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 미녀 고생담

戦国小町苦労談


작가: 夾竹桃


어느 날, 한 명의 소녀가 전국시대로 타임슬립했다.

그야말로 신의 변덕, 악마의 심심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뜬금없이.


소녀는 세계를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디에나 있는 극히 보통의, 그리고 평범하고 수수한 소녀였다.

그런 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다.


전국 시대를 살아남는다 - 그것 뿐이다.





번역: 가리아



에이로쿠(永禄) 12년, 이세(伊勢) 평정



060 1569년 8월 하순



때는 조금 거슬러올라가 에이로쿠(永禄) 12년(1569년) 5월, 남(南) 이세(伊勢)의 키타바타케(北畠) 가문은 노부나가에 대해 항전할 것인지 항복할 것인지로 의견이 둘로 나뉘어 있었다.

그런 와중에, 키타바타케 토모노리(北畠具教)의 친동생으로 코즈쿠리(木造) 성을 지키고 있던 코즈쿠리 토모마사(木造具政)가, 코즈쿠리 일족이라고 전해지는 겐죠인 슈겐(源浄院主玄, 타키카와 카츠토시(滝川雄利))과 츠게 사부로자에몬(柘植三郎左衛門) 등의 부추김을 받고, 오다 가문과 내통하여 종가(宗家)에 모반을 일으켰다.

타키카와 카즈마스(滝川一益)의 책략인 것을 알게 된 키타바타케 토모노리는 즉시 군세를 파견하여 코즈쿠리 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나가노(長野) 가문이나 코우베(神戸) 가문이 오다 군으로서 원군으로 달려왔고, 또 코즈쿠리 성이 수비에 유리한 저습지(低湿地)로 둘러싸여 있었기에, 키타바타케 토모노리는 코즈쿠리 성을 공격하지 못하고 군을 물려야 했다.


노부나가는 코우베(神戸) 성의 공략을 경계로, 대군에 의한 힘으로 공격하는 전투에서 정치적 책략(調略)을 주로 하는 전투로 전환했다.

그 정치적 책략전으로 노부나가는 차례차례 이세의 성들을 자기 진영으로 끌어들여 키타바타케 토모노리의 힘을 깎아나갔다.

병력의 차이나 노부나가의 정치적 책략으로 키타바타케 토모노리는 곤경에 빠졌다. 하지만 그는 항복할 기색조차 보이지 않고, 오히려 노부나가와 대결할 뜻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키타바타케 토모노리의 태도를 보고 노부나가는 본격적으로 이세 공략에 나섰다.

그는 모리 요시나리(森可成)、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信盛)、키노시타 토우키치로(木下藤吉郎, ※역주: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시작으로 하는 가신들에게 이세 침공을 발표했다.

이세 침공의 발표는 물론 시즈코에게도 전해졌다. 하지만 내용은 그녀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우와― 엄청 놀랍네"


노부나가로부터의 발표 내용을 확인한 시즈코는 반쯤 어이없는 듯 중얼거렸다. 그는 불러낸 케이지와 사이조, 나가요시, 아야에게 발표 내용을 설명했다.

주인장(朱印状)에는 케이지와 나가요시 두 명은 이세 침공군에 참가. 시즈코와 사이조는 제반 사정을 고려하여 종군하지 않고 자택 대기. 아야는 시즈코와 사이조를 보좌할 것, 등 세세하게 지시가 적혀 있었다.


"두 사람은 모리 님의 지휘하에 들어간다고 적혀 있는데, 실제로는 유격병에 가까운 취급이 아닐까"


"으―음, 오랜만에 큰 싸움이군. 몸이 근질거리는데"


"성인식 전에 참전할 수 있다니…… 이만큼 명예로운 일은 없다"


이세 침공 이야기를 들은 케이지는 기대에 가슴을 부풀리고, 나가요시는 감동한 나머지 눈물을 흘릴 듯 했지만 얼굴을 들고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다.


"출진은 8월 20일이니까, 18일까지 준비를 마쳐둘 필요가 있겠네. 창고는 열어둘 테니까, 쓸 게 있으면 나중에 아야 짱에게 보고해둬"


"그럼 5번 창고에 있는 칼, 그거 가져가도 돼?"


시즈코의 발언을 듣자마자 나가요시가 들떠서 물었다.

그 말을 들은 시즈코는 5번째 창고에 어떤 칼을 한 자루 보관하고 있는 것을 떠올렸다.


"아―, 그거. 딱히 상관없어. 아니, 애초에 네가 성인식을 치렀을 때 주려고 생각했던 칼이니까"


"정말이냐! 그런데 그렇게 좋은 칼, 누구에게 받은 거야?"


"오이치(市) 님께 매실주를 보냈더니, 답례로 보내신 칼이야"


"……너는 여전히, 이상한 것에 손을 대는구나. 그런데 칼의 이름은 뭐야?"


"글쎄. 내가 받았을 때는 딱히 이름 같은 건 없었어"


"그럼 네가 정해 줘"


"응?"


약간 놀란 시즈코였으나, 기대를 품고 있는 나가요시를 보고 말을 더듬거렸다.


"아니, 그. 도공(刀鍛冶)의 이름 쪽이……"


"뭐 어때. 카츠조도 저렇게 말하고 있는데"


"그렇습니다.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기대를 품고 케이지와 사이조에게 시선을 향한 시즈코였으나, 기대는 보기좋게 배신당했다.

한 번 무거운 한숨을 쉰 후, 시즈코는 나가요시에게 고개를 돌렸다.


"멋진 이름을 부탁해!"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独尊)은 안되겠지) 으―음, 사자성어면 명경지수(明鏡止水), 일기당천(一騎当千), 위풍당당(威風堂々), 강의과단(剛毅果断), 견인불발(堅忍不抜) 정도일까"


"……미안, 듣기는 좋은 느낌인데, 어떻게 써야 하는지 전혀 모르겠어"


"미안. 지금 쓸 테니까 잠깐 기다려"


시즈코는 방금 말한 사자성어를 종이에 써서 나가요시에게 건네주었다.

그걸 받아든 나가요시는, 각각의 종이를 보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의미가 아니라 한자의 독음, 그리고 겉보기만으로 정했다.


"좋아…… 이 명경지수라는 걸로 하자. 의미는 전혀 모르겠지만 말야!"


"그러면 다른 사람한테 물어봐야지. 참고로 명경지수의 의미는, 잡념(邪念)이 없고 조용히 안정된, 깨끗하고 맑은 마음을 말하는 거야"


"와하하핫! 잡념 투성이인 카츠조에게는 딱 어울리잖아!"


명경지수의 의미를 들은 케이지는, 나가요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대폭소했다.




노부나가는 이세 침공을 개시하기 1주일 전, 시즈코에게 어떤 것을 자신의 거관(居館)으로 운반하도록 명했다.

