
그 후, 도우조 하치야 곶감을 헌상하고 이야기를 끝내려도 획책한 시즈코였으나, 유감이지만 그 행위는 노부나가의 망토 자랑에 곶감 이야기가 더해졌을 뿐이었다.
3월 상순, 시즈코는 양잠업(養蚕業)을 하고 있는 마을을 방문했다. 이것은 노부나가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개인적인 이유에 따른 방문이었다.
"잘 없네, 비색 잉어(緋鯉)"
개인적인 이유란 잉어(真鯉)의 변종인 비색 잉어를 찾기 위해서였다.
잉어는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케이코(景行) 천황이 연못에 풀어놓았다는 기술이 있을 정도로 옛부터 사육되고 있었다.
양잠업의 부산물인 누에의 번데기는 잉어의 먹이가 되기 때문에, 시즈코는 양잠업을 하고 잇는 마을에서 잉어의 사육을 하도록 했다.
약용 생선이나 요양 생선이라고 할 정도로 영양이 풍부하고, 더러운 물에도 대응할 수 있는 높은 환경 적응 능력이 있기에, 양식하기 딱 좋은 민물고기였다.
메기도 양식하고 싶었던 시즈코였지만, 부화에서 치어가 될 때까지 수고가 장난이 아닌데다, 잉어와 달리 어느 논밭에서나 살고 있는 메기를 양식할 의미가 별로 없었기에 보류했다.
"색깔이 화려한 잉어라. 나는 본 적이 없는데, 사이조는?"
"없군. 그래서 흥미가 생긴다"
"둘 다 본 적이 없나. 이렇게…… 새카만 몸이 아니라 화려한 붉은 색의 개체인데…… 역시 돌연변이종은 그렇게 간단히 발견되지는 않는 건가"
하지만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비단잉어의 원조가 된 비색 잉어는, 식용 잉어를 양식할 때 생겨난 품종이다. 그렇다면 양잠업을 하고 있는 마을의 어딘가에 비색 잉어가 탄생할 가능성은 제로는 아니다.
"맞다, 수전양리(水田養鯉)를 하는 마을에도 가보자"
수전양리란 이름 그대로 수전(水田)에 잉어의 치어를 방류하여, 쌀농사와 병행하여 잉어를 키우는 양식 방법이다.
오리(合鴨, ※역주: 집오리와 청둥오리의 교잡종) 농법과 마찬가지로 수전에 잉어를 풀면, 잉어의 왕성한 식욕으로 해충이나 잡초가 격감한다. 또 잉어가 헤엄치면서 물이 흐려져서 잡초가 싹트는 것을 막는다.
드물게 잉어가 벼를 다치게 하는 경우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풀어 키우는 것만으로도 성장하는 이점이 있다.
하지만 태반의 잉어는 1년 안에 식용으로 쓰여서, 몇 년에 걸쳐 양식되는 잉어는 드물다.
그에 반해 양잠업이 성행하는 마을은, 먹이인 누에고치가 쉽게 손에 들어오기 때문에, 수전이 아니라 저수지(ため池)나 그물가두리(網いけす) 양식이 성행했다.
1년생 잉어에서 3년생 잉어까지 출하 연수가 조정하기 쉬워서 저수지별로 구별되어 있기 때문에, 수전양리처럼 성장 연수가 다른 잉어가 섞일 걱정도 없다.
다만 수전양리도 저수지 양리도, 4년 이상 양식에 시간을 들이는 일은 없다. 이것은 4년생 이상의 잉어는 살이 단단해지고 산란 등으로 영양을 잃어버려 맛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으음…… 역시 안 되나"
수전양리가 도입된 5개의 마을을 돌아봤지만, 여전히 돌연변이종의 잉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겉보기에 색이 화려한 잉어는 크기를 묻지 않고 고가로 사들이겠다는 뜻을 촌장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비색 잉어 찾기는 끝났다.
"산책 대신 시로를 데려오길 잘했네. 이 북슬북슬함이 나를 치유해줘"
풀이 죽었으면서도 시즈코는 팔에 앉아 있는 부채머리 독수리를 쓰다듬었다. 이름 때문에 고민한 시즈코였으나, 부채머리 독수리의 깃털이 허옇다는 것으로 그녀는 시로가네(銀)라는 성의없는 이름을 붙였다.
부엉이들은 형을 아카가네(銅), 동생은 쿠로가네(鉄)라는 이름을 붙였다. 단순히 금속에서 따왔지만, 의외로 부엉이들이나 부채머리 독수리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다만 다들 이름에 '가네'가 공통되어 있었기에, 풀 네임을 부르면 다들 동시에 반응한다. 따라서 부채머리 독수리를 '시로(白)', 부엉이 형을 '아카(朱)', 부엉이 동생을 '쿠로(黒)'라고 부르고 있다.
도중에 아무 일 없이 집에 도착하여 짐을 내려놓은 후, 시즈코는 집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에 있는 연못으로 갔다.
"기껏 만든 연못인데 허무하네……"
금붕어나 비색 잉어용으로 서서히 깊어지는 얕은 여울과 들새로부터 도망칠 수 있도록 깊이가 최대 80cm로 변화하는 연못에, 자갈을 깔고 수초를 심고, 미생물로 물을 정화시키는 시스템을 설치했으나, 중요한 잉어나 금붕어가 없으면 그냥 물구덩이였다.
자연석으로 일본 정원의 분위기를 낸 연못의 얕은 여울에 작은 새들이 놀러오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얕은 여울은 작은 새들이 아니라 아카가네와 쿠로가네가 멱을 감는 장소가 되었다.