명령을 받은 시즈코는 전용으로 쓰고 있는 창고의 지하실에 보관되어 있던 것을 지상으로 꺼낸 후, 신규 개발한 리어카에 모두 싫었다. 짐을 다 실은 후, 위장을 위해 대량의 말린 풀을 덮었다.

작업이 끝나자 시즈코는 케이지를 대동하고 노부나가의 거관을 향해 리어카를 끌었다.


"왜 갑자기……"


무거운 리어카를 끌면서 시즈코는 불평했다.


리어카는 견인차량으로서 해외에서 들여온 사이드카의 개념과, 당시에 주류였던 대형 짐수레(大八車)를 융합시킨 혁신적인 발명품이다.

등장은 1921년(타이쇼(大正) 10년) 무렵으로 늦은 편이며, 발명자는 시즈오카(静岡) 현 후지(富士) 시 아오시마(青島)의 모치즈키 토라이치(望月虎一, ※역주: 이름이 코이치인지 토라이치인지 정확히 모르겠음)라고 한다.

무거운 짐을 옮길 수 있고, 진동과 소음이 억제되어 있고, 중심이 낮아지기 때문에 안정된 운반이 가능해진 리어카는 순식간에 대형 짐수레를 대체했다.


시즈코의 리어카는 금속제 파이프의 대용품으로 대나무로 만든 골조에 마(麻)제 플라스틱 판을 끼워넣고, 타이어는 공기 대신 수지를 넣은 노펑크 타이어다.

대나무는 가공만 제대로 하면 금속제 파이프의 대용품이 될 수 있다. 현대에서도 대나무로 된 자전거나 휠체어(車椅子)의 플게임에 대나무가 쓰이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철이나 알루미늄 등의 금속제 프레임보다도 튼튼하고 가벼운데다, 휘어지는 성질 때문에 노면의 진동을 완화시키고 목재보다도 내구성이 높으며, 거기에 목재보다 입수하기 쉬운 장점이 있다.

수지를 넣은 타이어는 승차감은 좋지 않지만, 짐을 옮기는 데는 나무랄 데 없는 성능을 가졌다.


평탄한 포장도로 이외에서는 성능이 현저하게 떨어지기에 언덕길(특히 내리막길)에서의 이동이 어려운 등의 결점은 있지만, 그래도 짐수레로서는 파격적인 성능을 가지는 것이 리어카이다.

뭣보다 말을 쓰지 않고 인력만으로 수백 kg이나 되는 짐을 운반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또 공구가 필요없는 접이식을 채용했기 때문에, 파손되어도 다시 만들 필요는 없고 부품 교환만으로 충분한 장점도 있다.


"내용물이 내용물이니까―. 시즛치 이외의 사람이 옮기면, 돌아가는 길에 머리와 몸통이 작별해 버릴걸"


"……알고 있어. 내용물이 대단히 중요한 건, 알고 있어. 하지만, 무겁거든 이거……"


얼핏 보면 실린 짐은 말린 풀로만 보이지만, 진짜 짐은 그 밑에 감춰져 있다.

잔뜩 실린 말린 풀로 감춰진 진짜 짐, 그것은 노부나가의 숨겨진 재산인 금막대기 80개, 은막대기 120개였다.


말할 ㅍ리요도 없이 시즈코는 금광(金山)을 가지고 있지 않고, 또 금광 개발에 착수한 것도 아니다.

금광이나 은광을 갖지 않는 시즈코가 어떤 방법으로 금은을 획득했는가, 그 비밀은 정제하지 않은 구리(粗銅)에 있었다.


일본 국내의 광석에서 제련된 구리는 많은 금은을 함유하고 있었지만, 에도 시대가 될 때까지 일본에는 구리에서 금은을 분리하는 기술이 없었다.

그 때문에 옛부터 구리와 금은을 분리하는 기술을 가진 명나라(明)나 남만인들은, 일본에서 구리를 헐값에 사들여 금은을 추출해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하지만 1591년, 뒤에 스미토모(住友) 재벌의 창업자(業祖)로 불리는 소가 리에몬(蘇我理右衛門)이, 센슈(泉州) 사카이(堺)에서 난반부키(南蛮吹き)라고 하는, 귀금속을 많이 함유한 구리에서 금은을 분리하는 제련 기술을 완성시키면서 값싼 비정제 구리의 해외 유출은 멈추었다.


황동(荒銅)에서 금은을 분리하는 난반부키 덕분에, 시즈코는 광산을 가지지 않으면서도 대량의 금은동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필요로 하는 금속은 구리와 은 두 가지다.

제련이나 가공이 용이한 점, 열전도성이나 전기 전도성, 내구성이 뛰어난 구리는 인류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으며, 이미 현대 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은은 유리(硝子)에 무전해 코팅(은경반응(銀鏡反応)) 처리를 하면 반사층을 형성한다. 이것을 이용한 것이 거울이다. 거울은 육분의(六分儀)나 거리 측정기(測距儀)를 만드는 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부품이다.


"설마 황동에 그만한 금은이 함유되어 있을 줄이야……"


금은동이 노부나가가 묵인해 줄 정도의 양이라면 아무 문제 없었다.

하지만 출입하는 상인들이 황동을 모아다가 시즈코에게 파는 것을 반복한 결과, 그녀의 손에는 약간이라고 할 수 없는 금은동이 모였다.

명백하게 분수에 맞지 않는 금은을 앞에 두고, 시즈코는 노부나가에게 보고하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아무래도 황동에서 금은을 추출할 수 있다는 것은 노부나가도 상상의 영역을 아득히 넘은 이야기였으나, 시즈코 전용의 창고 지하에 보관된 금괴와 은괴를 보고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시즈코와 노부나가는, 금은은 한동안 창고에 보관할 것, 시기를 봐서 조금씩 노부나가의 창고로 운반할 것, 그리고 운반은 시즈코가 할 것, 등의 규칙을 정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째서 내가 운반하게 된 거지?"


"그야― 시즛치. 저만한 금괴를 보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녀석이 얼마나 있겠어"


기원전 시대부터 금은 부의 상징이며, 황금의 빛과 불변의 가치는 역사상의 지배자들을 끊임없이 매료시켰다.

일본에서는 전국시대, 전비 획득을 위해 각국이 금광 개발을 한 결과, 골드 러시가 일어났다. 그 시대를 제압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또한, 황금의 차실(茶室)이나 변소(便所)를 만들 정도로 금에 매료되었다.

현대에서도 금 1kg당 500만엔 가까운 가치가 있으며, 인류 역사상 금이 무가치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것이다.

그런 금에 대해 태연하게 행동할 수 있는 시즈코가 케이지에게는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돈이 남아도는데, 금막대기를 소유해 봤자 처치곤란일 뿐이야"


"하나 정도…… 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


"케이지 씨, 내 나라에는 이런 말이 있어. '신용을 얻는데는 긴 세월이 필요하지만, 이걸 잃어버리는 것은 그야말로 한순간이다. 게다가 신용은 금전으로는 살 수 없다. 이걸 되찾으려면 배전의 노력이 축적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말은 1955년(쇼와(昭和) 30년) 3월, 야쿠모(八雲) 공장(工場) 식중독 사건 발생 후, 당시 유키지루시(雪印) 유업(乳業) 주식회사의 사장인 고(故) 사토 미츠기(佐藤貢)가 전 사원에 대해 한 말의 일부분이다.


불만을 입에 올려도 사실은 시즈코도 이해하고 있었다. 금은을 시즈코에게 운반시키는 이유는, 시즈코라면 숫자를 속이거나 하지 않고 정제된 금은을 가져올 것이라고 노부나가가 신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즈코를 신용하지 않았다면, 노부나가는 신임할 수 있는 모리 요시나리에게 운반하게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시즈코는 노부나가의 신용을 푼돈으로 배신하는 짓은 죽어도 할 수 없었다. 그건 지금까지의 자신을 배신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지위나 재산을 추구하는 게 나쁘다고 하진 않아. 다만, 나는 그런 사람들과 추구하는 목표가 다른 것 뿐이야. 자,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 얼른 기후에 가서 물건을 배달하자―"


말을 끝내자마자 시즈코는 리어카를 미는 힘을 조금 더했다. 조금 떨어져 있던 케이지는 시즈코의 등을 뭐라 말할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역시 시즛치는 신기하네"


하지만 그게 좋지, 라고 케이지는 마음 속에서 중얼거리며 시즈코의 등 뒤를 쫓았다. 그로부터 도중에 아무 일 없이, 시즈코와 케이지는 무사히 노부나가의 거관에 도착했다.


"기다리고 있었다…… 뭐냐, 네가 뒤집어쓰고 있는 그 이상야릇한 물건은"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마중한 노부나가였는데, 시즈코가 쓰고 있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아, 이건 밀짚모자입니다. 말 그대로 밀짚으로 짠 모자입니다. 통기성이 좋고, 햇빛을 가려주는 챙이 넓어서 꽤 마음에 듭니다"


일본에서는 밀짚을 표백이나 염색하여, 납작하게 펴서 넓적하고 두껍게 엮은 무명 끈(真田紐)을 소용돌이 형상으로 짜서 만든 것을 밀짚모자라고 부른다.

하지만 풀이나 무늬목(経木) 등의 소재로 만든, 챙이 넓은 모자의 통칭으로서 밀짚모자라는 단어가 쓰이는 경우도 있다.

예전에 오카야마(岡山) 현은 밀짚모자가 주 생산품이었기에, 지금도 밀짚모자를 취급하는 전업 메이커나 역사 박물관이 존재한다.


"흠, 모자와 뒤의 짐수레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를 듣지. 우선은 물건을 창고로 옮기자"


노부나가에게 안내된 장소는 여러 창고 중 하나였다. 밖에서 보면 다른 창고와 다름없는 분위기였으나, 자세히 보면 창고의 창문이 다른 것보다 좀 작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작은 차이지만 출입 가능한 곳을 극력 줄이려는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창고였다.


"그럼 짐을 내리겠습니다"


리어카에 실려 있는 마른 풀을 치우자, 그 아래에는 마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플라스틱 박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무상자보다 가벼운 플라스틱 박스는, 사용 환경에 따라서는 100회 이상 짐의 왕복에 견딜 수 잇는 강도를 가지고 있기에, 금은을 운반하는 데는 안성맞춤인 박스다.


시즈코와 케이스는 플라스틱 박스에서 1kg의 금막대기와 은막대기를 꺼내서 노부나가가 지정한 위치에 막대기를 늘어놓았다. 아무래도 금은을 합쳐 200kg나 되면 그에 걸맞는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했다.

작업을 마치고 한숨 돌린 두 사람에 대해, 노부나가는 막대기의 산을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바라보았다.


"상당한 양이군. 이만큼 있으면 당분간 전비가 모자라지는 않겠다"




노부나가가 기후 성을 출진한 지 3일 후에 코즈쿠리 성에 입성했을 무렵에 노히메가 시즈코를 찾아왔다.

이번에는 평소의 인원인 네네와 마츠에, 모리 나가요시의 모친인 '에이(えい)'가 더해져 있었다.

그녀들은 남편이나 자식들이 전장에 가던 말던 신경쓰지 않는 듯, 아침부터 와서는 온천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리고 점심식사 전에 시즈코는 그녀들에게 불려나갔다.

불려나오는 것에 위화감을 느끼지 않게 된 시즈코는, 의문조차 품지 않고 노히메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다도회 비슷한 것…… 인가요?"


"그렇다. 주군께서는 다도회니 뭐니 하시지만, 내가 볼 때는 대단히 시시하노라. 교양이니 다기(茶器)니 하는 시시한 것에 신경쓰지 않고 즐길 수 있는 다도회를 열고 싶노라. 그에 대해 좋은 생각은 없느냐, 라는 것이다"


노히메의 요구는 실로 간단했다.

무장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는 다도회처럼, 자잘한 예의범절이나 형식에 구애받는 것은 바보스럽다.

좀 더 속편하게, 누구든 참가할 수 있는 다도회를 열고 싶은데, 그것에 대해 좋은 생각은 없느냐, 라는 것이었다.


"으―음, 다도회가 아니라 끽차(喫茶, 차를 마신다는 의미, ※역주: 일본에서는 찻집, 카페를 킷사텐(喫茶店)이라고 함)일까요. 차를 마시면서, 차에 곁들이는 과자를 먹는 정도의……"


"호오, 제법 좋구나. 하지만 찻가루는 입수하기가 어렵지. 그러한 것의 생산은 시작했느냐? 그리고 메밀국수(ざるそば)라는 것은 아직이더냐. 나는 빨리 먹고 싶느니라"


"노히메 님, 한번에 말씀하시면 시즈코도 곤란해져 버립니다"


잇따라 말하는 노히메에게 마츠가 부드럽게 직언했다.

그러나 그 정도로 멈춘다면 오다 가문 제일의 자유분방공주라는 칭호는 얻을 수 없다. 자유분방 칭호는 시즈코가 멋대로 붙인 것 뿐이지만.