깨끗한 걸 좋아하는 건지 두 마리는 오늘도 힘차게 멱을 감고 있었다. 주위가 물바다가 되어 있었지만, 쿠로가네는 신경쓰지 않고 얕은 여울에서 날개치고 있었다.
아카가네는 아예 날개를 펼치고 재주좋게 떠 있었다. 그 모습은 리조트에서 풀장에 떠 있는 비치 매트에 누워 있는 사람과 마찬가지였다.
"너희들, 너무 긴장감이 없는 거 아냐?"
연못에 떠 있는 아카가네를 쿡쿡 찔러도 반응이 둔한 걸 보고, 시즈코는 여러가지 의미에서 두 마리의 장래에 불안감을 느꼈다.
벚꽃이 피는 계절에 들어서자, 노부나가는 나가마사(長政)에 대한 책략을 강화했다.
선물을 보내거나, 편지를 교환하거나, 때로는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거나 하면서 정력적으로 나가마사를 자기 진영에 흠뻑 빠지도록 유도했다.
나가마사의 부친인 히사마사(久政)는 노부나가의 꿍꿍이를 눈치채고 방해 공작을 펼쳐 멀리 하도록 했으나 효과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것은 노부나가가 펼치는 경제 정책의 영향으로 오우미(近江) 국의 경제도 자극받았고, 또 쿄(京)와 미노(美濃)를 잇는 요충지가 있는 것 때문에 물류가 활발해져, 결과적으로 히사마사의 시대보다도 오우미 국은 윤택해졌기 때문이다.
이익이 노부나가에게 집중된다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오우미 국에 사는 이런저런 사람들의 지갑이 두둑해졌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이익을 우선시하고 히사마사의 이야기를 흘려들었다.
지금의 자신들은 노부나가로부터 떡고물을 받아먹는 빨판상어다, 라고 생각하고 히사마사는 노부나가에 대한 반발이 강해졌다.
히사마사의 동향을 바로 곁에서 보고 있던 나가마사는 노부나가에게 어느 정도 존경을 품으면서도, 사실은 그가 위구할 정도로 노부나가에게 마음을 뺏기고 있지는 않았다.
오우미는 쿄로 이어지는 요충지이지만, 비와(琵琶) 호수 때문에 인구는 적다. 필연적으로 경제를 활성화하려면 사람의 이동이 활발해질 필요가 있다.
그걸 이해하고 있었기에, 노부나가의 경제정책을 나가마사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동시에 아버지인 히사마사와 그 똘마니들의 현실감각 부족에 진절머리를 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노부나가, 나가마사, 히사마사 사이에서 격렬한 다툼이 벌어지고 있던 무렵, 노히메를 필두로 마츠, 오네, 에이 등 네 명이 시즈코가 있는 곳에 모였다.
"호홋, 겨우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냐"
"네, 대단히 시간이 지체된 점을 사죄드립니다. 하지만 겨우 낙농업도 궤도에 올라, 이렇게 노히메 님이 시식해주실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녀들의 목적은 흑돼지의 요리였다. 그것 이외에도 양이나 소의 유제품이나 고기 등, 전국시대에서는 희귀한 요리가 나왔다.
하지만 소고기를 맛있게 만들려면, 운동을 시키지 않고 살찌게 하여 지방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 물론, 지방이 적은 붉은 고기라도, 무나 파인애플 즙으로 고기를 부드럽게 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신경쓸 것 없느니라, 기다리는 것도 즐거움의 하나이지. 자, 잡담으로 꽃을 피우는 것도 재미있겠다만, 그래서는 요리가 식어버리지. 우선 요리를 즐기도록 하자"
"옛, 그럼 우선…… 남만의 음료인 '우유'와 '산양젖'을 시식해 주십시오"
노히메들의 앞에 우유와 산양젖이 놓였다. 양쪽 다 말 그대로 소의 젖과 산양의 젖이다.
유리의 생산 숫자가 적었기에 양쪽 다 자기로 만든 머그컵에 들어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구분감을 느낀 미츠오는, 머그컵에 우유를 넣는 것에 저항감은 있었지만 잠시 생각한 후 눈을 감기로 했다.
다행히 노히메들은 머그컵에 우유가 들어 있는 것에 혐오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녀들은 우유를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응시했다.
전국시대의 일본에는 우유를 마시는 습관 따윈 없었다고 생각되기 쉬운데, 실은 6세기 무렵부터 한정적 범위에서 유제품으로서 식탁에 올랐다.
우유의 전래에 대해서는 전술한 6세기 무렵에 고토쿠(孝徳) 천황에게 약으로서 헌상된 기록이 있으며, 우유를 관리하는 직책으로서 야마토쿠스시노오미(和薬使主)의 칭호가 내려졌다.
그 이후, 교토(京都)나 나라(奈良)에 유호(乳戸)라고 불리는 낙농가가 늘어나, 천황 일족에게 우유를 공급했다고 한다.
게다가 낙농의 확대에 따라 생산량이 소비량을 웃돌면 우유를 10분의 1까지 졸인 유제품인 소(蘇)가 등장한다.
이에 따라 927년에 소를 세금으로서 납부하는 '공소(貢蘇)' 제도가 성립되었다.
생산량의 확대와 함께 천황 가문 뿐만 아니라 후지와라(藤原) 가문 등의 유력 귀족에도 소는 건강식품 또는 약으로서 중용되게 된다.
하지만 헤이안(平安) 말기에 무사 계급의 대두와 함게 소보다도 말의 생산이 중요시되어, 우유는 공식적으로 자취를 감추게 된다.
다시 우유가 주목받게 되는 것은 에도(江戸) 시대까지 시간을 진행시킬 필요가 있다.