"무슨 말이더냐, 마츠. 주군들이 나가 계시는 지금, 우리들이 제일 먼저 '메밀국수'인가 하는 것을 먹을 수 있는 것이니라. 그러고보니, 너는 시즈코의 밭에서 상당한 양의 수박을 수확했지 않았더냐"


"저는 시즈코에게 분명히 의뢰를 하였으니까요. 그러고보니, 네네 님께서 시즈코의 창고에서 벌꿀주라는 것을 꺼내가셨지요"


"시즈코에게 창고 있는 것은 꺼내가도 괜찮다고 허가는 받았습니다. 그러고보니, 에이 님도 시즈코의 창고에서 매탕(매실주)을 꺼내가셨지요"


"어라, 네네 님도 마찬가지로 매탕을 가져가시지 않았던가요?"


네 사람의 말을 듣고 머리가 아파진 시즈코였다.

특정한 창고 이외에는 안에 있는 것을 자유롭게 꺼내가도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당당하게 행동하면, 반출을 금지하는 편이 나았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점점 들기 시작하는 시즈코였다.

애초에 말해봤자 귀를 기울여 줄지 의심스러운 사람들이긴 하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메밀국수를 가져왔습니다"


무거운 한숨을 쉬었을 때, 아야가 그 말과 함께 메밀국수를 가져왔다.

그녀가 방에 들어선 순간, 지금까지 시즈코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이조가 눈만 움직여 아야 쪽을 본 것을 시즈코는 놓치지 않았다.


(자기 몫이 포함되어 있는지 확인한 거구나……)


자신이 원인이라고는 해도, 후세에 이름을 남긴 무인을 먹을 것에 집착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버린 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대 실수였는지도 모른다, 고 시즈코는 내심 머리를 감싸쥐었다.


"흠, 사전에 듣기는 했다만, 메밀가루, 츠나기(つなぎ, ※역주: 이 경우, 녹말 가루처럼 점성을 높이기 위해 넣는 재료), 물로 반죽한 것을 실처럼 가늘게 자르다니 참으로 이상야릇한 조리법이구나"


말을 끝냄과 동시에 노히메는 직감적으로 먹는 법을 이해햇는지, 시즈코가 설명을 시작하기 전에 왼손으로 양념장 용기(蕎麦猪口)를 들고, 오른손의 젓가락으로 국수를 집어올려 먹기 시작했다.

국수를 후루룩 먹자 입 안에 부드러운 감촉이 퍼지며, 씹으면 씹을수록 메밀의 향기와 단맛이 콧구멍을 간지럽혔다.


"으, 어, 저기, 노히메 님……?


"뭐냐, 시즈코. 묘한 얼굴을 하고…… 메밀국수는 맛있구나, 다들 먹거라"


"괜찮은 건가……"


"후훗, 먹는 법에 문제가 있다고 시즈코는 생각한 모양이지만, 신경쓸 것 없노라. 내가 맛있다고 느낀 방법이야말로 올바르게 먹는 법이니라"


시즈코의 걱정을 노히메는 일소에 부쳤다.




9월 초, 시즈코는 쿄나 큐슈(九州)에서 들여온 작물을 재배하는 밭의 상태를 살폈다. 들여온 씨앗이나 모종의 관계상, 다른 밭과 달리 재배면적은 제각각이고, 재배하고 있는 작물도 종류가 잡다했다.


시즈코는 재배하고 있는 작물들의 상태를 모조리 살폈다. 우선 맨 처음 작물이 순무의 변종인 스구키카부라(酸茎蕪)였다. 이걸 사용한 절임이 스구키즈케(酸茎漬け)이다.

스구키즈케는 전통적인 쿄 절임의 하나로, 시바즈케(柴漬), 센마이즈케(千枚漬)와 함께 교토(京都) 3대 절임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시즈코가 이것을 재배하는 이유는 스구키즈케는 유산발효 절임이며, 독감 예방에 좋다고 하는 식물성 유산균 '라브레 균(Lactobacillus brevis subsp. coagulans)'이 있기 때문이다.

쿄에서도 재배를 추진하고 있지만, 역시 오와리에서 재배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여 시즈코는 쿄와 오와리 양쪽에서 재배를 개시했다.


다음은 고추(唐辛子)이다.

고추의 원산지는 중남미로, 멕시코에서는 수천년 전부터 식용으로 재배되었다.

일본에는 1552년에 포르투갈 선교사 발타자르 가고(Balthasar Gago)가 분고(豊後)를 방문하여, 오오토모 소우린(大友宗麟)에게 '고추'의 씨앗을 선물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에 따라 16세기 중반에는 유럽에서 일본으로 고추가 전래되었다고 하는데,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설이 있어 아직 정설이 정해지지 않았다.

당(唐)이라는 글자를 볼 때 중국에서 일본으로 전래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중국에 고추가 전래된 시기는 일본보다 더 늦은 17세기 중반(명나라 말기)이다.


전국시대, 고추는 관상용, 약, 독약, 버선(足袋)의 발가락 부분에 넣어 동상을 예방하는 데 쓰였다.

에도 시대에는 식용으로 쓰인 기록이 여럿 있으나, 하나같이 생선이나 야채 본래의 맛을 해치지 않는 '조심스런 매운 맛'을 내는 방법으로 쓰였다.

제 2차 세계대전 후, 일본에서 음식의 다양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고추는 조연 같은 존재였다.

유럽에서도 고추는 오랫동안 관상용 식물로서 재배되었으며, 조미료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에 들어선 이후이다.


고추는 식재료나 조미료, 자연농약 재료 등 쓰임새가 풍부한 작물이다. 그런 관계로 고추는 다른 작물보다 널리 재배되고 있다.

하지만 재배하고 있는 고추에는 단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전래된 고추의 종류가 기록에 남아있지 않았기에, 대체 어느 정도의 매운 맛을 가진 고추인지 판별할 수 없었다.

현대 일본에서 가장 매운 고추는, 노타카(能鷹) 고추라고 불리는 품종으로 스코빌 수치가 10만에서 12만 5천이라고 한다.

시판되고 있는 것 중에 가장 강력한 최루 스프레이가 18만 스코빌, 일반적인 최루 스프레이는 1만 5천에서 9만 스코빌이라는 점을 생각해면, 노타카 고추가 얼마나 강력한 매운 맛을 숨기고 있는지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세계에는 캐롤라이나 리퍼(Carolina Reaper, 캐롤라이나의 사신(死神))이 150만에서 300만 스코빌, 트리니다드 스콜피온 버치 테일러(Trinidad scorpion 'Butch Taylor')가 146만 3700 스코빌이라는, 도대체 뭣 때문에 그런 매운 맛이 필요한지 의구심을 가지게 하는 고추도 존재한다.


마지막으로는 일본박하(日本薄荷)이다. 이것은 일본 고유종이 아니라 중국이 원산지라고 하지만 기원에 대한 상세한 사항은 확실하지 않다.

메이지(明治) 원년에 박하 취사유(取卸油)로서 수출된 것이 일본의 독점품이었기 때문에 이름에 일본이 붙게 되었다는 자소과 박하속의 다년초이며, 해외에서는 화종박하(和種薄荷)로 불려졌다.