에도(江戸) 막부(幕府) 제 8대 쇼군(将軍)인 요시무네(吉宗)가 네덜란드 인 수의사로부터 말의 치료에 우유나 버터가 좋다고 추천받아 인도에서 흰 소를 세 마리 수입했다.
이것을 근대 낙농의 선구자라고 하는 치바(千葉)의 미네오카(嶺岡) 목장에서 사육하여, 말의 치료를 시작으로 이 소의 젖으로 만든 소(蘇)를 백유락(白牛酪)이라고 불렀으며, 쇼군이나 다이묘(大名)의 식탁에 공급되었다.
산양젖도 우유와 마찬가지로 긴 역사를 가지며,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치즈는 산양젖으로 만들었다고도 한다.
일본에서는 15세기 무렵에 중국에서 산양이 전래되었다고 하나, 이것은 고기를 얻기 위한 것으로, 큐슈(九州)나 오키나와(沖縄) 등 일부 지방에서만 사육되는 데 그쳤다.
본격적으로 젖을 얻기 위한 산양은 페리 제독(※역주: Perry, Matthew Calbraith; 일본의 개항을 이끈, 소위 말하는 '흑선내항' 사건에서 미군 함대를 지휘했던 인물)이 내항한 칸에이(寛永) 시대에 도입되었다.
즉 시즈코가 사육하고 있는 산양도 고기를 얻기 위한 것이지만, 당연히 임신하면 젖을 생산한다.
단순히 채취 가능한 젖의 양이 젖을 얻기 위한 품종에 비해 적은 것 뿐이다.
"짐승 젖 따위를 마시다니, 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입에 잘 맞는구나. 나는 산양젖이 마음에 드느니라"
짐승 젖이라고 하여 경원되지 않을까 걱정했던 미츠오였으나, 노히메는 그 정도를 신경쓰는 인물은 아니었다. 물론, 그녀 뿐만 아니라 마츠나 오네, 에이도 마찬가지였다.
"저는 우유가 마음에 드는군요. 마츠 님은 어느 쪽이신가요?"
"저는 양쪽 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후훗, 이렇게 어른이 된 지금 다시 젖을 마실 줄은 생각하지 못했구나"
"남만에서는 우유나 산양젖은 옛부터 건강에 좋다고 하여 즐겨 마셨습니다. 특히 산양은 잡식이지만 소식이고, 또 소보다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높기 때문에, 산악 지대 등 특수한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귀중한 영양원으로서 중시되고 있습니다"
애초에 산양은 산악 지대의 단애절벽에서도 살 수 있는 높은 신체 능력을 가진 동물이다.
따라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지역인 히말라야 산맥에서도, 산양은 가혹한 환경에도 끄떡없이 생존하고 있다.
"흠…… 나쁘지 않구나. 하지만 오늘의 주역은, 류큐 국(琉球国, ※역주: 오키나와)인가에서 들여온 흑돼지이지. 우유나 산양젖이 좋더라도, 흑돼지가 좋지 않으면 의미가 없느니라"
"이거 참 엄하시군요. 하지만 안심하십시오. 오늘은 흑돼지의 모든 것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식후의 남만 과자도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그 말에 소성들이 반응하여, 요리가 노히메들 앞에 놓여졌다.
"설명드리겠습니다. 밥은 흑돼지의 생강구이덮밥, 국은 돼지국(豚汁)입니다. 또 고기만을 즐겨주시기 위하여 큐브 스테이크에 커틀릿, 소시지를 준비하였습니다. 입가심으로는 몇 종류의 절임이 있습니다"
"호한(芳飯)과 비슷하지만, 된장국이 없군. 대신 고기에 즙이 뿌려져 있구나"
"된장국을 빼다니 참신한 발상이구나. 우리들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요리로다"
"좋지 않습니까. 새로운 요리라는 것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으로 태어나서 퍼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겉보기가 어찌되었던 맛있는 것은 맛있고, 맛없는 것은 맛없지. 다만 그뿐이니라"
덮밥(丼もの)이나 치라시 초밥(ちらし寿司)의 원점은, 밥 위에 생선이나 야채를 썰어 얹고, 그 위에 된장국을 붓는 호한(芳飯)이 원점이라고 한다.
하지만 주식인 밥과 반찬을 따로따로 내놓는 것이 기본인 일본에서는, 현대에도 주식에 반찬을 얹는 것을 기피하는 사람이 있다.
(상당한 모험이었지만, 뭣보다도 임팩트가 필요했으니까요. 어쩌면 예술가가 귀족에게 후원을 부탁할 때라는 건, 지금의 저와 마찬가지로 위장통을 느끼면서 반응을 살폈던 걸까요)
자칫 잘못하면 노히메들을 격노하게 만들었을테지만, 그런 일은 없이 그녀들은 즐겁게 수다를 떨면서 요리를 비웠다.
그녀들의 기분이 좋은 상태라면 부탁하기 쉬울 거라고 미츠오는 생각했다. 하지만 미츠오가 뭔가를 말하기 전에, 노히메는 그가 어떤 소원을 입에 올릴 지 추측했다.
"맛있었다, 미츠오. 이만하면 틀림없이 주군께서도 마음에 들어하실테지. 츠루히메(鶴姫)에 대해서도 내가 잘 말씀드려 주마"
"감사합니다"
시마즈(島津) 가문에서 시집온 츠루히메에게는, 오와리, 미노의 이동에 제한이 걸려 있었다. 특히 중요한 거점에 대해서는 상당히 까다로운 상태였다.
당연하지만 시즈코가 있는 곳으로 그녀는 오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입수할 수 있는 도구 종류도 나름대로 제한이 걸린다는 불편한 생활을 강요받고 있었다.
하지만 노히메가 말을 잘 해준다면, 상당히 생활이 편해질 거라고 미츠오는 생각했다.
"(사정을 설명한 기억은 없습니다만…… 노부나가의 정실이니까 알고 있어도 이상하진 않겠군요) 식후에는 남만 과자인 바움쿠헨(Baumkuchen)을 드셔주셨으면 합니다. 특수한 조리 기구가 필요했습니다만, 시즈코 씨의 협력을 받아 만드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그렇지, 시즈코는 어찌된 것이냐? 녀석이 이런 자리에 나오지 않다니, 이상한 일도 다 있구나"
"오늘은 제 흑돼지 시식회였기에, 나서는 것은 실례라 하며 뒷바라지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이번에는 시즈코의 뜻을 받아들여, 미츠오의 요리를 진지하게 즐기도록 하자꾸나"
"감사합니다 (틀림없이 장난감이 될 테니 도망친다, 라고 말한 건 못 들은 걸로 하는 게 좋겠지요)"
미츠오의 마음 속의 말대로, 시즈코는 노히메의 장난감이 되기 전에 전략적 철수를 완료했다.
노히메가 흑돼지에 큼직하게 인증도장을 찍고 있을 무렵, 시즈코는 아시미츠와 함께 과수원에 있었다.
"고기 요리는 역시 후추가 있으면 좋겠네"
"일본의 환경에서 후추의 재배는 어렵지 않을까"
후추는 인도 원산의 후추과 후추속의 덩굴성 식물이다. 일본에서 재배하려면 열대성 식물을 재배하기 위한 온실 환경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후추에 대한 지식과 재배 기술이 요구되기 때문에, 일반적인 가정 텃밭에는 맞지 않는 작물이다.
"확실히 어렵네. 뭣보다 씨앗의 발아율이 너무 나빠. 하지만…… 한 번 발아하면 비닐하우스만 있으면 해볼만 해"
"……비용적인 의미에서 수지가 맞지 않는다, 고 시즈코는 말하지 않았었던가"
"현대 일본에서는 그렇지. 확실히 그 시대에서 나는 후추의 재배에 도전했지만…… 그것도 그냥 오기로 했던 것 뿐이야. 하지만 전국시대에 후추 재배가 가능하다면, 우수한 교역품이 될 거야"
"그걸 위해서 비닐하우스가 필요하다는 것이냐"
"유리 하우스는 고도의 건축기술이 요구되니까. 뭐 시험적으로 건축해보고는 있지만…… 어려우려나. 오, 귤과 레몬을 접붙이기로 늘리기 위한 밑나무는 순조롭게 자라고 있네"
귤과 레몬은 양쪽 다 감귤류로 분류되기에, 밑나무는 탱자나무가 가장 우수하다.
일반적으로 접붙이기는 육종연한(育種年限)의 단축을 꾀하기 위한 기술이지만, 또 하나 고접(高接ぎ)이라고 불리는 기술이 있다.
이것은 수익성이 저하된 품종을, 새로운 품종으로 단기간에 갱신하기 위한 기술이다. 이 기술을 응용하면, 한 그루의 나무에 몇 종류나 되는 과수를 만들 수 있다.
사과의 예를 들면, 어떤 품종의 사과 나무를 밑나무로 하여, 후지(ふじ), 츠가루(つがる), 무츠(むつ, ※역주: 셋 다 일본 사과의 품종명으로 보임) 등 세 종류를 수확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고접은 품종에 따라서는 성공률이 낮아서, 열 그루 정도 고접했는데 전멸, 이라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접붙이기는 문제없나. 얘기를 되돌리겠는데, 후추를 키우려면 온도계가 필요할 거라 생각하는데 그건 어쩔 거지?"
"응? 간단한 스트로 온도계라면 이미 실용화했는데? 다만 비닐하우스 같은 장소가 아니면 별로 의미가 없지만"
"……확실히 후추는 7도 이하가 되면 시들었지. 그럼 후추의 묘목이나 씨앗이 손에 들어오고 비닐하우스가 완성된다면 후추 재배에 착수한다는 건가"
"실제로는 더 귀찮은 일이 있을거라 생각해. 묘목이나 씨앗의 입수에는 큰 돈이 필요하고, 전국시대의 일본에서 발아할지 어떨지도 모르니까"
후추는 씨앗을 심은 후 열매를 수확할 때까지 3년이 걸리며, 그 이후로 15년에서 20년 동안은 수확할 수 있다.
시즈코가 후추 재배에서 가장 고생한 부분이 낮은 발아율이었다. 후추는 씨앗부터가 아니라 꺽꽂이로 늘리는 이유로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후추의 씨앗을 발아시키는 것은 지극히 어려웠다.
결국, 온도나 수량을 부지런히 기록하여 최적의 온도와 수량을 찾아내기 위해 열 알에 5백엔인 씨앗을 20봉지 정도 소비했던 시즈코였다.
아무리 시즈코라도 그 이상 씨앗에서 재배하는 일은 없었고, 꺽꽂이로 늘려가는 방식을 채용했다.
"(아무래도 라이벌의 후추 재배를 방해하기 위해서 상대의 밭에서 삽목을 가져갈 줄은 생각하지 못했지만……) 뭐 순조롭게 모와 씨앗은 입수할 수 있었어. 비닐하우스도 이번 달에는 완성될 것 같으니까"
남만이나 명나라와 교역하는 루트를 가진 시즈코는, 일찍부터 후추의 재배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유럽에서 후추는 귀중한 향신료이다. 아무리 예수회의 협력이 있다고 해도, 거래에 응해주는 상인은 적다. 게다가 큐지로 경유로 거래를 의논하기 때문에 이야기의 템포도 나빴다.