서력 918년(엔키(延喜) 18년)에 완성된 '본초화명(本草和名)'이라는 약물 서적에서는, 중국의 박하는 일본의 '메구사(めぐさ, 페니로열(Pennyroyal))'에 해당한다는 기술이 있다.

이에 의해 박하라는 명칭이 정착되어, 옛부터 약용으로 재배되어 왔다.


기록에 의하면 안세이(安政) 연간(1854~1860년), 즉 에도 시대 말기에 오카야마(岡山) 현이나 히로시마(広島) 현에서 상용 작물로 재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대대적으로 재배된 것이 에도 시대이며, 전술한 대로 헤이안 시대부터 존재하는 작물이고 츄고쿠(中国, ※역주: 중국이 아니라 일본 열도의 특정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 지방에서 입수할 수 있는 것을 시즈코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당장 출입하는 상인들을 통해 사카이의 호상(豪商)들, 그리고 아마가사키(尼崎)의 호상들과의 연줄을 이용하여 보기좋게 네 그루의 꺾꽂이용 일본박하를 입수했다.

몇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손을 거쳤기에 그에 맞는 금액을 지불하게 되었지만, 일본박하에서 얻어질 수익을 생각하면 사소한 액수기에 선행투자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박하의 재배는 비교적 쉬워서 강우량이 적고 온난하기만 하면 초보자라도 키울 수 있다.

또, 지하경(地下茎)을 형성하는 식물이 다 그렇듯 왕성한 번식력을 보여, 땅 속 깊숙하게 구획을 나누는 등의 대처를 하지 않으면 한도 끝도 없이 세력을 확대해간다.


"이게 큰 돈이 될 거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습니다만……"


"금년에는 무리지만, 내년부터는 박하유(薄荷油), 박하뇌(薄荷脳, 멘톨(menthol)), 정유(精油, 取卸油)를 채취할 수 있어. 뭐, 박하는 재배가 간단하니까 그렇게 손이 안 가는 품종이야"


일본박하는 다른 박하에 비해 박하유 속의 멘톨 함유량이 크게 높아서, 페퍼민트가 약 50%인데 비해 일본박하는 무려 80% 가까이 함유되어 있다.

이 때문에 약용으로는 적합하지만, 요리나 허브티에는 맞지 않는 품종이다.


"그보다 녹나무(樟) 모으는 건 어때?

가능한 한 못 쓰는 부분으로 모아달라고 주문했는데, 잘 되고 있어?"


"입하된 것들은 모두 창고로 운반해 놓았습니다. 하지만 장작으로도 쓸 수 없는 부분으로 대체 뭘 만드시는 건가요?"


시즈코는 출입하는 상인들에게 녹나무를 모아 달라고 의뢰했는데, 그 때 '시장에서 팔리지 않는 것들이나 가지치기한 가지, 뿌리 등'이라는, 시장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조건을 달았다.

장작으로도 쓸 수 없는 나무부스러기에서 무슨 가치를 보았는지, 그걸 알 수 없는 아야는 시즈코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장뇌(樟脳)야. 이쪽도 장뇌유(樟脳油)랑 장뇌결정(樟脳結晶)을 만들 수 있어. 박하와 마찬가지로 수증기 증류를 하니까, 이쪽도 만들어 두는 편이 좋을거라고 생각해서"


"네, 네에"


장뇌는 셀룰로이드의 가소제(可塑剤)로서 대량으로 소비되어, 일본의 국익을 담당하는 전매품으로서 세계의 주목을 모았다. 하지만 고도 성장기에 셀룰로이드가 석유 플라스틱으로 대체되며 수요가 급감하게 되었다.

현재는 큐슈 지방에서 몇 군데 정도가 천연 장뇌를 제조하는 데 불과하다. 큐슈 지방에 집중되어 있는 이유로서 장뇌의 원료인 녹나무 분포가 편중된 점이 있다. 일본의 녹나무의 무려 8할이 큐슈에 집중되어 있어, 원재료를 값싸게 조달할 수 있는 생산거점만이 살아남아있는 것을 보여준다.


"장뇌 제조에서 녹나무의 남은 찌거기를 태워 만든 재를 밭의 비료, 장뇌를 채취하고 남은 녹나무는 열원으로서 재는 마찬가지로 처리, 장뇌 결정과 장뇌유는 방충제, 방취(防臭), 방향(芳香)으로 판매할 거야. 박하는 수증기 증류해서 황녹색의 정유(精油)를 만들어. 거기서 정제해서 박하뇌랑 박하유를 채취하지. 사용한 박하는 가축 사료로 쓰면 돼. 어때? 거의 대부분 모은 재료로 만들 수 있지? 게다가 방충 작용이 있는 건 굉장히 편리하거든. 때로는 벌레가 질병을 옮기는 경우도 있고. 그 점을 생각하면 영주님이나 노히메 님게도 필요할 거라 생각하는데, 아야 짱은 어떻게 생각해?"


"……배운 게 없는 저에게는 시즈코 님께서 말씀하시는 걸 거의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일단 시즈코 님께서 어쨌든 나중 일을 생각해서 행동하시는 건 이해했습니다"


"뭔가 칭찬받는 건지 비하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뭐 좋아. 방충 효과가 있는 건 여름이 되면 편리하니까"


잘라낸 박하의 생초를 건조시킨 후, 수증기 증류하면 정유를 얻을 수 있다.

일본박하의 경우, 정유를 냉각하기만 해도 멘톨 결정이 검출된다. 고체를 제거한 후의 액체가 30% 전후의 멘톨을 함유하는 박하유가 된다.


"휘발성이 높으니, 기름종이의 생산과 항아리 모양 자기(磁器) 생산을 의뢰했는데, 그쪽은 어때?"


"특별히 문제없이 순조롭게 생산되고 있습니다"


박하유나 장뇌유는 휘발성이 높아, 기밀성이 낮은 용기에 보관하면 시간의 경과에 따라 증발한다.

따라서 자기병에 뚜껑을 닫고, 기름종이로 뚜껑을 덮어 끈으로 묶을 필요가 있다. 게다가 고온, 다습, 화기(火気), 직사광선을 피하여 차갑고 어두운 곳에 보관하는 등 주의가 필요하다.


"산에 자생하고 있는 칡덩쿨로 만든 갈포(葛布, ※역주: 칡의 섬유로 만든 피륙)의 판매는 어때?"


"갈포는 오와리, 미노보다 쿄에서 잘 팔린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흠흠…… (칡가루는 노력이 필요하니 포기하고 칡덩쿨로 한정시켰는데, 나쁘지 않은 매상이네)"


칡은 엉겨붙은 나무를 마르게 하기 때문에, 시즈코는 인부를 시켜 나무에 엉겨붙은 칡덩쿨을 모조리 벌채했다.