그래도 간신히 예수회의 이야기에 응한 인물이 나타났다. 예수회는 그 인물에게 후추의 삽목을 만드는 방법을 종이에 적어 주었다.
하지만 그 인물은 예수회에게 배운 방법을 착각하여, 수확의 방해를 하기 위해 라이벌의 후추밭에서 가져온다는 폭거를 저질렀다.
그 이야기를 큐지로를 경유해서 들었을 때, 시즈코가 머리를 감싸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 덕분에, 예정했던 숫자보다 많은 모와 씨앗을 운반중이라는 얘기였기에 잘됐다고 해야 할지 어떤지가 고민이었다.
"뭐 태반은 죽었겠지. 운좋게 살아남은 강한 개체를 써서, 미니어처 비닐하우스에서 재배. 잘 되면 좋겠지만…… 실패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건 힘들려나―"
방심은 금물이었다. 현대와 달리, 후추의 삽목을 운반하는 데는 적어도 1개월은 걸린다. 그 동안 절반 가까이는 썩어버릴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성의있게 취급해줄지도 의문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예수회에 '후추의 연구'라고 전했을 뿐, 본래의 목적인 '후추 재배'에 대하 말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후추를 재배한다고 말해도 진지하게 받아들였을지는 의문이 남지만, 가능한 한 불안요소는 제거하고 싶었다.
속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입수 자체가 불가능해지는데다, 자칫 잘못하면 일본에 대한 침략에 열을 올릴 가능성이 있다.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 게 제일이다.
(보고에 따르면 삽목용이 백 그루, 씨앗이 70개였지. 성 하나를 지을 정도의 자금을 썼는데…… 잘 되면 5년 안에 본전을 뽑을 수 있으려나)
이래저래 손이 너무 많이 가서, 일본에 모나 씨앗을 수입하는 것이 어려워져 있었다. 후추 외에도 열대 작물의 모나 씨앗을 구입하려고 분투하고 있지만,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열대 우림 기후를 가상적으로 만드는 계획도, 중요한 모나 씨앗이 손에 들어오지 않으면 헛되이 끝나게 된다.
"아, 맞다. 아시미츠 아저씨한테 부탁할 게 있는데…… 괜찮을까?"
"시즈코가 내게 의지하다니 별일이군. 사양은 필요없으니 뭐든지 말해라"
"그렇게까지 긴장할 얘기는 아니야. 내가 가지고 있는 화승총에 라이플링(강선)을 새겨줬으면 해"
"……미니에 탄인가"
아시미치의 말에 시즈코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4월 14일, 노부나가는 2월 말부터 진행하고 있던 아사쿠라(朝倉) 정벌 준비를 마쳤다.
그가 아사쿠라 정벌의 준비를 하고 있던 이유는, 1월에 키나이(畿内)나 주변 나라들에 대해 "상락하여 궁궐(禁裏)의 수리나 막부의 일을 도우라"는 서신을 보낸 것에 유래한다.
표면적으로는 조정이나 막부의 위신을 되찾는 형태였지만, 실제로는 노부나가에 적대하는 세력과 복종하는 세력을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이 호출에 직접 응한 것이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키타바타케 토모후사(北畠具房), 미요시 요시츠구(三好義継),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 등으로, 오오타가키(太田垣)나 오오토모(大友) 등 멀리 있는 영주들은 사자를 보내왔다.
하지만 노부나가와 긴장감이 감도는 관계인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義景)는 이 호출에 응하지 않았다. 미리 알고 있었던 일이지만, 노부나가는 대외적인 의미도 담아 이유를 묻는 서신을 몇 번인가 아사쿠라에게 보냈다.
물론 그 서신들에 대해 아사쿠라가 답장을 보내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궁궐이나 막부의 권위를 등에 업은 상락 명령에 따르지 않는 아사쿠라를 노부나가는 이 때 처음으로 적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아사쿠라 정벌이 아니라, '와카사(若狭) 국 슈고(守護)인 와카사 타케다(武田) 씨와 피관(被官)인 무토우(武藤) 씨 정벌'을 천명했다.
이 때, 와카사 타케다 씨 최후의 당주(제 9대)인 타케다 모토아키(武田元明)는, 1568년에 와카사에 침입한 아사쿠라 씨에 의해 납치되어 이치조다니(一乗谷)로 끌려간 상태였다.
와카사 타케다 씨가 타케다의 성을 쓰는 이유는, 카이(甲斐) 겐 씨(源氏)의 적류(嫡流) 카이 타케다 씨와 동족이기 때문이다.
카마쿠라(鎌倉) 정권 발족시의 카이 겐 씨 적류 카이 타케다 씨는 카이의 슈고(守護)였으나, 죠큐(承久)의 난(乱) 후에 아키(安芸)의 슈고 직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카이 겐 씨 적류 카이 타케다 씨의 제 10대 당주인 타케다 노부타케(武田信武) 때, 카이 슈고는 적자(嫡男)인 노부나리(信成)가 이었고, 아키 슈고는 차남인 우지노부(氏信)가 이었다. 이 때, 우지노부가 아키 타케다 씨의 시조가 된 것이다.
최후의 당주 모토아키가 이치죠다니에 있는 이상, 타케다 씨의 와카사 지배는 실질적으로 끝난 것이지만, 노부나가에게는 관계없었다.
그의 목적은 아사쿠라 정벌이다. 눈 앞에 딱 좋은 대의명분이 굴러다니고 있는데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4월 20일, 노부나가는 자신의 군에 동맹인 도쿠가와 군을 합쳐 3만을 이끌고 표면적 이유인 와카사를 향해 사카모토(坂本)를 출발했다.
목적은 막부의 명에 거스른 와카사 국의 무토우 토모마스(武藤友益)의 정벌이라고 되어 있었으나, 누가 어떻게 봐도 아사쿠라 정벌이 진정한 목적이라고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것들을 불식시키기 위해서인지, 노부나가는 막부의 신하들이나 공가(公家)의 인물들도 행군에 동행시켜, 독단적인 출진이 아니라 관군의 입장에서 출진한 것임을 주위에 내보였다.
출진할 때는 3만에서 4만 정도의 군세가, 오우미지(近江路)에서 와카사 국에 들어서자 와카사슈(若狭衆) 등 각지에서 군세가 모여들어, 총 10만의 군세로 팽창했다.
와카사에 있는 오바마(小浜)의 타케다 일족이나, 피관인(被官人) 들 일부가 반 노부나가를 외치고 있었으나, 와카사 슈고 타케다 씨를 대대로 섬겨온(譜代) 신하 아와야시(粟屋) 엣츄노카미(越中守) 카츠히사(勝久)는 노부나가와 내통하고 있었다.
4월 22일에 노부나가는 오우미(近江)에서 와카사로 빠지는 쿠마가와쥬쿠(熊川宿)에 들어섰다.
이 때, 이에야스는 토쿠호우지(得法寺)에 머물렀다. 그 토쿠호우지에는 츠루가(敦賀)로 출발할 때 앉았다는 소나무(이에야스가 앉은 소나무)가 전승으로서 남아있다.
4월 23일, 쿄(京)에서 연호가 에이로쿠(永禄)에서 겐키(元亀)로 바뀌었다.
이것은 노부나가의 의향이 아니라, 요시아키(義昭)의 독단이었다. 조정이 행하는 개원(改元)에 개입한 것 때문에 그에게 불만을 가진 계층이 늘어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4월 24일, 노부나가는 와카사와 에치젠(越前)의 국경에 있는 쿠니요시(国吉) 성에 입성했다. 쿠니요시 성의 성주인 아와야시 엣츄노카미 카츠히사는, 오랫동안 아사쿠라의 와카사 침공에 대항해 온 인물이다.
여기서 노부나가는 일단 군의 전진을 정지시켰다. 그제서야 간신히 노부나가의 군이 기묘하다는 것을 이에야스는 깨달았다.
"한조(半蔵), 오다 님의 군에 모리(森) 님의 모습은 보였느냐?"
"……쿄에 있을 때부터 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노부나가의 오른팔인 모리 요시나리(森可成)의 모습이 없는 점이었다. 이만큼 큰 싸움에서, 그의 모습이 없다는 것은 기묘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에야스는 생각했다. 무예가 뛰어난 모리 요시나리를 노부나가가 아사쿠라 정벌에 데려오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생각하고 있는 동안, 한조의 부하가 어딘가에서 나타나서 한조에게 보고를 했다. 그것을 들은 한조는 천천히 이에야스 쪽을 향하면서 말했다.
"주군. 보고에 따르면 오다 군은 둘로 나뉘어서, 하나는 세키가하라(関ヶ原) 주변에 집결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숫자는 적어도 3만은 된다고 합니다"
"……아자이(浅井) 님이 배신할 가능성을 고려해서, 인가"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아자이 비젠노카미(備前守) 님과, 사효노죠(左兵衛尉) 님은 완전히 대립 상태입니다. 그러니 오다 님은 사효노죠 님이 배신하여 등 뒤에서 급습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세키가하라에 군을 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세키가하라에 있는 오다 군을 이끌고 있는 것은…… 모리 님인가"
미노(美濃) 국 세키가하라(현재의 기후(岐阜) 현(県) 후와(不破) 군(郡) 세키가하라(関ヶ原) 쵸(町))는, 천하를 가른 전투라고 하는 세키가하라의 전투가 벌어진 장소이다.
일반적으로 세키가하라의 전투는 문치파(文治派)라고 불린 정무(政務)를 담당한 장수들과, 무단파(武断派)라고 불린 군무를 담당한 장수들이, 세키가하라를 주 전장으로 삼아 벌인 야전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문치파의 중심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와, 무단파의 중심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양쪽 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가신이다. 따라서 양자가 싸운 이유는, 토요토미 정권에서의 주도권 싸움이다.
세키가하라는 토우고쿠(東国)와 사이고쿠(西国)를 잇는 요충지이며, 거의 모든 사람들은 세키가하라를 경유하지 않으면 토우고쿠에서 사이고쿠로, 또는 사이고쿠에서 도우코구로 갈 수 없다.
그 점을 잘 이해하고 있는 노부나가는, 대군을 전개할 수 있는 세키가하라를 중요 지점이라고 생각하여, 방위 시설을 다수 건축하고 몇 겹이나 되는 방어진을 쳐 놓았다.
그러나 미완성인 곳이 다수 있는 관계로, 주위에는 방어 지점으로밖에 인식되고 있지 않았다.
요새화가 진행중인 세키가하라에 오다 군 3만이 집결했다. 총대장은 모리 요시나리, 부대장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였다.
오다 가문 가신 제일의 맹장 시바다 카츠이에와, '공격의 산자(三左)'라는 별명을 가진 무용으로 이름높은 모리 요시나리가 나란히 세키가하라에 포진했다.
그것에 가장 놀라고 두려워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아자이 히사마사(浅井久政)였다. 그는 노부나가가 아사쿠라 영토로 침공하면, 카네가사키(金ケ崎)에서 아사쿠라와 연대하여 협공할 속셈이었다.