뿌리를 수확하면 당분간 기세를 억제할 수 있지만, 칡이 지표면을 뒤덮으면 토양을 빗방울의 침식으로부터 보호하고, 낙엽이 부식물(腐植質)을 더하여 땅의 지력을 증진시키고 보수력(保水力)을 높이기 떄문에 뿌리는 수확할 수 없었다.


신규 농작물을 재배하고 있는 밭의 경과 관찰을 마친 시즈코는, 다음으로 과수원의 경과 관찰을 했다.

과수원은 시즈코들의 거주구에서 조금 떨어져 있지만, 그만큼 넓은 땅을 쓸 수 있었다.

현재 재배하고 있는 과수는 키나이(畿内)에서 운반해 온 금귤(金柑), 중국 원산의 자두, 카마쿠라(鎌倉) 시대 초기부터 재배되고 있는 야마나시(山梨) 현 원산의 코우슈(甲州) 포도, 미츠오가 가져온 수박, 중국 원산의 비파나무, 일본에 옛부터 있는 살구(杏)와 으름, 복숭아, 단감이다.

매실도 과실이니까 과수원에서 재배해야 하나 하고 시즈코는 고민했지만, 매실장아찌가 군수품이 되는 관계로 분리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을 고쳐먹고, 다른 땅에서 매실만 따로 키우기로 했다.


떪은 감이 재배되고 있지 않은 이유는, 미노에는 헤이안(平安) 시대부터 이어지는 도우죠(堂上) 하치야(蜂屋) 감이 있기 때문이다.

조정(천황)이나 쇼군에게 헌상되어, 조정에 승전(昇殿)을 허락받은 격을 가진다는 의미의 '도우죠(堂上)'의 이름을 허락받은 하치야 감의 맛에 오다 노부나가, 토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삼걸은 하나같이 매료되었다.


도우죠 하치야 감은 미노의 기후풍토가 있기에 완성된다.

따라서 시즈코는 떫은 감이 아니라, 1214년에 발견된 일본 고유종의 단감인 '젠지마루(禅寺丸)'를 재배하기로 했다.

물론 기존의 하치야 감에 대해서도 재배를 장려하여, 더욱 크고 더욱 단 감을 생산할 수 있도록 기술지도도 했다.

결과적으로 고급스럽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단맛을 자랑하는 하치야 감의 지명도는 천하에 울려퍼졌고, 시즈코는 매년 품질이 좋은 곶감을 받게 되었다.

하치야 감을 사랑해 마지않는 노부나가가 조금, 아니, 상당히 부러워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가난한 공가(公家)에게서 환금귤(丸金柑)을 사들여서 이식했는데, 순조롭게 뿌리를 내리고 있네. 뭐 내가 원하는 품종은 수입되기를 기다리는 중이지만"


"닝보(寧波) 금귤…… 이었던가요. 확실히 그쪽은 연락을 기다리는 중이었지요. 얼마 전 받은 편지에는 상당한 숫자를 가지고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만……"


금귤의 원산지는 중국의 장강(長江) 중류 유역인데, 현재 일본에서 주류인 금귤은 서강성(逝江省) 닝보에서 재배되고 있는 닝보 금귤이다.

닝보 금귤은 에도 시대(1826년)에 전래되었으나, 시즈코가 재배하고 있는 환금귤은 카마쿠라 시대에서 무로마치 시대 사이에 전래되었다고 한다.


"딱히 금귤에 집착할 필요는 없어. 그밖에도 잔뜩 있는 이웃나라의 과일을 우리 나라에 도입할 거니까. 다소 잘 알지 못하는 작물이라도 괜찮아"


맹종죽(孟宗竹) 때에 어느 정도 상업 루트가 구축되었는지, 가느다랗기는 해도 시즈코는 중국이나 인도, 유럽과의 교역 루트를 손에 넣었다.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이상, 시즈코는 원래대로라면 에도 시대나 메이지(明治) 초기에 전래되는 작물이 일찌감치 일본에 전래되도록 진력하는 것이다.


현재, 시즈코가 전래 시기를 앞당기려고 하고 있는 품종은 아래와 같다.

닝보 금귤과 에도 시대 말기에 전래한 당(唐) 금귤.

1654년에 명나라에서 귀화한 인겐(隠元) 선사가 전한 노란 강낭콩(インゲン豆).

19세기 말의 안세이 연간에 전래된 결구(結球型) 형의 양배추.

에도 시대에 전래된 보탄나(ボタンナ)라고 불리는 자색 양배추.

에도 시대에 중국에서 일본으로 전래된 무화과나무나 라이치.

사과나 배의 접붙이기 밑나무로 사용되는 벚잎꽃사과(マルバカイドウ, ※역주: 정확히는 벚잎꽃사과의 변종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한글 품종명이 검색되지 않아 임의로 적음).

그밖에도 시즈코는 올리브나 아보카도, 아세로라 같은 유럽이나 신대륙 원산의 씨앗이나 모종의 수입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새삼 생각해보니 유럽의 영향은 크네. 대항해시대에 그들이 씨앗을 가져오지 않으면 이쪽은 아무 것도 못 하니까)


시즈코가 원 작물의 전래 시기를 앞당기는 이유는, 원 작물의 육종(育種, 품종개량이라고도 함)을 하기 위해서다.

염색체나 DNA 감정을 할 수 없는 이상, 시즈코는 교잡(交雑) 육종법밖에 선택지가 없다.

하지만 교잡 육종법은 하나의 품종을 만드는 데 약 10년이 걸린다. 그 때문에, 재배 환경을 일찍부터 갖춰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레몬은 순조롭게 열매를 맺고 있네"


레몬은 품종마다 적절한 수확 시기가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1년 내내 계절에 관계없이 수확할 수 있다.

수확하지 않고 과실을 방치해두면 나무에 부담이 가기 때문에 일찌감치 수확을 할 필요가 있지만, 레몬을 많이 쓸 기회는 많지 않다.

그래서 시즈코는 수확한 레몬을 조미료인 소금레몬, 그리고 또 하나는 운동 후의 피로회복에 좋은 벌꿀 레몬을 만들기로 했다.


소금레몬을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우선 레몬을 깨끗하게 씻어 물기를 털고, 양 끝을 잘라낸 후에 8등분의 빗 모양으로 자른다.

다음으로 살균한 보존병에 레몬을 넣고, 그 위에 소금을 뿌리고 뚜껑을 닫는다.

마지막으로 뚜껑을 기름종이로 두르고 끈으로 묶으면, 그 후에는 2, 3일에 한 번 병을 흔들어주면 된다.


발상지인 북아프리카 모로코에서는 레몬을 자르지 않고 통째로 사용하지만, 토막내거나 페이스트 상태, X형으로 자르는 편이 소금이 잘 배어든다.