그러나 모리 요시나리가 세키가하라에 포진하고 있으면, 오다 군을 협공하는 작전은 펼칠 수 없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들이 협공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히사마사는 노부나가의 행군을 방관하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들의 상황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아자이 사효노죠 님이 배신할지, 아니면 포기할지는 영주님의 행동에 달렸다"
세키가하라에 있는 성 중 하나에 포진하고 있는 모리 요시나리는, 대단히 느긋한 분위기로 중얼거렸다.
장기간 체재할 가능성이 높았기에, 그는 지나치게 긴장하는 것은 거꾸로 정신을 소모하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신들의 눈에는 모리 요시나리가 느긋하면서도 항상 임전태세를 갖춘 것으로 보였다.
"영주님께서는 쿠니요시 성에서 4일이나 움직이지 않고 계십니다. 아사쿠라가 진군하고 있다고 하는데, 느긋하게 대처해도 괜찮겠습니까"
"신경쓰지 마라. 영주님은 무토우 정벌이 목적이다. 거기에 공격을 가할 대의명분이 아사쿠라에겐 없다. 만에 하나, 아사쿠라가 공격해온다면, 그거야말로 아사쿠라 정벌을 당당히 내걸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사효노죠 님도 아사쿠라 정벌에 반론을 제기할 수 없게 되지. 아니…… 아사쿠라와 연대해 주는 편이, 우리들에게는 싸울 장소가 생기니 좋은 일이겠구나"
모리 요시나리는 익살을 떨어 가신들 일동의 웃음을 자아냈다.
"보고드립니다. 영주님, 움직임 없음. 아자이, 움직임 없음. 아사쿠라, 이치죠다니에서 진군했다고 합니다"
"수고했다. 시바타 님으로부터는 무슨 말이 없었느냐"
"옛. 팔이 녹슬어서 곤란하다, 고 하셨습니다"
시바타의 투덜거림에 모리 요시나리의 가신들이 다시 웃었다. 그들은 결코 방심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세키가하라에 머무르는 것으로, 그들은 목적의 절반을 이미 달성하고 있었기에 마음에 여유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틀 후의 4월 30일, 드디어 노부나가에게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자이, 아사쿠라를 놀라게 하는 움직임이었다.
쿠니요시 성에 있는 노부나가는 히사마사와 아사쿠라의 예상을 뒤엎고, 그 자리에서 관군을 해산시켰다.
그리고 도쿠가와 군을 이끌고 아사쿠라 영토로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나가마사(長政)의 거성으로 향했다.
관군이 해산되었기에 막부의 신하들이나 공가의 인물들은 진군 루트를 되짚어서 쿄로 귀환했다.
세키가하라에 있는 모리 요시나리는 1만의 병사들을 이끌고 노부나가의 진군에 맞춰 나가마사의 거성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노부나가가 이끄는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과, 모리 요시나리가 이끄는 오다 군의 거리를 생각하면, 모리 요시나리가 행군하는 것은 노부나가보다 며칠 늦게 된다.
하지만 예상을 뒤엎고 양자가 거의 동시에 행군한 것에 아사쿠라는 놀라고 두려워했다. 그는 키노메(木芽) 고개(峠)를 넘은 시점에서 군을 정지시키고, 정보 수집에 집중하며 군을 후퇴시키려 했다.
하지만 노부나가에게 실컷 얕보였으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사쿠라가 철수를 선택한 것에 가신들은 반발했다. 이 반발에 아사쿠라는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
키노메 고개에 못박힌 상태가 된 아사쿠라 군을 비웃는 듯,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은 에치젠의 국경을 스치듯이 진군했다.
최종적으로 노부나가의 도발에 대해 적당한 대의명분을 댈 수 없는 것을 이유로 아사쿠라는 가신들을 설득하여 이치죠다니로 귀환했다.
아사쿠라 군이 이치죠다니로 돌아갔다는 보고를 받은 히사마사는, 비밀리에 소집한 군을 해산시켰다.
아사쿠라도 히사마사도 기회를 놓쳤다며 원통해했으나, 노부나가가 진군하지 않았던 목적이 뭐였는지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경과는 어찌되고 있느냐"
"아주 좋습니다"
노부나가가 관군을 이끈 이유는, 무토우 토모마스 정벌도 아사쿠라 정벌도 아니었다.
아자이 히사마사의 군사에 관한 정보, 그리고 아자이 군의 정보를 모으는 것이야말로 노부나가의 진정한 목적이었다.
물론,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무토우 토모마스 정벌을 목적으로 하여, 잘하면 아사쿠라 정벌도 그는 의도하고 있었다.
아사쿠라 군은 2만의 병사를 동원하여, 그 중 6천을 국내에 남겨두고 병사 1만 4천을 이끌고 이치죠다니를 출진했다.
아자이 군은 1만 8천의 병사를 동원할 수 있지만, 히사마사와 친 아사쿠라 파만으로는 8천이 한계였다.
아자이, 아사쿠라 양쪽을 합쳐도 병력은 3만이 되지 못한다. 군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기에 노부나가의 진정한 목적의 절반은 달성되었다.
게다가 아자이, 아사쿠라 양 군에 쓸데없는 낭비를 시키는 것도 성공하였으니 괜찮은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군의 정보를 모으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노부나가는 또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나가마사의 거성 오다니(小谷) 성으로 향했다.