하지만 수입된 감귤류에는 '포스트 하베스트(post harvest) 문제'가 있다. 그 때문에 현대에서 소금레몬을 만드는 경우에는 국산 레몬을 쓰는 편이 바람직하다.

중탄산소다(重曹)를 써서 농약 왁스를 제거하는 방법도 있지만, 약품이 과육에까지 스며들어있을 가능성을 고려하면 국산 레몬 쪽이 더 안전하다.


벌꿀 레몬은 껍질째로 토막친 레몬에 벌꿀, 취향에 따라 설탕과 간 생강을 넣어 섞은 후, 하루 냉장보관하면 완성이다.

비타민 B1, B2, C, 포도당, 구연산이 함유된 벌꿀 레몬은 높은 피로회복 효과를 가진다.


소금레몬의 보존기간은 매실장아찌에 필적하여, 미개봉일 경우 10년이나 보존된 예도 있다.

벌꿀 레몬도 벌꿀의 살균효과에 의해, 상온에서도 반년 가까이 간다. 당연하지만, 양쪽 다 장기 보존을 주안점으로 두고 있어 염분 및 당분이 과도하게 가미되어 있기에, 항상 먹으면 건강을 해친다.


"탱자의 성장도 순조롭네. 왠지 너무 순조롭게 진행되서 조금 무서울 정도야"


레몬 나무를 늘리고 있는 시즈코였으나, 감귤류는 열매를 맺을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

같은 품종을 대량 생산하려면 접붙이기 기법을 이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접가지(穂木)와 밑나무인 탱자나무의 재배를 병행하고 있었기에 아직은 접붙이기 기법으로 늘리지 못했다.


질병에 대한 내성이나 내한성이 뛰어나고 감귤류와 친화성이 높으며 과실 품질이 뛰어난 탱자나무는 이후에도 많이 쓰일 예정이었기 때문에 무려 200그루라는 방대한 숫자를 심고 있었다.

1년 동안 탱자나무를 재배하고, 거기서 접붙이기 기법으로 레몬과 귤을 늘리면, 수년 후에는 수백 그루를 재배하는 귤밭과 레몬밭이 생겨난다.

원래는 탱자나무는 2년생 밑나무가 바람직하지만, 숫자를 늘리지 않으면 이야기가 되지 않기에 처음에는 1년생 밑나무로 접붙이기를 한다.


하지만 순조롭게 진행되어도 최하 3, 4년(1573년 무렵)은 필요하다.

그 때까지 노부나가가 참아줄 필요가 있었다. 약간 불안은 있었지만, 이것만큼은 달리 방법이 없으니 단념할 수밖에 없다.


일단 접붙이기 기법을 재현할 수 있게 되면, 접붙이기 잡종이라는 다른 품종의 작물을 접붙이기하여 돌연변이를 일으켜 인위적인 신종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전혀 의도하지 않은 접붙이기 잡종이 생길 가능성도 있지만.




시즈코의 경과 관찰은 계속되었다.

다음에는 각지에서 모아들인 작물을 키우는 밭이 아니라, 조금 특수한 재배를 하는 밭이었다.

그 밭은 작물이 보이지 않고, 대신 대나무가 지면에 꽂혀 있고, 곁에는 감물로 물들인 삼베와 대나무로 만든 지주(支柱) 네트가 설치되어 있었다.


"매번 그렇지만, 시즈코 님이 하시는 일은 너무 뜬금없어서 알 수가 없습니다"


밭의 순찰에 따라온 아야가 기묘한 것을 보는 눈으로 밭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흐흥―, 이건 내 독자적인 재배방법이거든. 뭐, 딱히 비밀도 뭣도 아니야. 이건 참마(自然薯)의 재배야. 그물을 쳐 놓은 건, 주아를 수확하기 쉽게 하기 위한 거고"


참마의 재배에 있어서는 종자(種イモ)의 채취에 주의가 필요하다. 천연의 참마는 마 모자이크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어, 이것을 재배해도 수율이 나쁘다. 하지만 이병종(罹病種)의 대부분은 해안가에서 15km 이내에 집중되어 있어, 해안에서 충분히 떨어진 깊은 산 속의 그늘에 자생하는 우량종을 선정해서 채취하는 것으로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

물론 잠재적 감염자를 피했다고 해도, 진딧물 등을 매개로 감염될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었지만 방제는 비교적 간단하다.


참마의 번식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제일 빠른 방법이 절우종(切芋種)을 사용하는 방법이다.

새싹이 나 있을 것이 조건이지만, 그 해에 수확할 수 있으며, 또한 수량이 많은 장점이 있다.


하지만 참마는 흙 속에서 파도치듯 성장한다. 참마를 다치게 하지 않고 캐야 하는 점을 고려해도, 똑바로 성장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현대라면 클레버 파이프(clever pipe)를 사용한 재배를 많이 볼 수 있지만, 비닐도 없는 전국시대에는 클레버 파이프를 준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무판을 사용하는 방법도 생각했지만, 이쪽도 감물로 물들여서 방부처리를 할 필요가 있고, 게다가 평평한 판을 만드는 수고를 생각하면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주위에 있는 것으로 대용품을 만들 수 없을까 생각한 결과, 시즈코는 대나무를 클레버 파이프 대용으로 쓰는 것을 떠올렸다.

대나무는 마디를 관통시키기만 하면 되고, 길이도 조정하기 쉽다. 게다가 흙에 묻어도 부패하지 않고, 참마의 재배 기간인 반년 정도라면 충분히 버틴다.

한 번 가공이 끝나면 몇 년은 쓸 수 있을거라 생각한 시즈코는, 자신의 죽림(竹林)에서 대나무를 벌채하여 클레버 파이프 비슷한 것을 만들엇다.


시즈코는 맹종죽의 죽림을 하나, 참죽(真竹)의 죽림을 세 개, 담죽(淡竹)의 죽림을 두 개 가지고 있다.

죽림 등의 삼림 자원은 군수품에 해당하지만, 그녀는 기술자 마을의 장인들에게 자유로운 벌채를 허가했다.

또, 다른 농촌에서도 연락만 하면 벌채의 허가를 내주었다. 대신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땅을 파고 콘크리트로 둘러싸는 것 이외에는 관리하지 않아, 삼림적인 아름다움은 전혀 없었다.

유일하게 불문율로서 '지하경은 파지 말 것'만큼은 철저하게 지키게 했다. 땅을 파서 지하경을 다치게라도 하면 죽림 전체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직경과 길이를 고려해서 시즈코는 참죽으로 클레버 파이프 비슷한 것을 만들었다.

클레버 파이프의 길이는 대략 1m, 참죽은 마디 사이의 길이가 30cm에서 40cm. 잘 가공하면 마디의 가공은 세 군데만 하면 된다.

도구도 선반에 주축이 하나인 간이 드릴 프레스 기능을 추가하는 것으로 천공 가공은 간단히 할 수 있었다.

그 밖에도 공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드릴 프레스와 밀링 머신(フライス盤)의 개발에 착수하도록 했다.

양쪽 다 선반을 응용하면 제조가 가능했기에, 선반만큼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드릴 프레스가 있으면 구리선(銅線)의 양산이 가능해진다. 구리선의 기초 기술인 다이스 신선(ダイス伸線, 강판의 구멍에 선을 끼워넣어 잡아늘리는 신선법(伸線法))의 공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구리를 잡아늘리는 힘은 인력으로는 불가능하지만, 19세기 초반에 일본에서는 수차의 동력을 이용하여 구리선을 양산했다.

그렇다면 전국시대에도 구리선의 제조가 가능하지 않을까, 라고 시즈코는 생각해서 구리 덩어리를 판 모양으로 잡아늘리거나, 선 모양으로 늘리거나 해서 구리를 형성하는 신동(伸銅) 공장의 건설에 착수했다.

공장의 기본 구상은, 동력을 비인력화, 자동화시켜, 구리 덩어리에서 선, 판 전반을 종합적으로 생산하는 근대 공장에 가까웠다.


"주아는 철분, 칼륨, 마그네슘 등이 풍부하게 들어 있거든. 이걸 재배하지 않을 수는 없지. 뭐…… 주아도 참마도 자양강장에는 좋지만, 정력제 효과가 있는 아르기닌(argenine)을 포함하고 있으니까 괜찮을지 어떨지 걱정이네"


"뭐가 괜찮은 건가요?"


"아직 아야 짱에겐 이른 얘기야. 어흠, 뭐 산에 자생하는 참마가 아니고, 재배 품종이니까 참마(山芋, ※역주: 일본어 명칭이 다름) 쪽이 부르기 편하려나?"


"명칭은 뭐라도 문제없습니다. 설령 전례가 있더라도, 영주님께서 바꿔 버리실 테니까요"


"……있을 법 하네. 자, 자, 참마(自然薯), 가 아니라 참마(山芋)지. 이게 재배되면 참마즙(トロロ) 보리밥이라던가, 참마로 만든 장어구이(蒲焼き) 같은 걸 만들 수 있겠지만, 가는 데 수고가 들 것 같네.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저로서는 시즈코 님께서 이 이상의 권익을 늘리는 의미를 모르겠습니다만……"


"잉? 권익? 나, 권익 같은거 없는데?"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시즈코를 보고 아야는 머리가 아파졌다.


지금은 오와리, 미노에서 시즈코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은 절이나 사원을 제외하면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의류의 경우 시즈코는 삼실(麻糸), 견사(絹糸), 무명(木綿)의 세 가지를 제조하고 있다. 삼실은 범용성이 높아, 군수 물자로 말하면 모래주머니, 생활 물자로서는 그물 등에 이용된다.

견사는 고급 의류의 재료로서, 무명은 화승총의 도화선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 이외에도 농작 기술에 의한 수확 향상과 재배 품종의 증가, 어촌에서는 소금의 생산량 향상 및 부산물에 의한 신제품.

물건이 있어도 교통수단이 열악하면 얘기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머캐덤(macadam) 포장기술로, 오와리, 미노는 교통편이 대단히 좋고, 게다가 낙시낙좌 정책 덕분에 상인들이 장사하기 편하다.


노부나가는 상인의 보호를 명목으로 그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하면 된다. 장사할 수 있는 물건의 숫자가 많으면 많을 수록, 노부나가에게 들어오는 돈은 늘어난다.

즉, 시즈코가 새로운 사업이나 재배를 시작하는 것은, 그대로 노부나가의 군자금이 늘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주변국에게 수수께끼로 보이고 있는 노부나가의 연금술 중 하나이다. 하지만 수수께끼라고 생각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시즈코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것은 노부나가의 의향이 거의 개입되지 않기 떄문이다. 그녀가 멋대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고, 그것을 상인들이 재빨리 발견해서 장사를 하면, 노부나가에게 들어오는 돈이 늘어난다.


모든 것은 시즈코가 노부나가에 대해 '절대적인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성립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시즈코 본인이 인간으로서의 욕심은 있어도,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은 단호하게 '불필요'하다고 잘라버리기 때문에, 오다 가문 가신들에게 입장이 난처해진다는 위기감을 주지 않는 것도 관계가 있다.


"시즈코 님께서는 이제는 오다 가문의 중진(重鎮). 그 의미를 잘 이해해 주십시오"


"나, 그런 권익은 전부 영주님이 가지고 계신다고 생각했는데?"


"명목상은 영주님이시지만, 실제로는 시즈코 님이 가지고 계시는 겁니다. 가끔 오는 돈, 그건 시즈코 님이 가진 권익을 이용한 상인들에게서 얻은 세금의 일부를 상으로 보내시는 겁니다만?"


"어? 그런 거야?

딱히 필요 없는데…… 하지만, 영주님으로서는 신상필벌을 하실 필요가 있으니, 필요한 조치려나"


본인에게 자각이 없다고는 해도, 오다 군의 군자금을 늘리고 있는 시즈코에게 상을 주지 않는 것은 노부나가에게 있어 여러가지로 문제가 된다.

고용인(奉公人)에게 상을 주지 않는 째째한 영주, 라는 이미지가 생기면 부하들의 기개(気概)에도 영향을 끼친다.

따라서 노부나가는 시즈코를 칭찬하고 보상금을 줄 의무가 있다. 그 돈을 써서 시즈코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 때문에, 그녀가 항상 돈을 줄이려고 하는 노력은, 실은 돈을 늘리는 노력이나 다름없었다.


"에엑―, 하지만 돈을 모으는 것도 경제적으로 문제거든. 케이지 씨 정도로 팍팍 써준다면 나는 고마운데"


시즈코가 새로운 사업에 돈을 쓰는 이유는, 호위대인 사이조는 돈을 잘 쓰지 않고, 나가요시는 훈련을 하느라 돈을 쓸 틈이 없으며, 아야는 말할 것도 없어, 케이지 이외에는 돈을 쓰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는 혈액과 같은 것이라, 돈을 시장에 흘려보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이곳저곳의 업계에 돈을 뿌리는 행위는, 경제 활동을 자극하는 의미에서도 필요한 조치인 것이다.

특히 노부나가의 화폐경제 정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돈을 가진 사람이 시장에 계속 돈을 흘려보낼 필요가 있다.


"돈을 쓰는 습관이 없어서……"


"천천히 익숙해지면 돼. 그러다보면 싫어도 화폐 거래가 될 테니까"


시즈코에게 지적을 받아도 어딘가 납득되지 않는 표정의 아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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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가리아