"먼 곳에서 잘 와 주셨습니다, 형님(義兄上). 오늘은 어떤 일로 오신 겁니까"
정중한 인사를 하는 나가마사였으나, 그것에 불쾌감을 느끼는 가신들은 많았다. 그들에게 있어 나가마사의 언동은, 노부나가에 대해 자신을 지나치게 낮추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생각을 품는 것은 물론 히사마사 진영이었다. 어떤 상대라도 예의에는 예의를, 무례에는 무례를 되돌려주는 것이 나가마사의 생각이었다.
"(이거 전해지지 않은 모양이군) 무토우 정벌에 까다로운 일이 생겼다"
"실례지만 형님께서 말씀하시는 까다로운 일이라는 것이 제 성에 오신 이유에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약간 관계가 있다. 우선 막부의 명에 거스른 무토우 씨지만, 그의 주군은 1년 전에 아사쿠라 군에 의해 납치되었다. 무토우 씨는 주군의 와카사 타케다 씨를 놔두고 자신이 상락하는 것에 저항감이 있었던 것이겠지. 그리고 그것을 변명거리로 삼지 않고 묵묵히 싸우는 모습은 훌륭한 충의심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노부나가가 덮어놓고 칭찬하자 히사마사 진영은 약간 술렁였다. 아직 노부나가를 시골 영주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인지, 무력만으로 기어오른 조잡한 인간, 이라는 잘못된 이미지가 불식되지 않았던 것이다.
"와카사 타케다 씨를 구원하러 가는 것은 가능했지만, 상대가 아사쿠라 씨라면 일이 단순하지 않지"
"이거 뜻밖의 말씀을 하시는군요. 설령 아사쿠라 씨와 맞서더라도, 그것은 아사쿠라 정벌이 대의명분이 될 뿐입니다. 거기에 병력이 너무나 차이가 큽니다. 걱정하실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됩니다만"
"잊었느냐. 아사쿠라 씨와 맞설 경우, 나는 그대와 의논하겠다는 약속을 했지. 따라서 아사쿠라 씨의 진군을 알게 되었을 때, 너에게 이 건에 대해 의논하자는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아까부터의 태도를 보니, 편지는 네 손에 전해지지 않았군"
노부나가는 생각하는 시늉을 하면서 시선만을 히사마사 쪽으로 향했다.
"내가 그 편지를 감추었다고 말하고 싶기라도 한 것이냐!?"
그 시선이 자신을 탓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 히사마사는, 반사적으로 일어나서 고함을 질렀다.
마음에 켕기는 구석이 있는 인간의 태도 그 자체였으나, 머리에 피가 솟구친 히사마사는 깨닫지 못했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사효노죠 님"
"네 이놈!"
"그렇게 흥분하시면 몸에 좋지 않습니다. 노기를 가라앉히시고 냉정하게 대화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제가 뭔가 잘못을 했다면, 먼저 사과드리지요"
히사마사의 격앙에 노부나가는 냉정한 태도로 대답하고, 거기에 사죄의 말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이미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른지는 명백했으나, 히사마사는 노부나가의 사죄조차 자신을 바보 취급하는 것처럼 보였다.
"물러나십시오!"
여전히 뭔가 말하려던 히사마사였으나, 나가마사의 일갈에 그것은 지워졌다.
노부나가로부터 나가마사에게 분노한 얼굴을 향한 히사마사였으나, 나가마사는 냉정하게, 그리고 또렷하게 단언했다.
"아자이 가문의 당주는 이 접니다. 당신께서 나설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정적인 말이었다.
나가마사와 히사마사는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었다, 고 아자이 가문 가신들은 순간적으로 이해했다.
"형님, 아버님의 무례를 대신 사죄드립니다"
"신경쓰지 않는다. 그리고 지나간 일을 말해봐야 소용없다. 이야기를 되돌리겠다만, 와카사 타케다 씨는 네게 맡기고 싶다. 아무래도 아사쿠라 님은 나를 싫어하고 있는 것 같아 전혀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고, 나는 매사를 무력으로밖에 해결하지 않는다고 주변에 생각되기 일쑤니 말이다. 이 이상 내가 관련되는 것보다는, 아사쿠라 가문과 관계가 싶은 아자이 가문이 해결하는 쪽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니라"
"자칫 잘못하면 등 뒤에서 공격받을 수 있음에도, 거기까지 생각해주신 형님의 사려깊음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잘 부탁한다"
아사쿠라를 상락시키는 것은 아자이의 임무, 그 확약을 받은 노부나가는 일찌감치 회담을 끝냈다.
그 후, 그는 나가마사와 함께 오이치(お市), 그리고 갓난아기인 챠차(茶々)를 보러 갔다. 오이치와 인사를 나누고 챠챠를 안아올렸으나, 챠챠는 노부나가가 안아올린 순간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챠챠히메(茶々姫)는 내 투박한 팔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구나"
주위 사람들은 당황했지만 노부나가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고, 오히려 호쾌하게 웃었다.
그래도 안아올리지 못한 것이 내심 분했는지, 몇 번인가 챠챠를 안아올리는 것에 도전한 노부나가였다.
하지만 몇 번을 해도 챠챠가 울음을 터뜨려서, 제대로 안아올릴 수 없었다.
"와하핫, 챠챠히메는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는구나. 예전의 오이치를 보는 듯 하여 기분이 좋다. 크면 좋은 여자가 되리라"
'취미번역 > 전국시대 미녀 고생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066 - 1570년 6월 하순 (8) | 2018.09.25 |
---|---|
065 - 1570년 5월 중순 (7) | 2018.09.22 |
063 - 1570년 1월 상순 (13) | 2018.08.16 |
062 - 1569년 12월 상순 (19) | 2018.07.26 |
061 - 1569년 9월 상순 (24) | 2018.06.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